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37화 (137/198)

끼익.

탁.

그래서 에드는 방문이 살짝 열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계속해서 단잠을 잤다.

* * *

꼬끼요.

다음 날, 오늘도 기운 넘치는 닭 울음소리와 함께 날이 밝자 눈을 번쩍 뜬 에드는 급히 외출할 준비를 하며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종이를 찾았다.

“어?”

에드가 이상함을 느끼고 책상 이곳저곳을 뒤졌지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책상 위에 있었던 종이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한참을 뒤져 보았지만 이 이상 시간을 소비하면 제이논이 방을 나서 버릴 것 같아 에드는 종이 찾는 걸 포기하고 밖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제이논은 일찍 일어나 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서둘러 제이논의 맞은편에 앉은 에드가 수첩을 내밀며 말했다.

“……그래서 제이논, 이런 식으로 해서 도련님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 건 어떨까 해서요. 아마 도련님은 자신의 진짜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고 계실 거예요. 백작 저에 계실 때는 생일이 달랐으니까요.”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에드를 하품하며 맞았던 제이논은 그의 계획을 다 듣고 나자 열의에 불타올랐다.

“암! 도련님이 돌아오시고 처음 맞는 진짜 생일인데, 잘 챙겨야지! 그 백작 저 녀석들이 도련님의 생일을 제대로 챙겨줬을 리가 없으니까 더더욱.”

생각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그의 모습에 살짝 떨어져 앉은 에드가 수첩을 넘기자 제이논이 말을 이었다.

“좋아, 나는 에드의 의견에 따를게. 어차피 대공 전하의 허락도 다 받았을 테고. 자, 그럼 뭐부터 하면 좋을까?”

어제 목록을 적어 놓았던 종이를 찾으려다가 이내 잃어버렸다는 걸 기억한 에드는 수첩 맨 뒷장을 찢어 제이논에게 부탁할 행사를 다시 하나씩 적어 나갔다.

매 단어가 적힐 때마다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제이논은 마지막 문장이 끝났을 때 박수를 치며 그를 칭찬했다.

“확실히 로넨 도련님을 옆에서 보필한 시간이 있어서 그런지 기획이 남다른데? 만약 내가 계획을 세웠다면 분명 기존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거야. 그럼 준비는 바로 오늘부터?”

에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논이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외투를 걸치고 부리나케 방 밖으로 향했다.

“내가 지금 바로 사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려놓을게. 에드는 너무 무리하지 말고 도련님만 잘 부탁해.”

“네, 알겠어요.”

방에 홀로 남겨진 에드는 수첩을 정리한 뒤 대공의 집무실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힘차게 일어났다.

‘……어?’

그때였다. 에드는 갑자기 현기증이 이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의자 손잡이를 잡고 눈을 감은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요즘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데 왜 이러지?’

이내 잦아든 현기증에 별일 아니라 생각한 에드는 바쁜 일정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똑, 똑

“응, 들어와.”

집무실을 노크하자마자 들리는 대공의 목소리에 에드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대공 전하, 어제 말씀드렸던 일에 대한 건으로 바로 준비해 주셔야 하는 게 있습니다.”

“어떤 거지, 에드?”

귓가에 닿는 대공의 목소리에 작게 심호흡한 에드가 입을 뗐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전하께서 시간을 내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먼저 제안한 게 있으니 지금 바로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에드도 알다시피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일주일은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에드의 말에 대공은 조금 난색을 표했다. 잠시 그의 표정을 살펴본 에드는 이곳에 오기 전 방으로 돌아가 챙긴 서류를 꺼내 책상에 조심스레 내밀었다.

“저, 대공 전하. 이 서류를 한 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이게 뭐지?”

“그게 저…… 제가 그간 일을 배우면서 개선되었으면 했던 업무 체계를 집사장님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 정리해 본 것입니다.”

봉투에서 꺼낸 서류를 대공이 말없이 한 장 한 장 넘기며 꼼꼼히 읽었다.

그 모습을 긴장된 표정으로 살피던 에드는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사실 대공 전하께서 홀로 모든 업무를 맡으시는 걸 보고 궁금증에 일어 북부 성의 일 처리가 원래 이렇게 한 사람에게 몰리는 구조인지 집사장님께 여쭤보았습니다.”

대공이 살짝 시선을 들자 에드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전대 공작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대공 전하 한 분께서 모든 일을 확인하시지는 않았다고 말해 주셨어요. 해서…….”

대공의 책상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에드는 서류의 한 부분을 짚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도서관에서 북부 행정에 관련된 도서들과 그간의 업무 일지 등을 찾아보며 정리해 보았습니다. 예전과 비슷한 시스템을 유지하되 자질구레한 업무에는 중간중간에 각 장들을 배치해…….”

에드는 펜까지 꺼내 서류 이곳저곳을 표시하며 말을 늘어놓았다. 그 상태가 계속되자 책상 건너편에서 설명하기가 힘들어진 그가 빙 돌아와 대공 옆에서 바짝 붙었다.

대공은 그런 에드의 모습을 보며 즐거이 웃었다.

하지만 에드는 취업을 위해 PPT를 준비했던 것이 떠오른 나머지 역할에 완전히 몰입해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대공을 설득하는 것, 단 한 가지였다.

‘대공 전하와 로넨이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서는 이 발표를 무조건 성공해야 해. 현대 사회가 구축한 시스템의 힘을 보여 주겠어!’

그렇게 에드의 불꽃 튀는 발표가 끝났을 때 창밖에는 어느새 해가 쨍하게 떠올라 있었다.

“……이렇게 하면 앞으로 큰 행사 이외에는 전하께서 일일이 서류를 읽어 보시면서 최종 확인을 해 주실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에드의 발표에 흡족함을 숨길 수 없던 대공은 입가의 미소를 숨기기 위해 팔짱을 낀 채 고심에 빠진 척을 했다.

“흠…… 사실 에드가 말했던 건 이전에도 종종 올라왔던 시안이야. 하지만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지. 왜 그랬을 거라 생각해?”

대공의 이런 반응에 발표가 망했다는 생각이 든 에드가 급격하게 쭈그러든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장을 맡을 만한 적임자가 없어서 그런 건가요?”

“아니, 중간 직을 맡은 사용인들의 능력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각 부서를 책임지고 담당할 인력은 충분해. 북부 지대 치안 부분은 이르텔, 성 내부 관리는 집사장, 사무와 재정 관련은 제이논, 외교 부문은 텐스에게 맡기면 되니까.”

“……그럼 지금까지 해 왔던 방식과의 차이 때문인가요?”

“그것도 아니야, 우린 아직도 잇속 다툼만 벌이는 황궁과는 다르니까.”

점점 더 생각의 늪에 빠져드는 에드를 보다 못한 대공이 답을 내놓았다.

“봐 봐, 에드. 이 부서들 중간에서 연결고리를 맡아 줄 인사가 없었어. 이게 왜 필요하냐면…….”

에드는 대공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의 계획이 사용인의 시점에만 맞춰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에드는 대공이 건네준 의자에 앉아 정신없이 서류를 보충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회의는 늦은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식사는 시간이 되어도 대공이 식당에 내려오지 않자 올라온 사용인이 이를 가져다주어 그것으로 해결했다.

“……그럼 이 계획은 지금 당장은 못 하겠네요?”

조금 피곤한 기색을 띠고 있지만, 여전히 눈만은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에드를 보며 대공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까도 말했듯이 필요한 건 각 장들을 묶어 줄 인사야. 그러니까 그 문제만 해결되면 지금 바로 시행할 수 있지.”

“…….”

“마침 봄이 될 때까지 큰 행사도 없으니 시작한다면 지금이 딱일 것 같은데.”

에드는 대공의 말에 궁금증이 일었다.

“지금은 그 역할을 수행할 만한 사람이 있다는 뜻인가요?”

대공은 아무런 답도 없이 에드를 빤히 쳐다봤다.

이내 이상함을 감지한 에드가 깜짝 놀라며 손가락으로 조심히 자신을 가리켰다.

“설, 설마 저…… 저는 아니겠죠?”

“축하해, 에드. 이제 정말 내 하나뿐인 집사가 되었네.”

* * *

탁.

에드는 자신의 방문에 기대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렇게 한참을 카펫 위에 주저앉아 있던 에드는 등 뒤에서 열리는 문에 쾅, 소리를 내며 머리를 부딪쳤다.

“악!”

“어…… 에드 왜 머리로 문을 부수고 있어? 이거 부서지면 어떡하려고! 성 관리비만 1년에 얼마인 줄 알아? 이제부턴 내가 예산 총책임자란 말이야.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고.”

머리를 부여잡던 에드는 제이논의 말에 발끈하다가 마지막 말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책, 책임자라면 설마……?”

“어, 에드 덕분이야. 전하께서 이미 요직들을 다 불러서 앞으로 북부 성의 바뀔 체계와 주의해야 할 점을 다 안내하셨어.”

“…….”

“마법은 언제봐도 신기한 거 같아. 하나뿐인 서류를 복사하는 것도 모자라 정보까지 한 번에 휙휙 머릿속에 바로 집어넣어 주다니.”

제이논이 여전히 주저앉아 있던 에드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 줬다. 그리고 그의 손을 크게 흔들며 기쁨을 표했다.

“정말 고마워, 아직 임시긴 하지만 이대로 체계가 자리잡히면 전하도 훨씬 편해지실 거야. 집사장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감사 인사를 하고 싶어 했는데, 다 오면 복잡할 것 같아서 내가 대표로 감사 인사를 하러 왔어. 아, 그리고 축하 인사도.”

“축하요?”

“앞으로 잘 부탁해, 이제 전하의 직속 부하는 에드 혼자니 잘 보이라고 전하께서 신신당부하시던데?”

제이논의 말에 통증과 함께 잊어 먹었던 사실을 떠올린 에드가 다시금 머리를 붙잡으며 온몸을 비틀었다.

제이논은 처음 대공의 직속 부하가 되었을 적 선임이 힘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그를 토닥여 주었다.

“전하께서도 잘 부탁한다고 말 전해 달라고 하셨어. 아, 오늘은 이미 날이 늦었으니 내일부터 일주일간 시간을 내겠다는 말도.”

“…….”

“그러니 에드, 날도 늦었는데 어서 자. 하늘이 무너져도 북부 성에 아침은 오니까…….”

에드는 제이논이 남긴 마지막 말을 그날 밤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번민하며 기도를 해도 북부 성의 아침은 밝았고 그의 직위는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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