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36화 (136/198)

제이논이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휘적휘적 저으며 그에게 건넸다.

이미 확인한 서류니까 내가 올 때까지 전부 도장 찍어 놓고 정리해 놔

메모지를 읽어 내려가던 에드는 아까 만났던 대공이 요깃거리나 간식을 준비해 달라고 하겠다던 말을 떠올리고는 망설임 없이 식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 행동이 어찌나 빨랐는지 제이논이 에드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그 자리에는 메모지만이 팔랑거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 * *

에드가 식당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식사 시간이 지났는데도 맛있는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평소와 다르게 주방의 소란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자 에드는 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에드는 그곳에서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광경을 봤다.

‘대공 전하께서…… 요리를 하고 계시잖아?’

요리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을 것 같던 대공이 주방장과 나란히 서서 커다란 웍을 돌리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정말 배우는 게 빠르시네요. 조금만 더 하시면 제가 설 자리가 사라지겠습니다.”

“주방장이 잘 가르쳐 준 덕분이지. 어떤가? 이 정도면 다른 사람에게 음식을 내줘도 욕은 안 먹겠지?”

“어휴, 전하. 이미 몇 번이나 저희에게 맛을 보여 주셨으면서 아직도 불안하십니까?”

“음식을 별로 안 먹는 이라 매번 불안해서. 그래도 요즘은 먹는 양이 늘어서 다행이지만.”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에드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대공과 눈이 마주쳤다.

웍을 멈춘 대공이 인사를 꾸벅하는 에드에게 구름다리에서 보였던 미소를 보이며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아까보다 더 집중력이 높아진 것 같은 대공의 모습에 에드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등 뒤를 톡톡 쳐왔다.

“에드.”

세나였다.

“아, 세나.”

“전하께서 식당에 앉아 있으면 곧 나가겠다고 하셨어.”

“알겠어,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원래 전하께서 요리를 하실 수 있었나?”

그녀와 주방을 나와 식당으로 돌아온 에드가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들을 꺼냈다.

“어? 에드는 모르고 있었어?”

“뭘?”

에드와 세나는 서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의문을 표했다.

“지금까지 에드가 먹은 수프 전부 대공 전하께서 직접 끓이신 거잖아. 전하께서 내게 직접 에드가 뭘 좋아하는지 묻기도 하셨는데.”

에드는 새롭게 안 사실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제이논은 주방장님이 만들어 주신 수프라고 했는데?”

그제야 세나는 에드에게 이 사실이 비밀이었다는 걸 떠올리고는 합, 하고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살금살금 뒷걸음질 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세나의 모습을 눈으로 따르던 에드는 곧 대공이 돌돌돌 소리가 나는 트롤리를 끌고 주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대, 대공 전하.”

에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하자 그대로 있으라고 손짓한 대공이 트레이에 실린 음식들을 하나씩 테이블에 꺼내 놓았다.

척 보기에도 푹 익힌 뒤 구워 포크만 가져다 대도 살살 찢길 것 같은 닭고기, 에드가 방 안에 있을 때 즐겨 먹던 소고기 수프, 그리고 신선한 달걀로 만들어진 폭신한 오믈렛…….

식탁 위에 밑도 끝도 없이 놓이는 음식들을 보며 에드는 점점 입이 벌어졌다.

“저……전하, 이건 음식이 너무 많은 거 아닐까요? 저뿐만 아니라 로넨 도련님에 제이논까지 와도 다 못 먹을 것 같아요.”

에드의 말에 식탁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진 대공은 아쉽다는 듯이 트레이에 남아 있는 음식들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뭐…… 부족하면 그때 꺼내 놔도 되니까. 자, 식겠다. 어서 먹어 봐.”

“어…… 이걸 저 혼자서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풍기는 음식들을 멍하니 보던 에드는 대공의 뜨거운 시선에 못 이겨 포크를 들어 느릿하게 닭고기에 가져다 댔다.

먹음직스러운 살코기를 한입 가득 머금자 살살 녹으며 향긋한 육즙을 입 안 가득 쏟아 냈다.

그 맛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에드는 다음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속도는 아까와 다르게 조금 빨라져 있었다.

* * *

에드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식탁 위에 올라온 접시들뿐만 아니라 트레이에 있던 디저트 접시들도 전부 비워진 상태였다.

그 옆에서 대공이 대견하다는 듯이 에드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잘 먹으니까 좋네. 식당에는 내가 말해 놓았으니까 식사 시간이 지나고도 배고프면 언제든지 와.”

“그…… 오늘만 이런 거지. 제가 평소에 이렇게 많이 먹지는……. 아 참, 대공 전하! 혹시 제가 그간 먹었던 수프들도 다 이렇게 직접 만드신 건가요?”

일부러 말을 돌리는 에드를 보며 대공이 이걸 그냥 넘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에드는 그 표정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다행히 대공은 그가 부끄러워한다는 걸 알고 그의 속셈에 넘어가 주었다.

“에드가 나 때문에 다쳤는데 책임도 안 지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치료는 못 해 주더라도 음식 정도는 직접 해 주고 싶어서 한 건데, 왜? 음식 맛이 이상했어?”

대공의 말에 에드가 절대 아니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엄청 맛있었어요. 안 그래도 주방장님 찾아가서 종종 그 수프를 해 주시면 안 되냐고 여쭤보려고 했는 걸요.”

그렇게 대공과 대화를 이어가던 차였다. 에드는 문득 로넨의 생일 때 뭘 하면 좋을지 영감이 떠올랐다.

“저, 대공 전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저, 대공 전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쓰러졌을 때와 다르게 얼굴이 반질거리는 에드를 보며 의자에 기대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던 대공이 얼마든지 말하라는 듯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다음 달이 로넨 도련님 생일이잖아요. 그 준비를 저한테 맡겨 주시면 안 될까요?”

“에드는 지금 맡은 일도 있는 데다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지나서 제이논에게 부탁하려고 했는데.”

그 말에 대공의 시선을 피하던 에드가 다급히 그의 손을 붙잡고는 눈망울을 반짝였다.

“이번 생일은 로넨 도련님께서 북부로 돌아오신 후 처음으로 맞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니 그 어느 때보다도 특별한 하루를 보내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전반적인 업무는 제이논에게 일임하시더라도 세세한 몇 가지 준비는 저에게 맡겨 주시면 안 될까요?”

에드에게 색다른 계획이 있음을 눈치챈 대공이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에드가 말한 대로 이번 로넨의 생일은 동생과 나, 우리 둘 모두에게 뜻깊은 날이 될 거야. 그러니…… 그 준비를 나도 함께하게 해 준다면 허가하지.”

대공의 말이 길어짐에 따라 조마조마해 하던 에드는 긍적적인 대답에 조금 더 힘을 주어 그의 손을 잡았다.

“물론입니다. 오히려 제가 먼저 대공 전하께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었는걸요.”

그 후 에드와 대공은 한참 동안 머리를 맞대고 식당에 앉아서 앞으로 있을 로넨의 생일 파티 계획을 구상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서류를 한가득 든 제이논이 울먹울먹한 표정을 지으며 식당으로 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식당 바닥에 엎어져 서럽게 울던 제이논을 잘 달랜 후-대공은 제이논의 등쌀에 서류를 들고 집무실로 돌아갔다-방으로 돌아온 에드는 책상 위에 앉아 수첩을 꺼냈다.

펼친 수첩 사이 사이에는 그와 대공이 한 고민의 흔적이 빼곡히 남아 있었다.

그걸 차분히 다시 읽어 본 에드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을 최대한 유용하게 쓰기 위해 종이 한 장을 뜯었다. 그런 뒤 로넨이 가장 바랄 것 같은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소원?

1. 전하와 함께 놀기.

2.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소풍 가기.

3. 대공 전하께서 읽어 주는 동화책 들으면서 잠자기.

4. 전하와 함께 쿠키나 케이크 만들기.

…….

차분히 내용을 정리해 가던 에드는 펜대 끝으로 볼을 긁적였다.

‘일단 이 정도까지만 생각해 두고 더 자세한 건 내일 제이논과 의논해 봐야겠다.’

에드는 침대로 가 벌써 어둑해진 창밖을 보곤 옆에 있던 램프를 훅 불었다.

평소에는 누워서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느라 쉽게 잠들지 못하던 에드였지만, 요즘 따라 늘어난 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오늘은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내 방에는 고롱고롱거리는 에드의 숨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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