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35화 (135/198)

“어, 방에만 있으면 따분할 것 같아서.”

평소라면 이 말을 듣자마자 바로 방 밖으로 튀어 나갔을 에드인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만약 방을 나간다면 그 소식을 들은 대공 전하가 나를 찾아오겠지?’

……그리고 그렇게 그와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수치심으로 제 자아가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음…… 그럼 도서관에서 읽을 만한 책을 가져다줄래요?”

“어떤 종류로?”

“아무거나요, 재미있는 걸로.”

“아무거나라……. 그럼 내가 재밌게 읽었던 책을 가져다줄까? 가장 추천하는 건 ‘제국 징수처에서 절대 가르쳐 주지 않는 세금의 진실’이랑 ‘철학적 대화와 작품의 확장’인데.”

듣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나는 책들의 제목에 에드의 눈이 점점 뚱하게 가라앉자 제이논이 덧붙였다.

“별로야? 그러면 죽기 직전에서야 황궁에서 탈출한 현자가 집필한 ‘내일 나라가 망해도 나는 당근을 심는다’는?”

“…….”

“사실 이것만 봐도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가. 특히 사표를 낼 때마다 상사가 사라져서 퇴근 후 마법 공부를 했다는 부분이 가장 심경을 울리는데. 아…… 그 부분을 떠올렸더니 또 눈물이 나려고 하네.”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제이논을 보며 피식 웃은 에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수프를 떠먹으며 말했다.

“정말 좋은 책 같아요. 이렇게 제이논의 말만 듣고 있어도 눈물이 날 것 같으니까요.”

제이논이 그 마음 잘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에드를 보며 코를 쓰윽 훔쳤다.

‘에드가 왜 다쳤는지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아 정확한 내막은 모르지만…… 분명 전하를 구하다가 이렇게 된 거겠지.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전하를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 에드.’

속으로 에드에 대한 고마움을 툭 내뱉은 제이논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나한테 맡겨 두라고. 에드가 방에서도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

큰소리를 탕탕 치며 제이논이 방으로 나가자 에드는 고기가 떠다니는 수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이논이 저렇게 친절한 얼굴로 의욕에 찬 걸 보니 도리어 무서운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벌컥 열리며 제이논이 들어왔다.

분명 빈손으로 나갔던 그의 양손에는 흉기로 써도 될만한 두꺼운 책더미가 들려 있었고 뒤에는 로넨이 따라 들어왔다.

“에드! 독서를 할 거라면서?”

방 안으로 들어선 로넨이 제이논을 지나쳐 침대로 뽀르르 달려와 올라오며 말했다.

“나도 에드 옆에서 같이 책을 읽을래!”

제이논이 테이블 위에 책을 쿵 내려놓더니 그중에 얇은 책 한 권을 쑤욱 뽑아 로넨에게 건넸다.

에드도 제이논이 챙겨온 책들의 제목을 훑어보다가 살펴볼수록 현기증만 나는 것 같아 그나마 어려워 보이지 않는 책을 골라 침대로 올라왔다.

“에드, 봐 봐. 어떤 책 골랐어?”

“도련님은요?”

“난 동화책인데, 제이논이 추천해 줬어!”

“그럼 재미있는 시간 보내세요, 도련님.”

“응! 고마워, 제이논!”

제이논이 로넨에게 인사를 하고 에드에게 손을 팔랑이며 밖으로 나섰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책을 펴는 로넨을 보며 에드도 그 옆으로 다가가 자리를 잡았다. 가끔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글씨가 빼곡하게 들어찬 부분을 외면하고 싶었지만 읽다 보니 흥미가 생기자 집중해 읽어 나갔다.

그러다 툭, 제 팔에 닿은 묵직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로넨이 책장을 쥔 채 고개를 꾸벅꾸벅하더니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에드의 팔에 머리를 기댄 채 잠이 들었다.

옅게 웃은 에드는 로넨의 허벅지에 놓인 책을 조심스레 치우고 그를 살폈다.

아무 근심 없어 보이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처음 봤을 때와 다르게 이제 로넨에게선 백작 저에서 봤던 외로움, 슬픔 등의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로넨을 처음 봤을 때는 진짜 조그맸는데……. 어느새 이렇게 쑥쑥 자랐구나.’

제 팔에 닿은 로넨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베개에 받쳐 눕힌 에드는 침대 밖으로 살금살금 빠져나왔다.

‘벌써 밤이네.’

책을 읽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에드는 창밖을 보다 책상으로 가 앉았다.

날씨는 좋아졌지만 아직 겨울이라 그런지 밤이 더 일찍 찾아오는 느낌이었다. 시계를 흘깃 보니 아직 저녁 먹을 시간까지 여유는 있었기에 에드는 얼마 안 남은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

그리고 어느 순간, 제 머리 위에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느낀 에드는 더 이상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눈만 끔뻑였다.

‘어, 뭐지?’

갑자기 책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깜짝 놀란 에드가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대공이 책상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대공 전하.”

한 번 더 화들짝 놀란 에드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나려고 하자 대공이 괜찮으니 그대로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냥 앉아 있어도 돼. 아까 방문을 노크했는데 반응이 없더라고. 다시 쓰러진 줄 알고 걱정했어.”

“아,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방에 있느라 심심한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아 보여서 다행이야.”

대공은 웃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새근새근, 에드와 대공의 말소리에 깰 법도 한데 로넨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앞머리를 대공이 가볍게 쓸어올렸다.

“로넨이 그동안 많이 긴장했던 것 같아. 그간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당연한가?”

입맛을 다시며 잠꼬대를 하는 로넨을 품에 안아 올린 대공이 그의 등을 가볍게 도닥였다.

“그럼 이만 가 볼게. 에드도 편히 쉬도록 해.”

“네, 대공 전하.”

“언제든지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아, 네. 알겠습니다.”

에드는 방을 나서는 대공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뒤로 휙 돈 그가 제게로 성큼성큼 다가오자 놀라 눈동자를 잘게 떨었다.

“참, 이 말을 빠뜨렸네. 편안한 밤 보내, 에드.”

“……네? 네, 대공 전하께서도요.”

에드를 가만히 바라보던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방을 나서자 복도까지 나와 대공을 배웅한 에드는 방문에 이마를 쿵, 박았다.

‘하…… 어쩌지? 대공 전하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겠어.’

에드는 마음이 복잡해질 때마다 책에 파묻혀 지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난 후에야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아, 이제는 몸 상태가 좋아진 것 같으니까.’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컨디션을 확인한 에드는 방문을 열었다.

어느새 한겨울이 지나가고 초봄에 가까워진 날씨였다.

‘오랜만에 연구실을 가 볼까?’

그동안 있었던 일들로 오랫동안 연구실을 방치한 게 마음이 쓰였던 에드가 가벼운 청소 도구를 챙겼다.

그리고 외성을 향해 나아가다가 구름다리에 대공과 이르텔이 서 있는 걸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에드를 발견한 대공이 구름다리 손잡이에 팔을 기대며 그를 내려다봤다.

코끝을 긁적이다 괜스레 옷을 툭툭 털어 매무새를 정리한 에드는 계단에 올라섰다.

‘……그런데 어쩐지 묘하게 아랫배가 아픈 것 같네.’

작게 침음을 흘린 그는 구름다리를 올라서기 직전에 있는 사각지대로 들어가 배를 살살 문질렀다. 손바닥이 외투에 닿을 때마다 천 스치는 소리가 울렸다.

‘전하 앞이라고 긴장이 되어서 그런가.’

허, 하고 짧게 웃은 에드가 흐읍, 힘껏 북부의 서늘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찬 공기를 깊게 삼키자 통증이 완화되는 느낌이었다.

한 번 더 배를 쓰다듬은 에드는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청소 도구를 갈무리한 후 대공에게 다가갔다.

“연구실에 가는 거야?”

“네, 아직 본격적인 연구는 못 하지만 연구실에 쌓인 먼지 정도는 청소하고 싶어서요.”

“주치의가 조금씩 움직여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며칠 더 쉬지. 방금 전에도 다친 부위가 아팠던 거 아니야?”

대공이 모르게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훤히 다 보인 모양이었다.

“아, 아니에요. 요 며칠 수프만 먹었더니 배가 쉽게 고파져서요. 식사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배에서 소리가 나네요. 아하하하.”

장난스레 웃던 에드는 대공이 여전히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자 살짝 눈을 피했다.

“어?”

그렇게 땅에 비친 대공의 그림자를 내려다보던 에드는 무심결에 소리를 내뱉었다. 제 주변으로 빛무리가 퍼지더니 조금 전까지 쌀쌀했던 날씨가 따스해졌기 때문이다.

슬쩍 고개를 든 에드를 보며 대공이 말했다.

“아직 날이 추우니까 연구실에 너무 오래 있지 말고, 2시간 후에 식당으로 와. 주방장에게 말해서 끼니를 때울 간단한 요깃거리나 간식을 부탁해 놓을 테니까.”

그 말과 동시에 반달 모양으로 접히는 대공의 눈에 에드의 볼이 다시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고 한참을 구석구석을 쓸고 닦은 에드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이논과 텐스도 요즘 내가 먹는 음식량이 평소의 배는 늘어난 것 같다고 하던데…….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지. 자칫하면 로아처럼 되어 버리겠어.’

배가 빵빵해져서 침대 위를 굴러다니는 로아를 떠올린 에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항상 몸에서 빼놓지 않는 수첩을 꺼내서 앞으로 있을 일정을 살펴보았다.

종이 사이 사이를 뒤적거리던 에드는 날짜를 가늠하다 벽에 붙여진 달력과 수첩을 번갈아 봤다.

‘아, 잠깐만. 다음 달이면 로넨 도련님의 생일이잖아?’

이 일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책상을 펜으로 톡톡 두드리던 에드가 시계를 흘깃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2시간이 지나지 않았으니 집무실에 계시겠지?’

하지만 연구실을 나선 에드가 본성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에는 제이논이 대공 대신 자리에 앉아 멍하니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이논, 전하께서는 어디 가셨어요?”

“나도 그게 궁금해. 내가 왔을 땐 이미 전하는 안 계시고 책상 위에 메모지만 붙어 있었거든.”

“메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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