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34화 (134/198)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쏘옥 내밀었던 로아가 껑충껑충 뛰어와 침대로 올라왔다. 고작 며칠 못 본 것 같은데- 정확히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훌쩍 자란 느낌이었다.

깡깡!

에드와 로넨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고 고개를 들이댔던 로아가 틈이 없자 뒤로 물러나 짖었다.

로넨이 웃으며 에드를 한 번 더 힘주어 꽉 끌어안고는 떨어졌다. 그리고 주변을 뛰어다니면서 반갑다며 인사하는 로아를 들어 에드에게 건넸다.

“로아도 에드가 많이 보고 싶었대.”

“그래, 로아야. 오랜만이다.”

로넨의 따뜻한 온기를 대신하듯 제 손을 핥는 까끌까끌한 여우의 감촉에 에드는 이곳이 꿈속이 아닌 진짜 북부 성의 제 방이라는 걸 다시금 상기했다.

그때 방 어디선가 익숙한 체향이 흘러왔다. 에드는 술렁술렁한 가슴을 다스리며 방 안을 다시 천천히 둘러보았다.

“…….”

“…….”

언제 온 건지 방 입구에 기대선 대공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들을 눈부시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대공의 눈빛에 어쩐지 겸연쩍어진 에드는 저도 모르게 이불을 확 끌어 올렸다. 그 바람에 눈앞이 어두워진 로넨이 이불을 걷어 내려고 했다.

“앗, 에드. 왜 갑자기 이불을 끌어 올려? 우리 지금 숨바꼭질하는 거야? 근데 형이 놀이는 방 밖에서 해야 한다고 했어.”

“아, 잠, 잠깐만요. 도련님.”

아직 마음의 준비가…… 무슨 마음의 준비인지는 모르겠지만 에드는 잠시만이라도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이불 속에서 설전이 오고 가는데 에드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로아가 이불 밖으로 튀어 나갔다.

빠져나가면서 생긴 틈으로 고개를 쏘옥 내민 로아가 대공을 슬쩍 올려다보더니 이불 끄트머리를 앙, 물었다.

“엇, 로아야!”

그러고는 침대와 반대 방향으로 전력 질주를 했다. 순식간에 주르륵 딸려 내려간 이불에 당황한 로넨이 바닥으로 내려와 로아를 뒤쫓기 시작했다.

“아! 로아야! 멈춰! 이불이 더러워진단 말이야.”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방 밖으로 훌쩍 나선 로아가 이불로 온 북부 성 복도를 청소하고 있었다.

로넨과 로아의 한바탕 추격전이 시작되고 그런 둘의 모습을 발견한 텐스와 제이논까지 합세해 북부 성이 시끌시끌해졌다.

“텐스! 저 앞쪽을 막아!”

“제이논, 이불을 밟으라고!”

에드는 이 상황에 이상함을 느꼈다.

‘……겨울 이불이라 로아 혼자 힘만으로 절대 끌고 다닐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가볍게 돌아다니는 거지?’

이불과 로아 주변에 어린 희미한 빛무리를 본 것 같아 대공을 슬쩍 쳐다본 에드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설마 대공 전하께서 이런 일로 마법을 쓰셨을라고…… 나도 참.’

로넨의 목소리가 점점 멀리 사라지자 대공이 방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에드에게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대공 전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대답 없이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에드의 고개는 점점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대공이 그런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미안해, 에드.”

“……네?”

갑작스러운 대공의 사과에 에드는 당황했다.

“갑자기 왜 사과를 하세요, 전하?”

“처음부터 에드를 북부로 부르지 말았어야 했어. 안전한 수도에 계속 머물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괜히 나 때문에 이곳에 와서…….”

대공의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에 에드는 그를 걱정하던 멜라의 흐려진 표정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 사실 난 나이가 어린 로넨보다 아스넬이 더 걱정돼.〉

‘멜라 님이 왜 대공 전하를 걱정하셨는지 알겠어. 매번 모든 일을 혼자 끌어안으려고 하시니까.’

에드는 살짝 고개를 숙인 대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그를 조심스레 껴안았다.

단단한 어깨와 톡, 톡 튀는 심장 소리, 그리고 맞닿은 온기에 짧게 숨을 내쉰 에드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대공의 등을 퍽, 강하게 내려쳤다.

“…….”

“…….”

대공을 안았던 에드가 그의 어깨를 잡고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깜짝 놀란 대공이 에드를 바라보았다.

메마른 입술을 혀로 가볍게 쓴 에드가 대공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제가 전하를 따라 북부 성에 온 건 온전히 제 결정이었습니다. 지진에 휘말렸던 사냥제 역시 제가 참가하고 싶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고, 이번 구출대에 함께 간 것 또한 누구의 명령도, 부탁도 아닌 제 의지였습니다.”

“……하지만 에드, 이번에는 정말 목숨을 잃을 뻔했어. 다름 아닌 나 때문에.”

“도망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전하의 곁을 떠나지 않은 건 저예요. 전 다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제일 먼저 전하 곁으로 달려갈 겁니다. 왜냐하면.”

‘전 전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잠시 말을 멈춘 에드가 침대 옆에 놓인 협탁에서 수첩과 만년필을 들어 올렸다.

“전 전하의 제일가는 집사니까요.”

에드의 말을 경청하던 대공은 갑작스러운 그의 선언에 잠시 얼떨떨해하다 살포시 웃었다. 당찬 에드의 말에 집사라, 작게 중얼거린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튼이 확 걷어진 창문으로 대공과 에드의 머리맡으로 환한 햇살이 들어찼다.

“……에드는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 줄 거구나.”

막상 대공의 등짝을 때리고 나니 민망하기도 했고, 뒷일은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 걱정스럽기도 해서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에드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대공을 보며 따라 웃었다.

“맞은 데는 괜찮으신가요?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를 가장 사랑하는 분이 제게 부탁했던 일이라서요.”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

“……네, 꿈속에서 만났습니다. 전하와 로넨 도련님을 가장 사랑하는 분과.”

에드는 일어난 직후와는 다르게 꿈에서 있던 일들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걸 느꼈지만, 그걸 일부러 붙잡지는 않았다. 기억은 사라져도 그때 느꼈던 감정은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따뜻하게 남아 있을 테니.

그런 그를 바라보던 대공이 에드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 며칠 동안은 방에서 편히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저는 이제 괜찮습니다. 충분히 많이 쉬었어요.”

대공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에드의 의지를 존중해 준 것처럼 이번엔 에드가 내 권유를 받아 줬으면 좋겠는걸.”

대공의 완곡한 말에 에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좀 더 쉬도록 하고. 그리고 아까 에드가 내 집사라고 했지?”

방금 전에 자신이 한 민망한 말이 대공의 입에서 나오자 에드는 당장 로아에게서 이불을 다시 가져와 뒤집어쓰고 싶었다.

“그런데 난 에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용인으로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대공은 그 말을 마치고 급히 방을 나섰다. 방문을 닫는 그의 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다른 생각에 빠진 에드는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조용한 방에 혼자 남겨진 에드는 이마를 긁적였다.

‘혹시 멋대로 전하의 제일가는 집사라고 말한 게 마음에 안 드신 걸까? 아니야, 대공 전하께서 그런 걸로 꾸중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그럼…….’

문득 에드의 뺨이 확 달아올랐다. 동굴에서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지나가자 침대에 엎드린 에드가 매트리스를 퍽, 퍽 내리쳤다.

‘으아악! 역시 드문드문 깨어났을 때의 상황이 꿈이 아니었구나!’

생각해 보니 동굴 속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발가벗은 채로 서로의 몸이 닿고, 약을 넘기기 위해서이긴 했지만 어쨌든 입술도 맞댔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던 에드는 다시 침대를 퍽퍽 내리쳤다.

‘설마 전하께서도 그때 일을 전부 기억하고 계신 건가?’

정말 이대로 눈을 감을지도 몰라서 사, 사랑한다고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 그건 못 들으셨겠지?

앞으로 대공을 볼 때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에드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맑은 창을 통해서 반짝거리는 북부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로아가 끌고 간 이불을 털고 있는 제이논과 텐스, 아직 덜 녹은 눈 위를 뛰어노는 로넨과 장난꾸러기 여우 한 마리.

저번 사고로 이제 더 이상 닭장이 아닌 울타리 안쪽을 자유로이 뛰어다니는 닭들, 마을 곳곳에서 굴뚝을 타고 오르는 새하얀 연기.

에드는 이를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찬기가 올라오는 창문 유리에 달아오른 볼을 문질렀다.

“……지금이라도 수도로 도망쳐야 하나?”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에드, 오늘은 주치의의 소견으로 고기 비중을 늘린 따뜻한 수프인데 괜찮지? 먹다가 혹시 속이 더부룩하다 싶으면 말해.”

대공의 말대로 에드는 이틀을 꼬박 방 안에서만 보냈다. 그러다 3일째가 되던 날, 평소와 달리 텐스가 아닌 제이논이 식사를 챙겨 방으로 들어왔다.

“제이논.”

“왜?”

“제이논이 그러니까 이상해서요. 그냥 평소처럼 대해요.”

“평소처럼 대하고 있잖아?”

흐음, 하며 에드가 트레이를 내려놓는 제이논을 올려다보자 그가 뭐가 이상하냐는 듯 의뭉을 떨며 씨익 웃었다.

“대공 전하의 품속에 포옥 안겨 온 분인데 조심해야지.”

“아악.”

그거 꿈인 줄 알았는데…… 대공의 품에 안겼었던 기억을 떠올린 에드는 침대를 퍽, 퍽 두드렸다.

‘역, 역시 수도로 도망쳐야 할까?’

그런 에드를 보며 가볍게 손을 팔랑여 폴폴 날리는 먼지를 치운 제이논이 물었다.

“뭐 다른 거 필요한 건 없어?”

“……다른 필요한 거요?”

의식주가 너무 잘 갖춰져 있어 손만 까딱해도 필요한 것이 손에 탁탁 들어오는 편안한 생활에 에드는 딱히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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