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33화 (133/198)
  • “아, 안녕하…… 안녕하세요.”

    에드는 몇 번이나 혀를 깨문 다음에야 제대로 된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런 에드를 보며 대공의 어머니인 멜라가 인자하게 웃었다.

    “그래. 나도 무척 반갑단다, 에드.”

    에드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내가 정말로 죽어서 천국에 온 건가?’

    에드는 자신의 볼을 꼬집어 볼까 했지만 그러기 전에 멜라가 에드의 두 손을 한데 모아 잡으며 말했다.

    “이렇게 보니 얼마나 좋은지.”

    에드가 멜라가 잡은 손을 내려다보자 그녀가 쑥스러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아, 이런. 내가 반가운 마음이 앞선 나머지 너무 호들갑을 떨었지?”

    에드는 아직 이 상황이 얼떨떨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자신과 만난 걸 정말 기뻐한다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옅게 웃은 멜라가 에드가 계속 서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허공에 눈짓했다. 그러자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테이블과 의자가 펑, 하고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의자에 에드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자 멜라가 그를 자리에 앉혔다.

    “이곳에 익숙해지면 이 정도는 별거 아니란다. 자, 이렇게 서 있으면 힘드니 앉아서 나랑 함께 차라도 한잔하지 않겠니?”

    멜라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은 에드는 손짓 하나로 그들이 마실 차와 다과를 만들어 내는 그녀를 보며 신기해했다.

    ‘대공 전하는 정말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행동 하나하나에 우아함과 강직함이 배어 나오는 걸 보며 에드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손님한테 차를 대접하는 건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입에 맞을지 모르겠구나.”

    멜라가 차가 담긴 찻잔을 건네자 에드가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아 들었다.

    찻잔을 들어 향을 한 번 맡고는 차를 한 모금 머금은 에드가 이내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닙니다. 차를 타시는 모습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말 대공 전하가 타 주시는 것처럼 맛있습니다.”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멜라가 에드의 반응에 안심하고 자신의 잔에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들이 타 준 차랑 비슷하다니 최고의 칭찬이구나.”

    그 말에 발끝이 간지러워진 에드가 꼼지락거리자 멜라가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아, 아까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우리 애들의 어릴 때 모습이라도 보여 줄까?”

    그와 동시에 책장에서 스윽 밀려 나온 책이 팔랑팔랑 날아와 멜라의 손에 안착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에드의 옆에 옮겨 앉으며 책을 건넸다.

    “……대공 전하와 로넨 도련님의 어릴 때 모습들이 담긴 책인가요?”

    멜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에드는 조심스레 책장을 열어 보았다.

    페이지를 넘기자 그 안에는 대공이 어릴 때 모습부터 청년이 된 모습까지 나열되어 있었다.

    “아직 어린아이인데도 무척 의젓해 보이네요. 곳곳에 전하의 모습들이 보여요.”

    “그렇지? 아스넬은 뭐든지 속에 있는 걸 꺼내 보이는 로넨과 다르게 항상 속에 꾹꾹 담아 놓기만 해서 우리 부부가 애를 먹었단다.”

    “아,”

    “그래서 사실 난 나이가 어린 로넨보다 아스넬이 더 걱정돼. 어른인 척했지만 아직 성인이 채 되지 않았던 아스넬이 처음 북부를 맡은 후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든 일들을 여전히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것 같아서.”

    멜라가 네 명의 가족이 모두 모인 초상화를 가리키며 걱정스레 이야기를 털어놓자 에드는 마지막으로 본 대공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제가 전하를 처음 봤을 때는 멜라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불안정하고 위태위태해 보이셨습니다.”

    에드의 답에 멜라가 찻잔을 들어 흐려진 표정을 숨겼다.

    에드는 그런 멜라의 심정을 헤아리면서 급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잃어버린 로넨 도련님을 찾으신 뒤로 지금은 웃음도 되찾으셨고요, 전하를 뒷받침해 주는 가신들과 함께 북부를 지켜나가고 계십니다.”

    에드는 지난겨울 연구실에서 일이 많을 때면 가끔 제게 기대며 하소연도 하고, 북부 예산안에 대해 함께 고민하던 대공을 떠올렸다.

    “이제는 힘든 일도 티 낼 줄 아시고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을 때면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도 하고 계세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보기에 전하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에드는 멜라를 보며 빙의 전 자신보다 먼저 이승을 떠난 어머니가 떠올랐다.

    ‘우리 어머니도 이렇게 날 멀리서 지켜보고 계셨을까?’

    어릴 때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나자 에드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 채 찻잔을 들고 있는 멜라의 손을 감싸 쥐었다.

    “전하뿐만 아니라 로넨 도련님도 북부에 잘 적응하고 계세요. 참, 몇 달 전에 도련님이 여우를 한 마리 데려왔는데 웃음소리가 정말 특이합니다. 어떤 소리냐면요…….”

    에드가 그간 북부 성에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자 멜라는 다시 웃음을 되찾았다.

    “오늘 에드 덕분에 정말 즐거웠단다. 에드가 해 준 로넨과 아스넬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만, 이제 벌써 시간이 다 되어가는구나.”

    멜라가 티팟에 얼마 남지 않은 차를 보며 아쉬워했다. 에드 역시 차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점점 줄어가는 찻물을 보며 이 꿈같은 상황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손짓 한 번으로 테이블 위를 정리한 멜라가 이번엔 손바닥 위에 빛나는 구 하나를 띄웠다.

    “그럼 에드……아니, 이선유라고 불러야 할까?”

    에드는 멜라가 빙의 전 자신의 본명을 알고 있다는 것에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대공 전하의 돌아가신 어머님도 만났는데, 딱히 놀랄 것도 없지. 저승이라서 나에 대한 것도 알고 계신 거 아니겠어?’

    “나는 선유가 우리 아들들의 이야기를 해 줘서 정말 고마웠단다. 하지만 한편 의문도 들었어. 아스넬은 잃어버린 동생을 찾는 게 소원이었고, 로넨은 다시 한번 가족을 만나는 게 소원이었지. 그럼 에드의 소망은 뭐지?”

    점점 커지는 빛 덩어리를 바라보던 에드가 조금 멍한 눈빛으로 답했다.

    “……제 소망이요?”

    “그래, 선유야. 네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바라 왔고 지금도 바라고 있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소원.”

    “어, 제가…… 원하는 건…….”

    * * *

    자신도 모르게 속내를 고백한 에드는 발치를 내려다보다 어느새 주위가 어둑어둑해진 것을 느꼈다.

    “용족의 가호는 변덕스럽지만, 이번만큼은 선유가 소망하던 걸 꼭 갖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

    “짧았지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기뻤단다. 두 아들 모두 손이 많이 가서 선유가 앞으로도 고생이 많겠지만, 우리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

    갑작스러운 이별의 말에 에드는 고개를 들었다. 멜라는 마지막 말만 남기고 사라져, 그녀가 있던 곳에는 빛 덩어리만이 남아 떠 있었다.

    “어?”

    갑작스러운 멜라와의 이별에 놀라기도 잠시, 점점 주변 풍경이 어두워지면서 서재였던 공간에는 에드와 빛 덩어리만이 남았다.

    ‘분명 아까까지 멜라 님과 차를 마시고 있던 것 같은데…….’

    허공에 둥둥 떠 있던 빛 덩어리를 살펴보던 에드는 자신이 이 빛을 본 후로 기억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아 참! 우리 심약한 첫째 아들을 보면 등짝 한 대만 세게 때려 줄래? 분명 이번 일로 혼자 우울해하고 있을 테니.”

    어디선가 들려온 멜라의 말이 끝나는 순간, 가만히 있던 빛이 에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웅.

    그와 동시에 큰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에드가 눈을 번쩍 떴다. 계속해서 변하는 주변 환경에 에드는 어느 게 꿈이고 현실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아얏.”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던 에드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바닥으로 떨어진 로넨이 벌떡 일어나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에드! 일어났구나! 잘 잤어?”

    로넨의 밝은 목소리에 에드는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세요, 도련님?”

    에드는 제 입에서 자신의 목소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거친 소리가 흘러나오자 깜짝 놀랐다.

    다행히 옆 탁자에 놓인 물을 마시고 흠흠, 목을 가다듬으니 비교적 본래의 목소리로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걱정스러움이 한껏 묻어난 에드의 질문에 로넨이 손사래를 쳤다.

    “아, 아냐! 졸, 졸다가 떨어진 게 아니라…… 아, 그래! 잠깐 일어나 보려다가 발이 꼬였어…….”

    로넨의 말이 뒤로 갈수록 흐려지자 에드는 팔을 부들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디 한 번 보여 주세요.”

    그러고 손을 뻗어 벌써 조금 벌겋게 부어오른 로넨의 이마를 살살 문질러 줬다.

    “벌써 살짝 혹이 올랐는데 아프진 않으세요?”

    “응……? 아, 응! 하나도 안 아파! 에드야말로 몸은 좀 어때? 더 누워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얼른 제 곁으로 다가와 부축해 주는 로넨을 보며 에드는 이마를 만지던 손을 움직여 그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꿈속에서 뵈었던 멜라 님을 도련님과 만나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갑작스럽게 에드의 쓰담쓰담을 받게 된 로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

    “어? 갑자기 왜 그래, 에드?”

    “그냥 도련님과 이렇게 있으니 좋아서요.”

    아직도 조금 거칠게 나오는 에드의 목소리에 그렁그렁한 눈을 한 로넨이 그에게 안겨 들었다.

    “나도! 나도 에드가 나랑 같이 있어 줘서 좋아.”

    품에 안기는 로넨을 따스하게 감싸며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에드는 로넨이 밀어 대는 힘에 제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려나는 걸 느꼈다.

    “음…… 잠시만요. 정말 죄송한데 제가 조금만 더 있으면 도련님과 똑같은 일을 당할 것 같아서…… 도련님? 도련님…… 으읏, 잠, 잠깐만요!”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로넨에게 다시 기절을 당할 뻔했던 에드는 뜻밖의 존재에게 구해졌다.

    끼익.

    “어?”

    에드가 깨어난 것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로넨이 뒤에서 들리는 기척에 고개를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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