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넬은 눈을 뜨자마자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챘다.
‘에드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나는 고작 그딴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아스넬은 혼몽했던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의 주인이 에드였음을 확신하자 가슴이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제 심장을 꺼내 그에게 주고 싶었다.
에드를 품에 안고 이마에 입맞춤을 한 아스넬은 제 몸 안에 도는 용의 피를 저주했다.
‘처음부터 북부로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아스넬은 사실 에드를 마음에 품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하는 에드를 일부러 멀리하고 피해 다녔다.
하지만…… 자신을 보고 웃는 에드의 그 얼굴을 더 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조금만, 조금만을 속으로 되풀이하다 결국 그를 상처 입히고 말았다.
‘다른 북부 주민들에게 한 것처럼 거리감을 두었다면…… 아니, 최소한 로넨에게 그랬던 것처럼 위험한 일이 있을 때마다 성에만 있게 했다면…….’
아니, 다 틀렸다. 처음부터 에드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아스넬은 끊임없이 자신을 저주하면서 에드를 살리기 위해 다양한 마법들을 시전했다. 그러다 그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나는 예전과 다르게 그를 괴롭히던 마법의 부작용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으로 에드의 상처를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스넬은 마법 시전을 멈추지 않았다. 부우웅, 그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부유했고 외투 위에 뉘어진 에드 주변으로는 마법진이 나타났다.
어두웠던 굴속이 일순간에 환해지며 아스넬의 몸에서 빛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
그러나 한참을 마력을 쏟아부어도 에드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이마에 난 자잘한 상처조차도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아스넬은 이를 악물었다.
‘상처 속에 섞인 용의 독 때문이야. 그게 계속 에드의 치료를 방해하고 있어.’
아스넬은 점점 숨이 미약해져 가는 에드를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에드.”
모두에게 두려움과 존경을 받는 황가의 힘으로도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에 절망하기 직전이었다. 아스넬은 언젠가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아스넬, 사람들은 용의 피가 흐르는 황가의 사람들을 부러워하지만 그건 무조건적인 축복이 아니란다. 때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은 주변 사람들 다치게 하는 저주가 되기도 하지. 그래서 우리 황족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능력을 제어하기 위해 마법이나 검술을 배우는 거란다.〉
어린 아스넬은 어머니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마법과 검술을 배우는 건 그냥 동생을 지키기 위해서야. 용의 피 따위 전혀 무섭지 않아.’
하지만 그는 북부를 수호하기 위해 많은 전투를 치르고 나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법을 사용한 대가라고 생각했던 부작용이 사실 어머니가 말하던 대가라는 사실을.
휴식을 취하면 외적으로 드러나는 부작용은 가라앉았지만 아스넬은 알고 있었다.
용의 힘에 따른 대가는 사라진 게 아니라 그의 몸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다는 걸.
그때 아스넬의 눈앞으로 어떤 문자가 떠올랐다. 갑작스러운 현상에 현기증이 한차례 일자 그간 떠올리려고 해도 안개에 가려진 듯 떠오르지 않던 어머니가 해 준 뒷이야기가 기억났다.
왜 이 말이 이제야 떠올랐는지 모를 정도로 선명하게.
〈……아스넬,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렴. 우리 일족은 대대로 단 한 번뿐이지만 진심으로 원할 때 사랑하는 이에게 용의 축복을 내려 줄 수 있으니까.〉
아스넬은 방금까지 서늘하다고 생각했던 동굴 안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바로 귀에서 들리는 것 같은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리며 아스넬은 땅에 떨어져 있던 단검을 주워 들었다.
‘에드가 이걸 봤으면 기겁하면서 날 말렸겠지.’
아스넬은 단검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길게 그었다. 긴 자상 사이로는 어째선지 피가 아닌 빛무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니 어서 일어나서 나를 혼내 줘. 보고 싶어, 에드.’
〈그리고 때때로 이 축복은 당사자가 가장 원하는 소원을 들어준단다.〉
* * *
‘어?’
깜빡깜빡, 빛이 점멸하는 것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던 눈앞이 결국 완전히 까맣게 물들었을 때 에드는 배 속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이상하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온몸이 시리고 쓰라렸는데…… 그런 아픔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러다 입술에 무언가 따스한 것이 닿는가 싶더니 온기가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아.’
여전히 무거운 눈꺼풀에 눈을 뜨기가 어려웠지만 에드는 자신을 조심스레 안아 올리는 손길에 입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대공 전하야.’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주는 손길과 눈가를 조심스레 문지르는 손끝의 움직임에 에드는 확신했다.
‘다행히 전하께서 깨어나신 거야.’
무탈하게 느껴지는 대공의 기척에 에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행이야, 정말로…….’
점점 정신이 가물가물해졌지만 에드는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단단하고 따듯한 대공의 가슴에 이마를 힘없이 비볐다. 그때마다 대공은 토닥토닥, 느리게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렇게 살아 있어서 정말 감사해요, 제 곁에서 함께해 주셔서…….’
에드는 대공의 토닥임을 받을 때마다 가슴 속을 막고 있던 단단한 무언가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 * *
에드는 그 이후로 몇 번이나 깨었다 다시 잠들었다. 간혹 깨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떴을 때 어슴푸레 보이는 풍경은 마차 안일 때도 있었고 북부 성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어느 때, 어떤 장소이든 간에 그는 대공의 품속에 있었다.
에드는 그 품의 온기와 체온에 희미하게 웃으며 도로 잠이 들곤 했다.
타닥타닥.
그렇게 시간이 지나 에드가 한결 가벼워진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귓가에는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렸고 시야로는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북부 성의 내 방이구나.’
에드는 물끄러미 침대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제 이마를 짚어 보는 손길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침대에 의자를 바짝 대고 앉은 대공이 보였다.
“대공 전하.”
목소리가 낮고 깔깔해 자신의 것 같지 않았으나 에드는 최대한 밝은 음성을 내뱉었다.
“안녕, 에드. 잘 잤어?”
“네, 전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대공은 대답 없이 물끄러미 에드를 내려다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따뜻한 차를 잔에 따라 건네줬다.
“벌써 성에 도착한 지 이틀이나 지났는데 일어나지 않아 걱정했어.”
에드의 목 뒤로 손을 넣어 고개를 부드럽게 올린 대공이 그의 입에 잔을 대 주었다.
갈증이 난 입 안으로 들어오는, 딱 마시기 좋게 따스한 차를 목으로 넘긴 에드는 이곳이 아직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사실 대공 전하를 구하러 갔던 것부터 지금까지의 일 모두가 꿈인 게 아닐까?’
에드의 이런 생각도 모르고 대공은 그의 몸 상태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에드가 차를 다 마시자 그를 다시 침대에 눕혀 준 대공은 그 위에 폭신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에드는 그런 대공의 일거수일투족을 시선으로 따르다 도로 내리감기는 눈꺼풀에 고개를 잘게 흔들어 보았다.
‘꿈이라면 조금만 더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때 대공이 그의 이마에 작게 입맞춤하며 속삭였다.
“피곤하면 편안히, 아무 생각 없이 자면 돼. 에드.”
‘역시 꿈이구나. 그래도 좋다.’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에 다시 잠이 들었던 에드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처음 보는 공간인 서재에 서 있었다.
‘……어, 여긴 어디지? 역시 그때 나는 죽은 걸까?’
에드는 자신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어째선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네. 정신 차리기 전의 상황이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그런 걸까?’
에드는 이내 책장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이곳이 어딘지 유추해 보려 했다.
서재는 전체적으로 따뜻한 색감으로 채워져 있었고 삼면에 책장이 있을 만큼 책들이 가득했다. 그러다 에드는 눈이 확 뜨이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아스넬 린든의 어린 시절
에드는 그 제목을 보고는 홀린 듯이 책장으로 다가가 책을 꺼내 들었다.
‘주인 없는 서재에서 멋대로 책을 꺼내 보는 건 좀…… 그렇지만 제목이 이런걸? 이걸 어떻게 안 볼 수가 있어?’
책을 들고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 나가던 에드는 이내 한숨을 크게 쉬고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 넣었다.
“보고 싶으면 봐도 된단다. 아가야.”
그때 바로 뒤에서 들린 음성에 화들짝 놀란 에드가 소리의 근원지를 확인했다.
몸을 뒤로 돌리자 에드의 앞에는 북부 대공의 정복을 입고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에드보다 키가 한 뼘쯤 컸고 대공과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니? 우리 큰아들 때문에 까딱하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단다.”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에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큰아……들? 이라면 설마?!’
“아 참, 내 정신 좀 봐. 내 소개부터 해야겠구나. 난 북부를 다스리던 전대 공작이자 아스넬과 로넨의 어미인 멜라 린든이라고 한단다.”
에드는 이제 이게 그냥 자신의 망상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제 앞에 있는 분이 연구실에서 초상화로 보았던 대공의 어머니라는 사실만은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