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에 눈가가 시큰해진 에드는 대공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대공의 허벅지 위에 엉덩이를 걸쳐 앉고 몸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 그를 안았다.
목 뒤로 팔을 둘러 대공을 끌어안은 에드가 가슴과 가슴을 맞붙였다. 차가운 대공의 살결과 따스한 제 체온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대공의 심장 소리가 제 몸을 타고 울리는 감각에 에드는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진한 떨림을 느꼈다.
에드는 대공의 귀에 제 입을 가까이 붙였다.
“대공 전하.”
제 음성을 듣고 마치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대공이 깨어났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은 에드의 목소리가 굴속에서 낮게 울렸다.
그러나 미동도 없는 대공의 모습에 에드는 애가 탔다.
보고 싶었다.
초승달처럼 기다란 눈매에 콕 박혀 있는 선명한 붉은 눈동자를.
듣고 싶었다.
에드, 하고 부르는 온화하면서도 말끝을 살짝 끌어 장난기가 묻어 있는 대공의 목소리를.
말하고 싶었다.
어린 나이 때부터 홀로 북부를 이끌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대공 전하를 몹시 존경하고 있다고.
에드는 대공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발을 디디고 있던 땅이 크게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저를 바르게 세우고 있던 세상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것 같았다.
‘……마치 빙의한 첫날처럼.’
거친 폭풍우가 쏟아지는 망망대해에 아무런 지지대 없이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기분이었던, 바로 그날처럼.
대공의 행방이 묘연해지며 생긴 상실감에 에드는 그제야 아스넬이 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얼마나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에드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좋아해요, 대공 전하.”
그러니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기다리는 전하의 자리로 어서 되돌아오세요.
여전히 아무 반응 없이 눈을 감고 있는 대공의 얼굴을 바라본 에드는 애틋함과 애절함이 뒤섞여 술렁거리는 마음으로 생각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전하께 내 체온과 힘을 전달해 드려야 해.’
에드는 차가운 돌덩이 같은 몸을 깊게 끌어안았다.
그때였다.
어?
에드는 대공과 제 뺨이 맞닿은 부분에서 미동을 느꼈다.
‘……설마.’
에드는 조그마한 희망을 느끼며 대공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대공이 그 잠깐 떨어지는 것조차 싫다는 듯이 에드의 목덜미에 고개를 깊게 숙여 그를 느끼려고 했다.
그 반응에 에드는 대공의 얼굴을 손으로 살짝 받쳐서 확인했다. 꽉 맞물려 있던 대공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의식이 돌아오고 계신 거야!’
기쁜 마음에 조금씩 드러나는 대공의 눈동자를 보며 당장이라도 그에게 안기려 할 때였다. 에드는 멈칫했다.
“대공 전하?”
그도 그럴 것이 마법 등에 비친 대공의 눈동자가 선명한 붉은색이 아닌 어두운 보라색을 띠고 있는 데다.
“이걸로는 부족해.”
듣고 있으면 편안해지는 따뜻한 음성이 아니라 서늘한 동굴 안이 더 춥게 느껴질 만큼 차가운 목소리가 대공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에드는 처음 겪는 대공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다 잊고 있던 소설 속 내용이 하나 떠올랐다.
‘원작에서는 전하에 관한 서술이 거의 나오지 않아 눈치채지 못했어. 대공은 제국 내에서 용의 피를 가장 진하게 타고난 사람이라고 했지. 전에 도서관에서 가장 흉폭한 용은 종의 구분 없이 치명상을 입어 이성을 잃은 개체라는 걸 본 적이 있어. 그렇다면…….’
그 순간 에드의 뒤통수를 커다란 손이 감쌌다. 에드가 대공의 이성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떠올리려고 애쓰며 시선을 내렸을 때였다.
“더 많은 힘이 필요해.”
낮은 목소리가 울리며 에드의 머리 뒤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가며 부지불식간에 두 명의 입술이 맞닿았다.
하지만 이는 아까 에드가 취했던 배려심이 가득한 입맞춤이 아니라, 그보다 더 원초적인 행위에 가까웠다. 곧 동굴 안에는 대공의 거센 힘에 스윽스윽, 피부와 피부가 맞닿으며 쓸리는 소리가 울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붙어 있던 입술을 떼어 낸 대공이 에드를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공 전하.”
숨을 헐떡거리던 에드가 대공을 부른 그 순간, 대공이 다시 그의 뒤통수를 빠르게 앞으로 끌어당겼다.
엇, 하는 짧은 사이에 에드와 대공의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열기를 품은 살덩어리가 그의 입 속을 파고들자 에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에드는 바로 눈앞에서 일렁이는 대공의 보라색 눈동자를 바라보다 더 깊숙이 들어오는 혀에 몸을 뒤로 물리려고 했다.
대공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에드의 입술을 더 크게 베어 물었다.
‘……아, 으.’
그에 에드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대공의 눈초리가 휘어지며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동시에 에드의 입 안으로 들어온 혀가 더 격렬하게 점막을 건드렸다.
마치 그에게서 나는 모든 걸 먹어 치우겠다는 듯이 대공이 그를 탐하기 시작했다.
쯔읏, 쪼오옵. 하는 소리가 다시 한참을 울려 퍼졌다. 에드는 정신이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느끼며 조금 더 힘을 세게 줘 대공을 밀어냈다.
다행히 대공은 몸 상태가 아직 불안정한 듯 생각보다 쉽게 뒤로 물러났다.
“대공 전하.”
하지만 여전히 이성이 돌아오지 않은 대공의 보랏빛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에드는 방금 전의 제 행동으로 대공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는 걸 느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만약 이곳에서 달아난다면 조금씩 오르고 있던 전하의 체온이 다시 떨어질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이 춥고 쓸쓸한 곳에 결코 대공을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에드는 이성을 잃은 대공이 낯설거나 두렵지 않았다. 그저 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건강한 모습으로 제게 돌아왔으면 했다.
그래서 아까와 다르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대공을 품에 안으며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이 애틋한 마음이,
이 아련한 마음이,
전하께 닿길 바라며 다시 한번 그 말을 입에 담았다.
“좋아해요, 대공 전하.”
찢어진 입술 사이로 피 맛이 났다.
에드는 대공이 제게서 흘러나오는 치유의 힘으로도 모자라 그의 피까지 마시려는 걸 느꼈지만 도망치는 일 없이 가만가만 그 말만을 입에 담았다.
* * *
아스넬은 사방이 어두운 공간에 앉아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한참을 골몰히 생각하던 아스넬은 그제야 제가 모두를 구하다 눈사태에 휩쓸렸다는 걸 상기해 냈다.
아스넬은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탈출을 시도했지만 어쩐지 이곳에서는 마법도, 검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에 친숙함을 느끼던 아스넬은 불쑥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조금쯤은 쉬어도 되지 않을까?’
눈사태에서도 모두를 구했고, 위험한 마물도 처리했다. 기사단도 충분히 키웠으니 내가 없더라도 외적으로부터 충분히 주민들을 지켜 줄 수 있겠지.
내가 자리를 비우면 황제가 다시 북부를 노리겠지만, 성에는 로넨이 있으니 아주 잠깐은, 혹은 그보다는 조금 더 길게 휴식을 취해도 괜찮지 않을까?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앉은 아스넬은 피로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때,
- 대공 전하.
아스넬은 자신을 부르는 보드라운 목소리에 어둠에 몸을 기대고 머물고 싶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감정이 차지하는 걸 느꼈다.
‘하지만 이곳에 있으면 분명 OO를 보지 못하겠지. 분명 슬퍼할 거야. 그런데…… OO이 누구지?’
아스넬은 당장 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달려가고 싶어 머리가 지글지글 타오르는 것 같았다.
- 아스넬, 사랑해요.
그리고 또다시 제 귓가를 울리다 사라지는 그 목소리에 아스넬은 비로소 긴 어둠을 뚫고 나와 OO의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에드.”
하지만 그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햇살 같은 미소로 저를 반겨 주던 에드가 아니었다.
그의 손과 입 안에서 느껴지는 피로 뒤덮인, 차갑게 식어 가는 에드였다.
아스넬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에드를 내려다보았다.
긴 잠에 빠진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에드의 모습을 보자 그는 이곳이 악몽 속처럼 느껴졌다.
“에드, 눈 좀 떠 봐.”
아스넬은 평소와 다름없이 에드가 으응, 작게 잠꼬대하며 눈을 뜨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대공 전하,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세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걱정 많이 했습니다. 자, 어서 북부 성으로 돌아가요. 로넨 도련님도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를 보며 활짝 웃어 줬으면 했다.
“응? 에드.”
하지만 이런 아스넬의 기대와는 다르게 맞닿은 에드의 살결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에드의 얼굴은 평소처럼 단정했으나 목 아래부터는 온갖 상처로 엉망이었다.
에드를 쓰다듬던 아스넬의 손이 점차 아래로 내려왔다. 몸 곳곳에 남은 상처들을 스칠 때마다 대공의 손이 잘게 떨려 왔다.
‘많이 아팠을 텐데……. 고작 내 목숨 하나를 살리겠다고 도망가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