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30화 (130/198)

이르텔이 무언가를 억누르듯이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마물을 처리한 후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산을 내려오던 중 눈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그걸 막으시다 그만…….”

“거, 거기가 어딘데요? 바로 구할 수는 없었던 건가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이르텔을 다그치는 에드를 제이논과 텐스가 양옆에서 말렸다.

로넨 역시 울음을 삼키면서 에드의 옷자락을 잡고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제야 이르텔의 몸 상태를 살펴보게 된 에드가 말없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이르텔의 갑옷은 멀쩡한 곳이 없었고, 옷 겉으로 드러난 신체 곳곳은 동상에 걸려 있었다.

“……”

“이르텔 경, 일단 몸을 치료하고 난 후 다시 수색대를 꾸리기로 하죠. 기사들도 해산했다가 1시간 후에 식당으로 모이세요.”

모두가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나선 건 로넨이었다.

“아닙니다, 도련님. 대공 전하를 구할 도구가 부족해서 돌아온 것뿐이니 준비를 마치는 대로 출발하겠습니다.”

“이르텔 경, 방금 제가 말했습니다. 재정비를 마친 후 수색에 나서자고. 아니면 경은 대공 전하의 말만 듣겠다는 건가요?”

그제야 이르텔은 로넨이 존댓말을 쓰며 좌중을 휘어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대공처럼 무거운 위압감을 풍기는 로넨을 보며 잠시 당혹스러워하던 이르텔은 곧 무릎을 꿇었다.

“아닙니다, 대공자님. 지금 바로 명 받겠습니다.”

“다른 사용인들 역시 돌아온 기사들이 조금이라도 쉴 수 있게 방 안을 따듯하게 데운 뒤 새 외출복을 준비해 주세요. 식사는 환영회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음식들을 나눠 주시고요. 주치의 선생님은 부상자들의 치료를 부탁드립니다.”

“네, 대공자님.”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색대가 꾸려지는 대로 바로 떠날 수 있게 마차와 도구를 준비해 줘. 에드도 도와줄 거지?”

에드는 정신없이 쏟아지는 로넨의 명에 다들 혼비백산해서 흩어지는 걸 보며 대공이 옆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제 손을 잡아 오는 로넨의 손은 놀랐기 때문인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에드는 그 손을 단단히 감싸 쥐었다.

“저한테 맡겨 주세요, 도련님.”

* * *

로넨의 명에 따라 해산했다가 재출정 준비를 마친 이르텔과 기사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 옆에는 에드도 함께 서 있었다.

“정말 에드도 따라갈 거야?”

“도련님, 제가 말했잖아요. 저한테 맡기시라고요.”

제 옆구리에 찬 두둑한 약 가방을 탁탁 소리 나게 친 에드가 로넨을 다시 푹 안으며 말했다.

“제가 꼭 책임지고 대공 전하를 모셔오겠습니다. 그러니 북부 성을 부탁드려요. 제이논과 텐스 만으로는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네요.”

에드의 장난기 섞인 말에 로넨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에드. 내가 책임지고 성과 사람들을 지킬게!”

굳은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인 에드는 뒤로 돌아 이르텔과 기사단에 합류했다.

“이르텔 경, 혹시 대공 전하께서 환약을 사용하셨나요?”

“유리병에 담긴 동그란 약을 말하는 거라면 전하께서 마물을 발견하자마자 모두에게 나눠 주셔서 먹었어.”

이르텔의 말에 에드가 눈을 빛냈다.

“혹시 그 약 전부 사용하셨나요?”

에드의 말에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이르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마도 남았을 거야. 싸움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약을 많이 사용하지는 않았거든.”

“전하께서 그 약을 아직 갖고 계시다면 금방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에드가 확신 어린 표정으로 이르텔을 안심시키며 말에 올랐다.

빠르게 말을 몰아 눈사태가 일어난 곳에 도착한 에드와 기사단은 곧바로 도구를 챙겨 곳곳에서 구조 작업에 들어갔다.

‘대신전이나 신관님의 신력과 내 힘이 비슷하다면 분명 내 힘이 담긴 물건도 찾을 수 있을 거야.’

에드는 눈더미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면서 제 몸속에서 흐르는 힘과 비슷한 느낌이 나는 곳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수십 분을 돌아다녀도 수색 반경이 워낙 넓은 탓에 구조 작업에는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어두워진 주변에 기사들은 하나둘 마법 등을 들고 작업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춥고 오랜 노동에 지쳤지만, 그 누구도 불평을 말하지 않고 묵묵히 구조 작업을 재개해 나갔다.

‘어…….’

그러다 한쪽에서 익숙한 기운을 느낀 에드가 그곳으로 가 삽으로 바닥을 툭툭 치자 다른 곳과 달리 조금 빈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에드가 마법 등을 들어 이르텔을 부르려고 하는 순간 우지끈 소리를 내며 바닥이 무너졌다.

* * *

또옥. 또옥.

“으…….”

이마에 차가운 물방울을 두 대나 맞은 에드가 신음 소리를 흘리며 깨어났다.

‘여기는.’

재빨리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 에드는 이곳이 어두운 굴속 같은 곳이란 걸 깨닫고 잘 보이지 않는 앞을 손으로 주섬주섬 더듬었다.

‘어?’

그리고 손에 걸리는 단단한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가 마법 등의 손잡이인 걸 깨닫자 야무지게 손을 움직였다. 바닥에 굴러떨어진 마법 등을 집어 들어 확인했다.

‘다행히 고장 나지 않았어.’

불이 들어오는 것에 안심한 에드는 마법 등을 들어 앞을 비추었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다가 눈앞에 드러난 대공의 모습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빠르게 다가간 그는 대공을 불렀다.

“전하.”

“…….”

“대공 전하.”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보면 항상 웃으며 반겨 줬던 대공이 지금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초조함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의 불안을 내리누르며 에드는 마법 등을 대공 가까이에 가져갔다. 땅속으로 떨어질 때 충격을 받은 건지 대공의 몸 곳곳에 상처가 보였다.

‘전하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해. 계속 정신을 못 차리고 계신 걸 보면 떨어졌을 때 머리에 충격을 받으셨을지도 몰라.’

에드는 제 뺨을 가볍게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마법 등으로 규칙적으로 오르고 내리는 대공의 가슴을 비추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모자라 대공의 가슴에 귀를 대고 심장 박동 소리를 느꼈다가 코에 손을 대고 호흡하는 대공을 확인했다.

‘그래, 대공 전하께서 겨우 이런 일에 목숨을 잃으시는 일 따윈 없다고.’

긴 한숨을 몰아쉰 에드는 마법 등을 조금 더 높게 들었다. 대공의 얼굴 부분을 살피다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 홍채 반응도 있고.’

에드는 대공이 잠시 정신을 잃은 것일 뿐임을 확인하자마자 옆구리에 찬 약 가방을 풀어 헤쳤다.

‘이렇게 대공의 의식이 없으실 때는 내 치유의 힘보다 약재가 더 효과가 있을 것 같아.’

그에 에드는 챙겨온 약들을 빠르게 조합했다. 동글동글한 환을 완성하자마자 대공의 입가에 갖다 대었다가 아, 하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의식이 없는 대공에게 약을 먹이기가 수월치 않은 탓이었다. 환을 대신할 물약을 제조해 대공의 입에 갖다 대 봐도 마찬가지.

대공의 입 안으로 들어가는 약은 없고 아까운 시간만 자꾸 흘러갔다.

에드는 대공의 손을 연신 주무르며 상태를 살폈으나 여전히 그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에드는 제 입술을 손등으로 슥슥 문질렀다.

“그래, 그렇다면 이 방법밖에 없어.”

부끄러움은 있었지만 망설임은 짧았다.

에드는 물과 환약을 대공이 아닌 제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대공의 턱 끝에 손을 짚고 입술을 벌린 후 입술을 맞붙였다.

의식이 없는 대공에게 더욱더 가까이 입술을 맞붙이기 위해 에드는 고개를 살짝 틀어 각도를 맞추며 대공의 입 안으로 약과 물을 흘려보냈다. 그러고는 대공이 혹시나 약을 뱉어 내지 않을까 하여 한참이나 입을 붙이고 있었다.

보드라운 점막과 점막이 닿고, 물을 머금어 서늘한 입술과 따스한 온기를 지닌 입술이 접하며 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에드는 그 기묘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대공의 목으로 넘어가는 약을 확인했다.

“됐어.”

그 이후로도 에드는 몇 번이나 대공에게 입술을 맞추며 약을 넘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공의 의식이 없자 에드는 두려워졌으나 그 마음을 내리누르며 대공의 상태를 샅샅이 살폈다.

‘……젖은 옷 때문에 전하의 체온이 떨어지고 있어.’

이번에도 망설임은 짧았다.

에드는 대공의 젖은 옷에 손을 뻗었다.

눈에 젖은 옷이 무거웠다.

에드는 대공의 머리를 한쪽 팔로 감싸 충격이 가지 않게 신경 쓰며 옷을 조심스럽게 벗겨 냈다.

“…….”

두툼한 털가죽 망토가, 단단한 가죽 갑옷이,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검은 상의가 몸에서 탈의 되는 동안에도 대공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결국 얇은 셔츠 한 장만 걸친 대공의 모습이 마법 등에 드러나자 에드는 제 로브를 빠르게 벗었다.

‘대공 전하께서 너무 추워 보이셔.’

항상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웃으며 따뜻하고 좋은 것들을 내어주던 대공의 이런 낯선 모습에 에드는 자꾸만 울컥하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전하의 의식을 되찾는 것에만 집중하자.’

지금 상황에서 저체온증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체온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대공의 등과 차가운 흙벽 사이에 제 온기가 남은 로브를 덧댄 에드는 대공의 젖은 옷을 마저 벗겨 내고 자신이 입고 있던 옷도 탈의했다.

옷을 한 꺼풀 한 꺼풀 벗을 때마다 긴 찬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이렇게 삭막하고 추운 곳에서 전하께서는 홀로 얼마나 오래 계셨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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