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29화 (129/198)

한쪽에서 느껴지는 대공의 뜨거운 눈길에 갑자기 부끄러워진 에드는 무심코 맞은편에 있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밖에서는 이르텔과 기사들이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전하, 시간이 늦었는데 이르텔 경이 정찰 준비를 하는 걸 보니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에드의 말에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대공이 곧바로 연구실을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에드 역시 새하얀 눈발이 날리는 밖을 내다보며 외투를 걸쳤다.

“에드, 본성으로 돌아가자.”

밖으로 나와 보니 생각보다 눈보라가 더 거셌다.

‘북부에서 처음 보내는 겨울이라 분위기를 완벽하게 파악할 순 없지만…… 이런 눈보라가 2주 넘게 지속되는 건 예삿일이 아닌 것 같아.’

에드는 마법 등을 든 채 앞을 밝히는 대공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만약 매년 이런 일이 있었다면 전하께서 이르텔 경을 성 밖으로 내보내 주민들을 살펴보라고 명하지 않으셨을 거야.’

추운 북풍 때문일까?

연구실에서 나올 때까지 부드러워 보였던 대공의 뺨과 눈은 본성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 뒤로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네.”

대공의 말이 끝나자마자 복도 끝에서 기사 한 명이 급하게 달려왔다.

“전하! 이르텔 단장님이 눈보라의 원인을 파악하셨다고 합니다. 원래라면 전하께 직접 보고를 올리려고 하셨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눈보라가 거세지는 것이 염려되어 수비 대장의 권한으로 급하게 출정을 나가게 되었고, 이에 대한 허가를 요청하셨습니다.”

그에 잠시 생각에 잠긴 대공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르텔이 그렇게 말했다면 시급히 처리해야 하는 안건이겠지. 그러니 나도 함께 나가겠다. 이 어두운 밤에 기사단만으로 혹시 모를 사태를 대처하기는 힘들어.”

대공도 함께 출정하겠다는 말에 조금 어두웠던 기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출정 준비를 마치는 즉시 밖으로 나갈 테니 이르텔에게 눈보라에 갇힐 경우를 대비해 준비를 더 철저히 하라고 전달하도록.”

기사가 대공에게 말을 전달하기 위해 왔을 때와 똑같이 급하게 뛰어서 사라졌다.

대공은 불안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에드를 바라보다 그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에드. 이르텔이 나에게 함께 가자고 하지 않은 걸 보니 별로 위험한 일은 아니었을 거야.”

대공이 별일 아닐 거라며 달래는 소리를 했지만 에드는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 무심코 그의 옷자락을 붙잡을 뻔했다.

하지만 이내 에드도 단단하게 굳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르텔 경뿐만 아니라 대공 전하께서도 함께 가시니 제가 걱정할 일은 없겠죠. 다만…….”

에드는 말을 하다 잠시만요, 하고는 급하게 뛰어갔다. 다행히 그의 방은 두 사람이 선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방 안에 들어갔던 에드가 무언가를 집어 들고나와서는 대공에게 건넸다.

“눈보라가 거세니 이걸 가져가세요. 저번에 주민들의 약을 만들다 혹시 몰라 준비해 둔 겁니다.”

대공은 에드가 건네준 병을 들어 눈앞에 비춰보았다.

병 안에는 수십 개의 환약이 들어가 있었다. 이어 저를 바라보는 대공의 눈빛에 의아함이 서려 있는 것을 본 에드가 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그게…… 전하께서나 북부 기사들은 마물을 상대하는 일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혼자 이에 관한 연구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신전에서 신력으로 자라게 한 약초를 사용하면 몸이 쉽게 상하지 않게 막아 준다는 이야기를 봐서요. 제 치유의 힘도 이와 비슷한 효능을 낼 수 있을까 해서 시험해 본 겁니다.”

“…….”

“그, 딱히 제가 무리를 한 건 아니고 그냥 사용할 수 있는 만큼의 힘만 쓴 거니까요…….”

대공은 또 위험하게 멋대로 능력을 사용한 에드를 혼내고 싶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이 반짝거리는 에드의 눈을 본 대공은 결국 이에 관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병을 소중히 품 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에드가 준 힘 잘 쓸게. 그럼 잘 자고 내일 보자.”

“네, 대공 전하. 내일 아침 식사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멀어지는 대공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온 에드는 술렁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멍하니 창밖을 쳐다봤다.

머지않아 우렁찬 말소리와 함께 대공과 이르텔이 수 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대공은 아침이 되어서도, 그다음 날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 * *

끼이익.

식당에서 멍하니 식어 버린 아침 식사를 바라보고 있던 에드는 작은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이논과 텐스가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입구에 서 있었다.

“에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야? 원래 전하께서 출정을 나가시면 며칠씩은 걸려.”

“맞아. 봐, 이런 일이 익숙하니까 사용인들 모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하고 있잖아.”

에드의 표정이 계속 어두운 상태로 있자 그들 뒤에 있던 로넨이 에드 쪽으로 걸어왔다.

평소와 달리 살짝 굳어 있는 웃음을 단 로넨이 에드에게 말을 건넸다.

“에드! 나도 염려되지만, 형을 믿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을 거야! 형이 그랬는걸? 형이 없을 때는 내가 북부 성을 책임져야 한다고.”

로넨이 손을 뻗어 에드의 팔을 잡았다. 에드는 로넨의 손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떨림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이가 어린 로넨도 불안함을 내색하지 않고 있는데 나는 뭘 하고 있던 거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에드는 짝, 소리 나게 그의 볼을 때렸다.

갑작스러운 그 행동에 모두가 당혹스러워했지만, 에드는 두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로넨의 손을 잡고 말했다.

“도련님 말이 맞아요. 전하가 없으니 저희가 성과 주민들을 지켜야 합니다.”

기운을 차린 에드를 보며 제이논과 텐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그것도 잠시, 그의 이어지는 말에 점차 멍해지기 시작했다.

“다들 뭐 하고 있어요? 며칠 전부터 눈보라가 이렇게 불고 있는데. 성은 괜찮아도 마을 주민분들은 지금쯤 식수랑 땔감 구하기도 힘드실 거예요.”

“……어?”

“원래는 전하께서 이르텔 경에게 명하셨던 건데 지금 대부분의 기사들이 출정을 나간 상태니 그 일은 저희가 나가서 대신해야죠!”

발을 크게 구르며 외치는 에드의 기세에 텐스와 제이논이 작게 ‘이게 아닌데’를 중얼거리며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곧이어 식당 안은 밖에 휘몰아치는 눈보라보다도 거친 기세를 뽐내는 에드를 보며 로넨이 치는 박수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 * *

현재 제이논과 텐스는 두꺼운 털옷 사이에 파묻혀서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그들은 옷 사이로 두려워하는 눈빛을 흘리며 눈보라 속을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는 두 생명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생명체 중 하나가 다다다다 하며-소리는 안 났지만 그들의 귀에는 분명히 그렇게 들려왔다-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히익.”

“도…… 도망쳐야 해.”

제이논과 텐스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두꺼운 옷과 추운 날씨 때문에 생각처럼 빠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곧이어 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뚫고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일을 매번 겪으셨다는 두 분께서는 이곳에서 뭘 하고 계신 걸까요?”

“헉…… 에드, 제발 봐줘. 나 사실 추위가 쥐약이라 이런 날씨에 나와 있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정을 호소하던 제이논은 눈에 쌍심지를 켠 에드의 표정을 보고 부리나케 구호 물품을 풀고 있는 사람들 틈 사이로 돌아갔다.

“에드…… 사실 말 안 했지만 난 추운 날씨에 밖에 나오면 숨을 잘 못 쉬는 지병……은 당연히 극복해야지! 암!”

눈빛 하나만으로 제이논과 텐스를 물리친 에드는 하늘에 여전히 가득한 먹구름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벌써 이틀이나 더 지났는데……. 여전히 전하께서는 돌아올 생각을 안 하시네.’

점점 더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흘러가려 하자 에드는 탁, 탁 소리가 나게 제 양 볼을 치고는 모닥불이 피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렇게 북부 성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눈보라를 버티길 수일, 조금씩 먹구름이 사라지며 눈이 멎기 시작했다.

“에드! 에드! 눈이 그쳤는데 봤어?”

로넨이 방에 들어왔을 때 에드는 멍한 얼굴로 성에가 낀 창문을 옷소매로 슥슥 닦고 있었다.

“네…… 도련님, 눈이 멈췄네요.”

“그럼 곧 형도 볼 수 있겠지? 그러니 우리 형의 복귀 환영회 준비를 하자! 이르텔도, 기사들도 고생 많이 했으니까!”

에드는 여전히 맑아진 창밖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네…… 해요. 대공 전하께서 돌아오셨을 때 푹 쉬실 수 있게 음식도 준비하고 성도 따듯하게 해 놓고 기다려요.”

로넨의 이 의견은 텐스와 제이논을 통해 눈 깜빡할 새에 북부 성 전체로 퍼져나갔다.

에드가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을 때는 벌써 성 곳곳에서 찬 바람을 막아 줄 융단들이 걸리고 있었고, 식당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성 내의 입구부터 성문으로 이어지는 곳까지 쌓인 눈 역시 벌써 로넨이 사용인들과 함께 정리하고 있었다.

로넨의 말 한마디에 성 내 곳곳에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다들 티는 안 냈지만, 전하의 부재를 느끼고 있었구나.’

에드는 성 내에서 가장 어린 로넨이 이럴 때 형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노력하는 걸 보고 대견함을 느꼈다.

‘백작 저에서 홀로 웅크리고 있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크셨을까.’

짝!

그때 에드에게 빠르게 달려온 로넨이 손바닥을 마주치며 말했다.

“에드 뭐 하고 있어, 이럴 때 농땡이야? 벌써 멀리서 기사들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왔는데 빨리 준비해야지.”

똑. 똑.

“이르텔 경, 뭐라고 하셨죠?”

아까까지 환영식 준비로 왁자지껄하며 복작거렸던 성내는 얼음이 녹아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울릴 정도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전하께서……실종되셨습니다, 도련님.”

에드가 이르텔의 팔을 붙잡고 다그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실종이라뇨? 마물을 무사히 처리해 돌아오신 게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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