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28화 (128/198)

“죄송하지만 저는 오늘은 함께 하지 못할 것 같아요.”

어제 종일 다른 일을 보느라 약초 연구실에 들르지 못했다.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약초 정리를 마치려고 계획을 짰는데 오늘도 성을 나서서 시간을 보내면 곤란했다.

“……그래? 에드도 함께 나가면 좋을 텐데 아쉽다.”

햇살처럼 밝게 빛나던 로넨의 얼굴에 점차 먹구름이 끼자 텐스와 제이논이 양쪽에서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다행히 항상 밝고 활기찬 성격의 로넨이었기에 금방 우울한 기운을 떨쳐냈다.

“알았어, 내가 에드의 몫까지 즐기고 선물도 사 올게!”

* * *

로넨의 외출 준비를 돕고 배웅한 에드는 약초 연구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어제 깜빡하고 물을 주지 못한 화분이 생각나자 마음이 급해졌다.

‘매일매일 들러 물을 주고 돌보던 화분인데 정신이 딴 데 팔려서 그걸 까먹고 있었다니.’

에드는 한심한 제 정신머리에 자책하며 연구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었다.

대공이 창가에 놓인 화분의 흙을 손 위에 올려 살펴보고 있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대공이 천천히 돌아섰다. 대공과 눈이 맞은 에드가 정신을 차리고 급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전하.”

대공에게 가까이 다가가던 에드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가 살피고 있는 화분이 제가 어제 물을 안 준 화분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어제 물을 안 줘서 벌써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설마 전하께서 날 혼내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던 걸까?’

여전히 가까이 오지 않고 굼뜨게 반응하는 에드의 벙벙한 얼굴에 대공은 옅게 웃었다.

“에드, 계속 거기에 서 있기만 할 거야? 에드가 원한다면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내가 좀 심심한데.”

“아, 네.”

빠르게 그 곁에 선 에드가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전하, 오늘은 오전 회의가 있는 날이 아니었나요?”

“있었지.”

오늘은 2주일에 한 번씩 북부 성에서 업무를 보는 관리인들과 모여 의견을 주고받는 정기회의 날이었다.

‘제이논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용인들에게도 휴가를 주신 걸까?’

의문이 서린 에드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대공이 답했다.

“회의를 주체적으로 진행할 제이논이 휴가인데다가 특별한 일도 없어서 오늘은 짧게 마치고 그냥 다들 편히 쉬라고 했어.”

아, 그랬구나.

에드의 대공의 얼굴을 힐끗, 올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야시장을 다녀와서 늦게 잠드셨을 텐데 컨디션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호선을 그린 에드를 바라보던 대공이 흙이 묻은 손끝을 가볍게 문질렀다.

“흙이 메마르지 않아서 아직 화분에 물은 주지 않아도 될 듯해.”

“그런가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에드를 보며 대공은 생각했다.

‘이제 조금쯤 어깨에 힘을 뺐으면 좋겠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머네. 그래도 처음에 봤을 때보다는 많이 좋아졌지.’

한시름 놓아 한결 밝아진 에드의 얼굴에 가볍게 웃음 지은 대공이 물었다.

“아까 창문으로 로넨과 제이논들이 나가는 걸 봤는데, 에드는 왜 같이 안 나갔지? 휴일은 오늘까지일 텐데?”

“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야시장의 다른 모습도 봤으니 만족했습니다. 오늘은 모처럼의 휴일이니 느긋하게 책이나 보려고요.”

“그냥 책을 읽으러 온 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어차피 말려도 몰래 다른 곳에서 할 테니 막지는 않을게.”

에드는 볼을 긁적이며 민망해했다.

“흠흠……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이곳 말고 다른 곳에서 하면 집중이 안 되어서요.”

처음엔 북부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약초를 정리하기 시작한 에드였지만 점점 공부에 흥미를 느꼈다.

‘빙의를 하기 전에는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녹록지 않았는데 지금은 내 의지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채워가고 있으니 정말 즐거워. 나 스스로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도 들고.’

멋쩍게 웃으며 에드가 책상 위의 책들을 바라보자 대공이 걸음을 뗐다. 그러고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높게 쌓인 책들의 맨 위에 올려진 노트를 들었다.

“그런 것 치고는 아까 노트를 살펴보니 저번과 다르게 페이지가 많이 늘어나 있던데.”

“그, 그건 수첩에 적어 놓았던 걸 옮겨 써서 그런 겁니다. 잠도 충분히 자고 운동도 틈틈이 하고 있어요. 정말입니다!”

자신이 대공의 눈을 피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밤새워 공부하고 있다는 걸 들킨다면 제이논처럼 방에 격리될 게 분명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에드의 모습에 대공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곤 들고 있던 노트를 그에게 건넸다.

“우리 약초 연구가 끝나면 서로에게 말할 게 있었지?”

야시장에서 돌아오던 길, 대공도 에드에게 뜻을 밝혔다. 그 역시 에드에게 할 말이 있다고.

“……네.”

“어차피 말려도 듣지 않을 테니 더 무리하지 않게 하려면 앞으로 내가 붙어서 같이 돕는 수밖에 없겠군.”

* * *

‘아으으.’

너무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나.

에드는 만년필을 놀리던 수첩을 덮었다. 결리는 목을 주무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댔다.

어느새 해가 넘어간 약초 연구실은 어둠에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구나.’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에드는 책상 위에 놓인 램프를 켰다.

어느덧 11월 말, 벌써 이곳 연구실에서 약초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훌쩍 넘어갔다.

그 작업은 홀쭉했던 노트가 점점 두꺼워지고 한 권으로 끝날 줄 알았던 연구가 두 권, 세 권이 될 때까지 끝이 나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신전에서 방대한 양의 약초학 자료를 보내 주기도 했고, 약초 효능을 교차 확인하느라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쓰인 책을 보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저녁 이후부터 늦은 밤까지 연구실에서 대공과 둘이 함께 하던 시간들이었다.

덕분에 혼자 했을 때보다 빠르게 연구가 진행되었지만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강제로 방으로 귀가하게 되는 상황은― 대공은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그의 밤샘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쉬웠다.

툭, 툭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워진 밖은 잠깐 주춤했나 싶던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며칠째 눈보라가 너무 심해.’

거친 바람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북부는 이제 완연한 겨울로 접어든 상태였다.

‘더 일찍 약초 자료를 완성하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독감이나 북부에서 자주 발생하는 잔병의 경우 미리 약재 연구를 끝내둔 덕에 대비할 수 있었어.’

그때 연구실 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그래,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병사들과 함께 나가 거주민들이 사는 집들을 조사해서 보수 작업을 진행하도록.”

“네, 대공 전하.”

에드가 뒤를 돌아보자 이르텔과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대공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 에드. 오늘은 어디까지 할 예정이지?”

“오늘은 이미 너무 늦기도 했고, 밖도 점점 추워지니 이만하고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에드는 대공이 내민 따스한 김이 오르는 찻잔을 받으며 답했다.

에드는 예전과 다르게 -그도 그럴 게 매일 같이 이런 행동을 하는데 매번 놀라고 호들갑 떠는 것도 이상했다.- 대공의 이런 배려를 받아들이는데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같은 공간에서 공부를 함께 하다 보니 대공이 더 이상 직장 상사가 아니라 학교 선배나 고아원에서 자신을 잘 챙겨 주던 형처럼 느껴진 덕분이었다.

“그럼 이것만 받고 들어가서 쉬는 걸로 하지.”

대공은 손에 들고 있던 도톰한 책을 에드에게 전했다.

“……아, 저번에 배포하기 위해 가져가셨던 약초 자료집 1권 초본인가요?”

“응, 그 초본에 표지를 추가해 엮어 봤어.”

반짝이는 눈으로 물건을 받아 든 에드가 고개를 숙이며 표지에 적힌 제 이름과 대공의 이름 약자가 적힌 부분을 천천히 쓸었다.

* * *

대공은 벅찬 감정이 느껴지는 에드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책이 나오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되돌아봤다.

신전에서 보내온 자료를 정리하겠다며 자신의 눈을 피해 밤을 지새우던 에드와의 숨바꼭질.

에드가 매번 때를 잊고 식사를 거르는 통에 식당이 아닌 연구실에서 했던 무수히 많은 식사.

일이 고단할 때조차 연구를 하겠다며 이곳에 와서 쓰러지던 에드와 그런 그를 품에 안아 방으로 옮기던 나날.

그렇게 에드와 자신이 함께한 시간이 녹아 있는 결실이 바로 저 책이었다.

“어때, 에드. 마음에 들어?”

그리고 대공은 에드가 고개를 드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 위해 내걸었던 조건은 이제 의미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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