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27화 (127/198)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까 아무래도 손을 잡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에드 생각은 어때?”

대공의 품에 안긴 에드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굳었다. 코끝을 훅 치고 들어오는 대공의 향기에 머릿속이 일순간 암전되었다.

시끌벅적했던 거리의 소음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모자챙에 그늘진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은 에드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그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스르르 눈을 피했다.

평소에는 대답이나 행동이 바로바로 나왔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저 멍하고 어버버했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훑어본 에드가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는 옅은 숨결만 색색 흘러나왔다.

“에드, 내 손을 꽉 잡아.”

대공이 에드가 바로 설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 그의 손을 잡았다. 제게 맞닿는 따스한 손에 에드는 손끝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전하의 손을 한두 번 잡아 보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레 왜 이러는 거지?’

심장이 자꾸만 콩닥거려 에드는 이를 진정시키려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대공은 그런 에드의 꼼지락거림이 간지럽게 느껴졌는지 작게 웃다가 모자챙을 손끝으로 살짝 들었다.

“이쪽 골목은 사람이 유독 많군.”

“……아무래도 먹거리가 많은 골목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이번엔 대공의 말을 놓치지 않은 에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야시장답게 낮에 왔을 때보다 활기가 돌고 사람이 배는 많았다.

“이쪽으로 가 보자, 에드.”

에드는 제 보폭을 살피며 인파가 적은 외곽 쪽으로 나아가는 대공을 따르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어? 하며 반가워했다.

“전하, 이쪽은 화공들의 거리인가 봐요!”

한적한 골목의 담벼락에 전시회라도 열린 것처럼 그림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걸려 있었다. 이를 본 에드의 걸음이 느려졌다.

“마침 이곳은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니 한번 구경해 볼까? 에드도 그림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 같으니까.”

일렬로 쭉 늘어져 있는 다양한 그림에 완전히 시선을 뺏겼던 에드는 대공의 물음에 민망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다양하게 그려진 인물화랑 풍경화 때문인지 하나하나에 계속 시선이 가요. 제 초상화도 남이 보면 이렇게 신기한 기분이 들까요?”

에드가 그림에 집중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대공은 그의 감상에 방해되지 않게 말을 아꼈다.

‘그림마다 화가들 개인의 감정이나 생각이 들어가서일까?’

그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다 달라서 에드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안쪽으로 가면 화공들이 직접 그림을 그려 주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전하께서 내켜 하지 않으시겠지. 초상화는 성에서도 많이 그려보셨을 테니까. 역시 예정대로 연극을 보러 가는 게…….’

그림에서 눈을 돌린 에드가 생각에 잠기자 그의 생각을 알아차린 대공이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끌었다.

“그럼 이번엔 안쪽으로 더 들어가 볼까?”

안쪽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마을 외곽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화공들이 여유롭게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런 모습들은 정말 보기에 좋구나.’

밤을 은은하게 밝히는 마법 등 아래에서 화공들이 연인 혹은 가족 단위로 야시장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붓을 놀리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살짝 풀어진 눈으로 살펴보던 에드는 문득 어깨에 닿는 따스한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대공이 에드의 어깨에 로브를 둘러 주며 버클을 잠갔다.

“나는 이렇게 나온 걸 기념 삼아 초상화를 남기고 싶은데, 에드는 어때?”

계속해서 제 속내를 대공에게 들키고 있는 것 같아 살짝 움찔한 에드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저도 모처럼이니 추억 삼아 초상화를 남기고 싶습니다.”

“그럼 어떤 화공한테 부탁해 볼까…….”

그 순간 에드는 어느 한 화공 옆에 놓여 있는 초상화에 시선을 빼앗겼다.

가족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같은데 화풍이 정말 따스하게 느껴져 어쩐지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술렁거렸다.

에드의 시선을 따라간 대공이 말없이 그의 손을 이끌며 화공 앞으로 향했다.

“아직 의뢰를 받는 중이라면 우리 두 사람의 초상화를 부탁해도 되겠나?”

“네 가능합니다만, 두 분을 따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같이 말씀이십니까?”

화공의 물음에 대공이 에드와 맞잡은 손을 내밀었다.

“그래, 둘이 같이 있는 모습으로 두 장 그려 주게.”

* * *

야시장을 구경하고 북부 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 다르게 느긋하고 운치가 있었다.

〈에드, 모처럼의 휴일이니 성에 돌아갈 때 말을 타지 않고 여유롭게 걸어가는 건 어때?〉

에드 역시 내심 대공과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었기에 냉큼 그 의견에 동의했다.

밤이 되어 어둑한 길은 다행히 조이의 안장 위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마법 등 때문에 낮과 큰 차이가 없었다.

에드는 저보다 한 걸음 앞서서 걷는 대공의 등을 살짝 바라보고는 품속에 고이 안고 있던 초상화를 꺼내 보았다.

다행히 초상화는 에드가 몇 번이나 화공에게 자세를 지적받았음에도 아주 예쁘게 완성된 상태였다.

‘대공 전하는 정말 평소에도 날 이렇게 바라보고 계시는 걸까?’

뻣뻣하게 굳어서 앞만 쳐다보고 있는 저와 다르게 초상화 속 대공의 눈은 에드를 향한 채였다.

그런 대공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얼굴로 열이 모이는 것 같아 에드는 초상화를 잘 말아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 앞서 걸어가고 있을 줄 알았던 대공이 멈춰 선 채 살짝 미소 지으며 그를 보고 있었다.

순간 그 모습이 방금 전 초상화에서 본 대공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그에 뺨으로 다시 열이 몰리는 것 같은 느낌에 에드는 고개를 휘휘 젓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대공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아까 받은 초상화가 덜 마르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서요.”

“쉽게 망가지지 않도록 후처리를 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괜찮아. 만약 초상화가 잘못되더라도 나는 언제든 다시 그려도 좋으니까…….”

어쩐지 하려던 말을 삼킨 듯한 대공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던 에드는 그가 다시 걷기 시작하자 바로 옆에 붙어 섰다.

제 옆에서 따라 걷기 시작한 에드를 묵묵히 바라보던 대공은 북부 성에 거의 다다랐을 때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입 밖으로 나온 목소리는 평소처럼 또렷하지 않고 살짝 흐릿했다.

“다음에도 또 이렇게 둘이서만 따로 나올까?”

에드는 그런 대공을 올려다보다가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표정에 내심 안도했다.

‘전하께서 오늘 나와 함께한 시간이 즐거우셨던 것 같아 다행이야…….’

“네! 언제든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 대답에 대공이 옅은 바람결 같은 웃음을 흘리자 에드는 이렇게 풀어진 분위기인 김에 가슴 속에 가지고 있던 말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전하께서도 약초 연구가 마무리되면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 주시겠습니까?”

* * *

아침에 눈을 뜬 에드는 욕실에 들어가 세수부터 했다. 거울을 보며 자꾸만 열이 오르려는 얼굴을 바라보다 찬물을 끼얹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민망했다.

‘나도 모르게 대공 전하의 손을 덥석 잡질 않나, 품에 안겼을 때 너무 멍하게 굴질 않나…… 게다가 돌아오는 길에 분위기가 나긋나긋하니 풀어져 좋았다고 해도 그렇지. 약초 연구가 마무리되면 부탁을 들어 달라고 하다니.’

마치 시험을 잘 보면 선물을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고아였던지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인데 그걸 전하께 청하다니.

대공에게 너무 어리광을 부린 것 같아 끄응, 앓는 소리를 낸 에드는 찬물을 더 세게 틀었다.

그와 같은 시각, 대공은 집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지난밤 야행을 떠올렸다. 계획에 없었던 외출이었지만 평온하고 값진 시간이었다.

따스한 김이 오르는 차를 마시며 대공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대신 전하께서도 약초 연구가 마무리되면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 주실래요?〉

그렇게 말하며 눈가를 부드럽게 휘어 웃는 에드의 얼굴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어떤 부탁일까?〉

대공이 묻자 그건, 하며 에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며 대공은 그의 입에서 무슨 부탁이 나오더라도 다 들어주고 싶은, 그런 밤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그때 말씀드려도 될까요?〉

살랑살랑 나부끼는 봄바람 같은 장난기가 어린 목소리에 대공은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보드랍고 동글동글한 물방울이 심장을 톡, 톡 두드리는 느낌…… 언제나 메말라 있던 심장이 촉촉하게 젖어 드는 기분이야.’

에드와 함께 있을 때면 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품 안에서 초상화를 꺼낸 대공은 화공이 자세를 몇 번이나 잡아 줬지만, 여전히 뻣뻣한 느낌이 남아 있는 에드를 내려다보며 살포시 웃었다.

찬물로 얼굴을 식히고 식당으로 내려온 에드는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어제 온종일 놀아서 그런지 좀 노곤하네.’

어제 일의 여파가 남은 건지 여전히 몸이 나른하고 머릿속이 멍했다.

조금씩 눈이 감기는 것을 느낀 에드는 황급히 고개를 휘젓고는 수첩을 꺼내 들었다.

“에드!”

한참을 수첩을 들여다보는데 맞은편에서 도도도 하는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의자가 뒤로 밀리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로넨이었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밝은 웃음을 보이는 그를 뒤따라 식당에 들어서는 제이논과 텐스도 보였다.

“우리 어제 다 못 본 시장을 구경하러 나갈 건데 같이 나갈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쭈욱 빼고 에드의 수첩을 바라보던 로넨이 본론을 꺼냈다.

“어제도 나가셨는데 피곤하시지 않으세요?”

“응, 제이논이랑 텐스는 조금 피곤하다고 하는데 난 괜찮아!”

‘……오늘은 따로 계획이 있는데.’

에드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로넨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이마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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