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26화 (126/198)

“제가 야시장에서 형에게 선물하고 싶은 걸 골라 봤는데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고마워, 로넨.”

“그리고 텐스와 제이논도 형에게 선물을 준비했대요!”

로넨이 마치 무대의 사회자처럼 그들을 가리키자 대공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줘야지.”

맡겨 놓은 물건을 받는 것 같은 태도에 텐스와 제이논이 옅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선물을 주섬주섬 꺼내 놓았다.

그러자 대공이 이번엔 에드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물 상자를 만지작거리던 에드는 제이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붉은 보석 브로치는 귀족들이 마음이 있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표할 때 사는 건데. 에드 누구 좋아하는 사람 있었어?〉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대공과 눈이 마주치자 순간 에드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에드, 왜 그래?”

에드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굳어 있자 옆에 서 있던 제이논이 그의 팔꿈치를 툭, 쳤다.

생각보다 제이논의 힘이 강했는지 주머니 속에 있던 에드의 손이 빠져나오며 그 안의 선물 상자가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어? 이거 아까 산 그거 맞지? 예뻐서 샀다고 하더니, 전하께 드리려고?”

제이논의 말에 대공의 시선이 에드의 손으로 향했다.

“에드도 날 위해 선물을 준비한 건가?”

“……그게 별 건 아니고요, 조그마한 브로치를 하나 샀습니다.”

“브로치라…….”

“그것도 루비 브로치입니다. 대공 전하도 알고 계시죠? 붉은색은 정열을 뜻해서 호감 있는 상대방에게 관련 물품을 주는 건…….”

에드는 제이논이 더 이상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서둘러 말허리를 자르며 선물 상자를 대공에게 전했다.

“그, 그런 게 아니라 전하께 드릴 선물을 다 같이 마련하다 보니 겹치지 않은 물건을 준비한 것뿐입니다.”

대공이 선물 상자를 확인하는 것을 보며 에드는 내심 제이논이 먼저 말을 꺼낸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루비 브로치를 사면서도 너무 과하지 않나, 혼자 튀는 것은 아닌가 하며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내놓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오히려 이렇게 다 함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면 선물을 내놓기 더 어려웠을 거야. 전하께서 환하게 웃으시는 걸 보니 역시 사길 잘한 것 같기도 하고. 뭐…… 제이논이 말한 걸 염두에 두고 산 건 절대 아니니까!’

……아니, 그런데 왜 또 이렇게 가슴이 쿵쿵 뛰는 거지?

상자를 열어 브로치를 본 대공이 눈가를 접으며 웃자 가슴께가 조여 왔다.

“그런데 전하, 에드가 선물한 게 뭔지 상자에서 꺼내서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도련님과 저는 그때 자리에 없어서 못 봤습니다. 너무 궁금합니다!”

텐스가 고개를 쭈욱 빼며 호들갑을 떨자 대공은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듯 선물 상자를 품 안에 쏘옥 집어넣고 에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에드가 특별히 날 위해 준비한 선물이니 소중히 할게.”

* * *

응접실에서 방으로 올라온 에드는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욕실을 나서자 훈훈한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에드는 벽난로의 장작을 살피며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리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니, 그런데 아까부터 심장이 왜 이렇게 빠르고 크게 뛰지? 아침에 커피를 마셔서 그런가?’

두근두근, 갈비뼈를 뚫고 나올 기세로 뛰는 심장 때문에 에드는 손으로 가슴을 꾸욱 눌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의 두근거림이 쉽게 진정되지 않자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분명 아까 제이논이 이상한 말을 해서 그런 거야. 난 그냥 루비 브로치가 눈에 들어서 산 것뿐인데.”

벽난로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은 에드는 따스한 물을 마시며 묘하게 수선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러니 이제 진정 좀 하자, 심장아.”

한참 동안 불을 바라보아도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끝내는 가슴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소란스러워지자 에드는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차라리 도서관에 가서 약초랑 관련된 정보나 찾아보자.’

다른 거에 집중하다 보면 이 증상도 사라질 테니.

방을 나선 에드는 성 중앙에 있는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도서관 앞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에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묵직한 도서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내 책장 앞에 서 있는 뜻밖의 인물 때문에 급히 뱉었던 숨을 다시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높다란 책장 사이에서 대공이 책을 꺼내고 있었다.

“……대공 전하.”

대공을 발견하자 순간 멈칫한 에드는 빠르게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피곤하실 텐데 쉬시지, 도서관에 와 계셨네요. 요즘도 늦게까지 일하시는 거 같은데 너무 무리는 하지 않으시는 게…….”

“에드야말로 오늘 외출로 피곤했을 텐데 쉬지 않고 여긴 왜 또 왔어. 그러다가 저번처럼 침대가 아닌 데서 잠들면 어떻게 하려고.”

그를 보자마자 걱정의 말을 쏟아 내던 에드였지만 자신 역시 이런 말을 해도 될 정도로 컨디션을 살피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던 에드가 대공의 가슴께에서 빛나고 있는 브로치를 발견했다.

“어, 그건…….”

에드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물끄러미 대공의 가슴팍을 바라보자 대공이 옷을 가볍게 정리하며 말했다.

“오늘 누가 선물해 준 브로치인데 어때, 에드? 옷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아?”

“…….”

마법 등에 비친 루비가 반짝반짝 빛이 나며 에드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선물해 준 사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상한가?”

대공이 에드의 눈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자 깜짝 놀란 에드가 횡설수설하며 답했다.

“물, 물론 잘 어울리십니다.”

작게 웃은 대공이 손을 뻗어 에드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겼다. 잘 마른 머리카락이 대공의 손아귀에서 사르륵 흩어졌다.

에드는 그 부드러운 손길에 기분이 좋았지만 어쩐지 이상한 생각도 함께 들었다.

‘로넨이 털을 쓸어 줄 때마다 눈이 반쯤 감기던 로아도 아마 이런 기분이었겠지? 따뜻하고 외롭지 않은, 사랑을 듬뿍 받는 그런 느낌…….’

그 안락한 기분에 에드는 그냥 이대로 있었으면 했으나 갑자기 떠오르는 게 있었다.

“……전하, 혹시 중앙 마을의 야시장에 가 보신 적 있으신가요?”

에드의 질문이 조금 갑작스러웠는지 대공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릴 때 부모님 따라 몇 번 가 본 적은 있어.”

“그럼 성인이 되고 나서는요?”

“음…… 별문제 없는지 낮에 이르텔과 함께 몇 번 나가 본 적은 있지.”

대공이 답을 내놓을 때마다 어쩐지 점점 가슴이 답답해진 에드는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게 아니라, 오늘 제가 나갔다 온 것처럼 대공 전하께서도 따로 야시장에 놀러 가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 * *

말이 어두운 밤길을 빠르게 달려 나갔다. 오랜만에 조이의 등에 올라탄 에드가 뻣뻣이 굳어 있자 대공이 하하, 웃었다.

“몸이 굳은 채로 말 위에 앉아 있으면 나중에 근육통이 올 수도 있어. 아직 어색하겠지만 내게 몸이라도 기대서 긴장을 좀 풀어 봐.”

“……네.”

대공의 조언에 에드는 차마 낙마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등에 닿는 대공의 몸 때문에 더 긴장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쌩쌩 부는 바람결에 흩어지는 대답을 뒤로하고 대공은 조이의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조이 덕분에 빨리 도착했네요.”

에드가 대공과 함께 도착한 곳은 야시장이었다. 전하께서도 야시장을 즐겨본 적 있냐는 에드의 질문에서 시작된 야행이었다.

“잠깐만, 에드.”

북적거리는 안쪽까지 조이를 데리고 다닐 수 없었던 대공은 시장 입구 근처에서 말을 맡기러 갔다.

에드는 그런 대공을 기다리며 아까보다도 더 화려해진 야시장 입구를 서성였다.

그러다 문득 말을 맡기고 있는 대공의 훤칠한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아, 이러면 전하께서 활동하기 편하지 않으실 텐데…….’

급히 주위를 둘러본 에드는 여러 가지 파티 용품을 파는 곳에 들어갔다.

대공이 서 있는 곳으로 에드가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는 눈가까지 가릴 수 있는 모자와 로브가 손에 들려 있었다.

에드는 손에 소중하게 쥐고 있던 물품을 대공이 받아 들자 힘껏 까치발을 들며 속삭였다.

“여긴 아무래도 대공 전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으니 가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에드를 무언가 즐겁다는 듯 바라보던 대공은 풀숲으로 들어가 그가 준 로브와 모자를 쓰고 돌아왔다.

‘이래도 모자 밑으로 턱선이 보이니 전하의 아름다움을 전부 숨기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시선이 몰리는 건 막을 수 있겠지.’

어쩐지 아까 전보다 조금 신이 난 것 같은 걸음으로 다가온 대공이 에드에게 바짝 붙으며 그의 귀에 말을 걸었다.

“에드, 그래서 오늘 계획이 어떻게 되지? 제이논의 말에 따르면 원래 이런 때에는 경력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던데.”

“원래 도련님이 정하신 코스로는 꼬치구이를 먼저 먹어야 하지만 저희는 이미 식사를 했으니…… 전하, 이쪽으로 오세요.”

에드는 구름 과자 가판으로 대공을 이끌어 그의 손에 분홍색 구름 과자 막대기 하나를 쥐여 주었다.

“전하께서는 단 걸 별로 안 드시는 것 같던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대공은 별다른 말 없이 솜사탕 한쪽을 찢어서 입에 넣었다.

“맛있네.”

그런 대공의 반응에 한시름을 던 에드는 대공과 야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중앙으로 갈수록 몰리는 인파에 그만 발을 헛디딘 에드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그에 대공이 황급히 손을 뻗어 휘청이는 에드를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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