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저는 이곳 북부 사람도 아니고 전대 대공 내외분들 얼굴도 모르는걸요?”
대공은 마법 등에 반짝거리는 에드의 눈동자를 보자 백작 저에서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당시 기억이 떠올랐다.
* * *
“……그래서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봤나? 제이논.”
어딘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아스넬은 이마 한쪽에 큰 혹을 달고 있는 연보라색 머리의 제이논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헤린스 백작가의 하인이라고 합니다. 백작 저에 들어온 지는 반년도 채 안 되었고요.”
“특이 사항은?”
“부모 모두 돌아가신 상태라는 것, 원래는 로넨이라 불리는 백작가 양자를 괴롭히는 하인 중 하나였는데 그의 전담 하인으로 배정받고 나서는 갑자기 그를 보살피기 시작했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합니다.”
제이논의 말을 듣던 아스넬의 눈가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로넨이 진짜 내 동생이라는 것을 알고 태도가 바뀐 걸 수도 있겠군. 백작 저까지는 이제 얼마나 남았지?”
“지금 남부의 오르막 마을을 지나고 있으니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창문 밖으로 로아 보육원이라고 간판이 아스넬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갔다.
‘백작 저에 있는 로넨이라는 아이가 내 동생이 아니라면 저곳도 한 번 들러 봐야겠군.’
마차는 침묵 속에 휩싸여 한참을 가다 어딘가 어수선한 헤린스 백작 저에 도착했다.
“제이논, 빨리 나가서 무슨 일인지 파악하고 오도록.”
제이논이 부어오른 이마를 만지며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밖에 있는 이르텔이나 텐스에게 알아 오라고 시키시면 안 될까요? 제가 지금 이 꼴로 사람들을 만나기는 좀…….”
“다른 쪽도 똑같은 꼴이 되고 싶은 건가?”
아스넬의 말에 기겁한 제이논이 급히 마차 문을 열고 뛰쳐나가자 밖에 서 있던 텐스가 쌤통이라는 표정을 하며 그에게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이르텔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대공에게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로넨이 만약 진짜 전하의 동생이라면 에드라는 하인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로넨이 정말 내 동생이라면 그에 맞는 보답을 해줘야겠지. 하지만 황제의 수족이라거나 보상을 바라고 일부러 로넨에게 잘해준 것이라면…… 글쎄.”
아스넬은 벌써 수년간 그의 동생을 이용한 황제의 끄나풀과 지긋지긋하게 얽혔었다.
만약 이번에도 자신의 동생을 빌미로 저와 북부에 위해를 가할 생각이라면 손속에 자비를 둘 생각이 없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제이논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전하, 로넨 도련님께서 독…… 독에…….”
아스넬은 제이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급히 마차에서 내려 백작 저로 향했다.
* * *
“그래서 전하 직접 만난 에드라는 하인은 황제의 끄나풀이 맞는 것 같습니까?”
로넨이 친동생이라는 게 밝혀진 이후 묻는 이르텔의 말에 아스넬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를 숨기고는 있는 것 같지만, 그게 황제 쪽은 아닌 거 같아. 대처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어리숙해. 어차피 로넨이 원하니까 이 백작 저에 더 머물면서 지켜봐야 할 거 같아.”
그 뒤로도 아스넬은 에드의 주변을 지켜보면서 그의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왜 저렇게 온종일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대신해 주는 거지? 내 친동생을 찾아 준 은인인 이상 이곳에서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을 텐데?’
그 이후로도 에드는 아스넬이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일을 하다 다치거나, 그의 착한 심성을 이용한 사용인들에게 괴롭힘에 가까운 일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스넬은 에드에게서 백작 부부와 자제뿐만 아니라 백작 저에 있는 다양한 사용인들이 로넨을 괴롭혔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뒤로 아스넬은 백작 저에 머물면서 로넨을 괴롭혔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에드를 골탕 먹인 사용인들까지 모두 찾아내 갖가지 방법들로 대신 복수를 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그 모습을 보던 제이논과 텐스, 이르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공의 이상 증세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전하가 원래 저런 걸 하나하나 처리하는 스타일이셨나? 평소대로의 전하 방식이면 떠나신 후 사고사로 위장해 백작 저를 통째로 날리셨을 분이신데.”
항상 대공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던 이르텔 마저 아스넬의 행동에 의문을 표했다.
“확실히……. 한 번 칼을 뽑으시면 뒤끝이 안 남게 한 번에 처리하시는 분인데 지금은 방식은 어딘가 어린아이 장난 같아.”
제이논이 홀로 뭔가를 안다는 듯 쯧쯧쯧 하고 혀를 차더니 둘에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전하께서 에드라는 하인이 마음에 드셨나 봐. 웬만한 일은 그에게 의사를 묻고 진행하시더라고. 백작가 자제의 일은 대공 전하의 뜻이 듬뿍 담긴 거 같지만.”
팔짱을 낀 제이논이 몸을 가볍게 떨며 말을 이었다.
“으, 벤타 학술원에서 3년을 버티고 돌아왔더니 집은 망해 있고 빚은 산더미일 걸 생각하면 진짜 살아도 산 게 아닐 거야.”
“근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제이논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텐스가 톡, 쏘아붙이자 그가 넌 한참 멀었다는 눈빛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전하의 행동 조금만 봐도 알겠던데 그걸 아직도 몰라?”
“전하의 행동 조금만 봐도 알겠던데 그걸 아직도 몰라?”
“……모르긴 내가 뭘 몰라?”
텐스가 뚱하게 답하자 제이논이 물었다.
“너 아플 때 전하가 직접 약 지어 주신 적 있어? 아니면 일하지 말고 밖에 나가서 쉬고 오라며 돈을 주신 적은? 신발 사 주신 적 있어? 잘했다고 머리 쓰다듬어 주신 적은?”
그 말에 손뼉을 짝 소리 나게 친 텐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쉬고 오라며 용돈을 주신 적은 있는데 다른 건 없네.”
“나도 검을 특별히 주문에서 만들어 주신 적은 있지만 다른 건 없다.”
두 사람의 말을 듣던 제이논이 갑자기 충격받은 표정을 하더니 중얼거렸다.
“난 놀고 오라며 용돈을 받은 적도…… 전하께 뭔가를 받은 적도 없는데…….”
이때 아스넬이 지나가다 삼인방이 하는 대화를 들었지만, 사실 그도 자신이 왜 계속 에드라는 하인에게 이런 행동을 하게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정신 차리고 보면 아스넬의 눈은 항상 에드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활짝 미소 짓는 걸 보면 저도 기뻤고, 아이 장난 같은 복수를 성공할 때마다 통쾌하다며 속 시원해하는 걸 보면 제 기분도 즐거웠다.
아스넬은 에드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 부러 복수 핑계를 대며 더 오랫동안 백작 저에 남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황실 축하연은 그에게 좋은 기회였다. 로넨의 부탁으로 에드도 함께 북부로 떠나게 되었다지만, 아직 아스넬은 그의 마음을 확실히 얻은 게 아니었으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아스넬은 그런 본인의 마음이 그저 로넨을 위한 것이라며 덮고 외면했다.
그래서 아스넬은 에드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저 멀리서 떠들고 있는 삼인방을 대할 때와 비슷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에드와 있을 때면 그는 북부를 다스리며 외적을 막는, 황제의 가장 큰 걸림돌인 대공이 아닌 로넨의 형인 아스넬 린든이었다.
에드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있을 때면 그는 18살 때부터 어깨에 메고 있던 무거운 짐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에드와 심복들을 대할 때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아스넬은 일라의 불꽃에 비친 에드의 옆얼굴을 보고 마침내 깨달았다. 이게 제 부모가 말한 사랑이라는 걸 정신없이 뛰는 심장이 말해 주고 있었다.
* * *
에드는 자신의 말에 아무런 답도 없이 빤히 바라보는 대공의 시선을 결국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숙어진 머리 위로 한동안 대공의 뜨거운 시선이 쏟아졌다. 그러다 갑자기 에드의 눈앞으로 낡은 노트 한 권이 나타났다.
“에드는 우리 형제를 만나게 해 준 은인이니까. 분명 우리 부모님도 에드의 얼굴이 보고 싶으실 거야.”
아스넬이 건네는 노트를 조심스레 받아든 에드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곳이 조금 어두워서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분명 전하께서 내 붉어진 얼굴을 보고 걱정하셨겠지.’
“이건 수도에서 구한 약초에 대한 수기 자료야. 그런데 이대로 쓰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아 부모님과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조사하고 기록했어.”
에드는 노트를 조심스레 펼쳐 그 안의 내용들을 하나씩 넘기며 살펴봤다.
노트 안에는 다양한 약초는 물론 약재 달이는 법까지 상세하게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뒤로 갈수록 노트에는 약초뿐만 아니라 대공 부부의 추억이나 전하의 것으로 보이는 낙서들이 곳곳에 보였다.
그 수첩을 끝까지 다 보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는 바람에 에드는 그 얼굴을 대공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아스넬은 그런 에드의 모습을 따스한 시선으로 두 눈에 담고는 노트를 소중하게 쥔 그의 양손을 감쌌다.
“이걸 에드에게 줄게.”
대공의 말에 화들짝 놀란 에드가 눈을 깜박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대신 부모님이 남겨 주신 수첩을 에드가 나랑 같이 완성해 주지 않을래?”
“하지만 이건 대공 전하의 소중한 물건이잖아요. 저 말고 다른 전문가분께 부탁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야 새로 알게 된 내용은 제 수첩이나 다른 수첩에 기입해도 되는 거고요. 혹시 믿을만한 사람을 찾는 거라면 이르텔이나 제이논도 있고 하다못해 텐스도 있잖아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따라가지 못한 에드가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난…….”
항상 당당하고 거침없던 아스넬이 조금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난 에드랑 이 수첩을 완성하고 싶어. 우리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걸 끝내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