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제이논을 보며 에드가 얼른 대답했다.
“당연하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도와드릴게요.”
“어려운 건 아니고 내가 성 밖에 잠깐 나갈 일이 생겨서 지금 나가 봐야 하거든. 근데 오늘 우편물이 아직 도착을 안 해서. 이따가 나 대신 전하께 전달 좀 해 줘.”
“그냥 우편물을 종류마다 나눠서 분류하면 되나요?”
“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야. 텐스에게 부탁하려니 덜렁거려서 믿을 수가 있어야지. 미안하지만 그 일 좀 부탁해.”
“그러지 말고 나한테 맡겨 봐. 내가 손을 놀리는 건 다 잘한다니까?”
약재를 내려다보며 흐뭇해하던 텐스가 끼어들자 제이논이 시선을 살짝 들었다.
“응, 이건 머리도 함께 써야 하니까 에드에게 맡길래.”
“어, 그래. 게임만 하면 나한테 지는 제이논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에드는 아웅다웅하는 제이논과 텐스가 소강상태를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분류하면 되는지 알려 주세요.”
에드가 내미는 물을 마신 제이논이 우편물 분류 방법을 설명했다.
“아, 잠시만요.”
제이논의 말이 길어지자 에드는 외투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러자 부지런히 말하던 제이논의 입이 딱 닫혔다.
에드가 의아함에 고개를 들자 제이논이 빤히 수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이논?”
뭐가 잘못되었나 싶어 에드가 수첩을 뒤적거리자 제이논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 아니야. 마저 알려 줄게.”
* * *
“오늘은 제이논이 아니라 에드가 나와 있네?”
제이논을 도와 몇 번 우편물을 받았던 에드를 알아본 배달부가 웃으며 인사했다.
“네, 오늘은 제이논이 일이 있어서 제가 대신 나왔어요. 우편물은 이게 전부인가요?”
“오늘 건 이게 끝이야. 근데 우편물 양이 많은데 혼자 옮길 수 있겠어?”
“네, 이 정도는 혼자 옮길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곳곳에 얼음이 얼었던데 조심히 가세요.”
배달부와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에드는 우편물을 응접실로 옮긴 후 제이논이 알려 준 대로 분류를 시작했다.
‘실수하면 안 되니까.’
에드는 북부에서 온 우편물과 다른 지역에서 온 우편물들을 세세하게 분류해 칸이 나눠진 쟁반에 담은 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좋아, 틀린 거 없으니까 이제 마지막 우편물 상자만 확인하면 되겠다.”
에드는 마지막 우편 상자를 펼쳐 차례차례 정리하다가 어? 하며 손을 멈췄다. 언젠가 보았던 낯익은 봉투와 인장에 에드는 우편물을 돌려 앞을 살펴보았다.
“……약초 협회?”
약초 협회면 자신이 대공에게 부탁해서 만든 기관이었다. 음,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에드는 내용이 궁금했지만, 대공에게 온 편지를 함부로 살펴볼 수는 없었기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편과 소포를 잘 정리해 쟁반에 올려놓았다.
“중요한 편지도 있을 테니 빨리 가져다드리자.”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한 에드는 쟁반을 들고 대공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똑, 똑 집무실 문을 노크하고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작게 숨을 들이켜며 호흡을 정리한 에드는 문을 열고 들어서며 인사를 꾸벅했다.
“대공 전하, 오늘 북부 성에 도착한 우편물입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대공의 책상 위에는 알 수 없는 내용의 서류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서류들 사이에서 대공이 에드를 또렷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간 시선에 에드는 긴장이 되어 대공이 앉아 있는 책상에 쟁반을 내려놓고 냉큼 뒤로 물러났다.
에드가 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는 걸 본 대공이 작게 웃으며 쟁반에 올려진 편지들을 확인했다.
“오늘은 제이논 대신 에드가 왔네. 그래, 우편 중에 특별한 건 없었고?”
“대부분이 지방 협회에서 안부 차 온 편지였습니다. 아 그런데 여기, 제가 저번에 백작 저에서 요청 드렸었던 약초 협회에서 편지와 소포를 보내왔습니다.”
“음…….”
신중한 눈길로 편지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대공의 모습에서는 지난 밤 로아의 집을 손보느라 쌓였을 피로함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제 시선을 눈치챘는지 편지를 읽던 대공이 시선을 들어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럼 더 시키실 일이 없으시면 전 이만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나도 나갈 일이 있는데 같이 나가면 되겠군”
그 사이 마지막 편지까지 모두 확인한 대공이 약초 협회에서 온 소포를 챙기며 의자에서 일어나자 에드는 의아했다.
‘저건 왜 챙기시는 걸까?’
에드는 대공의 뒤를 따라 집무실을 나섰다. 한동안 말없이 복도를 앞서 걷던 대공이 걸음을 멈췄다.
“에드, 혹시 급한 일이 남아 있나?”
“아뇨, 점심시간까지 일정이 비어 있습니다.”
“그럼 나와 어디 좀 동행하지.”
에드는 대공의 곁에 있으면 갑자기 얼굴이 붉어질 때가 많아 얼른 떨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대공의 얼굴에 그만 대답부터 하고 말았다.
“네, 뭐 챙겨야 할 게 따로 있을까요?”
“아니, 따로 챙길 건 없고. 음…… 지금 바로 갈 건데 에드의 옷이 너무 얇은 거 같네.”
대공이 몸에 걸친 외투를 벗어 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외성으로 가는 길은 많이 추우니까 덮고 있어. 아침에 들으니까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갑작스러운 대공의 손길에 에드의 얼굴이 다시 붉게 타올랐다.
그 때문에 에드는 전하가 왜 내성을 벗어나 외성으로 향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할 겨를이 없었다.
한동안 말 한마디 없이 걷던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은 북부 성의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구름다리에서 끝이 났다.
“에드는 아직 이 외성의 연구동까지는 올 일이 없었지?”
“네? 아 네. 연구동까지 온 적은 없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이 보통 뭘 하는지 모르겠네.”
대공과 함께 외성 안쪽으로 더 들어간 에드는 그가 좁은 계단에 올라서자 조심스레 그 뒤를 따랐다.
고요한 복도를 지나 커다란 창을 마주 보고 있는 문 앞에 다다르자 맡기만 해도 코가 찡그려지는 쓴 냄새가 확 풍겨왔다.
“어? 이 냄새는?”
텐스가 아까 가져왔던 약재 냄새와 비슷한 것 같은데?
곧이어 문이 열렸고 에드의 시선 곳곳에 커다란 책상과 그 위에 놓인 시약병들, 약재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큰 규모의 연구실에 놀란 에드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대공은 문 앞에 멀거니 선 에드의 어깨를 뒤에서 밀며 말했다.
“의원이 적은 북부를 위해 작년부터 전문적으로 약초에 대해 연구하는 시설을 만들고 있었는데 오늘 온 소포로 드디어 완성됐네.”
내부는 여러 가지 약재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널찍한 책상 위에는 갖가지 종류의 약초들과 관련 서적들이 올려져 있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절대 단시간 내에 준비한 것이 아닐 것 같은데.’
대공과 함께 연구실 안쪽으로 들어온 에드가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책장에는 도서관에서도 보지 못한 연구 자료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대공 전하, 이 많은 걸 어떻게 준비하신 거예요? 전에 제이논에게 물어봤더니 약초학 자료를 모으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하던데……. 특히 서적 같은 경우에는 파는 사람들이 적어서 양질의 자료를 구하기 힘들다고요.”
이보다 기쁠 수 없다는 듯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에드를 보며 대공이 천천히 걸어왔다.
“사실 이건 내가 대공의 자리에 오르기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거야.”
그리고 에드의 등 뒤에서 멈춘 대공은 손을 뻗어 천장에 달린 마법 등을 켰다. 마법 등에서 따스한 색감의 빛이 흘러나왔다.
“에드의 말대로 약초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니까.”
무언가를 떠올리듯 잠깐 말을 멈춘 대공이 책상에 놓인 수첩 한 권을 들어 올렸다. 그걸 천천히 쓰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도 북부는 약과 의원이 부족하지만, 내가 어렸을 땐 약만 있으면 나을 수 있는 잔병에도 주민들이 쉽게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거든.”
에드는 어딘가 슬퍼 보이는 대공의 뒷모습을 보며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해서 전대 대공 내외인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갖고 있던 재화들을 팔아 약재 연구 준비를 시작했어. 이게 그 결과물이고.”
그제야 에드는 이 연구실에 약재와, 연구 자료뿐만 아니라 곳곳에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아주 옛날에 완성했어야 했는데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보니 이제야 끝났네. 로넨은 아마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모를 거야. 지금도 어리지만, 그때는 완전 아기였을 때라.”
대공은 수첩에 소중하게 끼워져 있던 초상화 한 장을 꺼내 에드에게 내밀었다.
“우리 부모님이 가지고 있던 가족 초상화야.”
에드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 초상화를 받아 보았다.
초상화에는 지금의 대공과 쏙 닮은 30대 초반의 여성이 아이를 안고 있었고, 그런 두 모자를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쳐다보는 남성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 품속의 아이가 로넨이고, 이게 나야.”
초상화 한 귀퉁이를 가리킨 대공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밝게 웃고 있는 그들과 살짝 떨어진 채 여성의 옷자락을 붙잡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서 있는 소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에드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대공 전하께서는 왜 혼자 이렇게 울상을 짓고 계시는 건가요? 다들 환하게 웃고 있는 것과 달리요.”
대공은 에드의 물음에 멋쩍게 웃으면서 볼을 긁었다.
“글쎄……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부모님의 초상화가 이것 하나만 남을 줄 알았다면 활짝 웃었을 텐데, 아쉽네.”
낮게 깔리는 음성에 에드는 저도 모르게 대공의 손을 양손으로 꼭 감쌌다.
“그럼 전하, 돌아가신 전대 대공 내외분들을 위해 로넨 도련님과 함께 초상화를 그려 여기에 두는 건 어떠세요?”
대공은 에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조금 놀랐지만 이내 손끝에서 퍼지는 온기와 그의 배려에 가슴이 따듯해졌다.
“그래…… 그러자. 대신 여기 놓을 초상화에는 로넨과 나뿐만 아니라 에드도 들어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