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17화 (117/198)

대신관을 졸졸 따르며 로넨이 단박에 부정하자 대신관이 빙그레 웃었다.

“대신관님께서 북부에 와 주셔서 정말 좋았어요! 이제 가시면 내년에야 볼 수 있는 거죠?”

“저도 자주 오고 싶지만, 쌓인 나이만큼 보살펴야 할 사람도 많다 보니 내년에야 다시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뜻깊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로넨과 대화를 나눈 대신관이 인자하게 웃으며 로넨의 뒤에 선 에드와 시선을 맞췄다.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모르겠으나,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하겠네.”

대신관이 보드랍게 꺼낸 말에 에드가 옅게 웃었다.

“저 역시, 대신관님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테니 그때까지 건강히 지내셔야 합니다.”

* * *

대신관을 배웅한 후 저녁을 먹은 에드는 방으로 올라왔다. 의자에 앉아 내일 있을 일정을 곰곰이 생각하던 에드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제이논이 당분간 큰 행사는 없다고 했었지?”

만년필로 그간 있었던 일정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체크하던 에드는 수첩을 휘리릭 넘기다가 최근에 일기를 쓴 마지막 페이지에서 아, 하며 볼을 긁적였다.

‘……약초학이라.’

오늘은 시간이 정신없이 지나가 대신관이 말을 꺼내기 전까지 그에 대해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만년필로 여러 번 덧칠해가며 표시한 부분들을 시선으로 따르던 에드는 피식 웃었다. 대공 전하와 로넨 도련님의 이야기 부분을 얼마나 꾹꾹 눌러 썼는지 다음 페이지까지 잉크가 살짝 묻어 있을 정도였다.

‘권유해 주신 신관님이 당장 떠나는 건 아니셔서 다행이지만, 그래서인지 생각이 더 복잡해. 마치 대한민국에서 고3 때 진로를 결정하는 것처럼…… 나중에 신관님과 한 번 더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

수첩을 덮은 에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시간이 되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기에 잠깐 바람을 쐬기 위해 외투를 걸쳤다.

‘고민이 있을 때는 반복 노동이 최고지. 이참에 로아의 집을 더 다듬어 두면 좋을 것 같아.’

텐스와 이르텔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빠르게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잔가시만 조금 정리해 두면 내일쯤 울타리를 세우고 로아를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등을 챙겨 성 밖으로 나온 에드는 옷깃을 여미며 중얼거렸다.

“으으, 확실히 밤에는 춥네.”

겨울 가까워지는 걸 실감할 수 있을 만큼 북부는 하루하루가 갈수록 기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

그때였다. 등으로 밤길을 밝히며 나아가던 에드는 후원에 다다랐을 즈음에 아까 작업하던 곳에서 옅은 불빛이 가볍게 흔들리는 걸 보았다.

뭐지? 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에드는 그곳에서 뜻밖의 인물을 마주하고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대공 전하.”

거의 완성된 여우 집을 불빛으로 비춰 보던 대공이 에드의 기척에 뒤로 돌았다.

“아, 에드.”

“이곳은 어쩐 일이세요? 밤이 깊었는데 방에서 쉬지 않으시고요.”

“제이논이 에드가 이곳에서 로아 집을 만든다고 하기에 한 번 와 봤어. 도울 게 있으면 도우려고 했는데 벌써 거의 다 끝난 거 같네.”

대공이 여우 집을 다시 한번 살피며 하는 말에 에드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런데 전하의 목소리에 어쩐지 힘이 없는 것 같지 않아?’

“낮에 이르텔과 텐스가 와서 집 만드는 걸 도와줬습니다. 아마 저랑 도련님만 있었다면 아직도 재료 준비만 하고 있었을 거예요.”

“에드야말로 여긴 왜 또 온 거야? 집은 거의 완성된 것 같은데.”

“도련님께서 로아 집에 대한 기대가 크셔서요. 조금이라도 빨리 완성해 드리고 싶어서 나와 봤습니다.”

에드의 대답에 한결 표정이 밝아진 대공이 그의 손을 붙잡아 왔다.

“대공 전하?”

갑작스러운 대공과의 접촉에 에드는 어쩐지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에드는 대공에게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대공은 그런 에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밝게 웃었다.

“그럼 내가 에드를 도와줘도 될까? 아까 오후 일정 때문에 이곳에 올 수 없던 게 아쉬웠거든.”

에드는 잡힌 손에서 느껴지는 대공의 뜨거운 체온에 정신이 팔려 평소처럼 괜찮다고 답하는 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이내 제가 대공의 물음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깨닫고 멍하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허락한 거지, 에드? 자 그럼 뭐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대공은 에드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재가 쌓인 곳으로 가더니 이것저것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아직도 멍하니 저에게 잡혔던 손목을 매만지는 에드에게 다가와 살며시 웃으며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에드 선생님,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 * *

도도도.

“에드, 에드!”

새벽 일찍 로넨이 밝게 상기된 표정을 하고 에드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 소란에 고작 몇 시간밖에 자지 못했던 에드가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음…… 잘 주무셨나요, 도련님?”

“응, 에드도 잘 잤어? 아, 아니야. 그보다 에드, 로아의 집에 어제 요정이 다녀갔나 봐.”

에드는 아침부터 로넨이 재미있는 꿈이라도 꾼 건가, 하고 생각하며 멍하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요정이라니 저도 꼭 한번 보고 싶네요. 그런데 아침은 드신 거예요? 옷은 또 왜 이렇게 얇게 입으셨어요. 밖이 아직 추우니 방에서 나오실 때는 조금 더 단단하게 입으셔야죠.”

로넨은 에드가 제 말을 안 믿어 준다고 생각했는지 발을 동동 구르다 그의 손을 잡았다.

“아이참, 밥도 먹었고 옷은 다음에 더 따뜻하게 입을게. 그보다…….”

“도련님의 말이 맞아, 에드. 정말 로아의 집에 요정이 왔다 갔나 보더라고.”

텐스가 살짝 열려 있던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며 로넨의 말을 증언했다. 에드는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텐스를 올려다보았다.

“도련님이 아침 일찍부터 로아의 집을 완성하고 싶다고 하셔서 내가 이르텔과 함께 갔거든? 근데 벌써 집이랑 울타리가 다 완성되어 있더라고.”

“…….”

“어제 이르텔이 천장까지 다 만들지 못했다고 했는데 말이야. 분명 한두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작업량이 아니거든. 그러니 이건 분명 요정의 짓이 확실해.”

이어지는 텐스의 말을 듣고 에드는 아직 남아 있던 졸음기가 확 가시는 걸 느꼈다. 어제 대공과 자신이 함께 작업한 걸 보고 로넨이 요정이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서였다.

“어…… 에드 얼굴이 빨간데 괜찮아?”

로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에드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텐스, 큰일 났어! 에드의 얼굴이 너무 뜨거워. 어제 일이 힘들어서 감기라도 걸린 거 아닐까?”

텐스는 에드의 반응을 보고 정확히 무슨 일이 난 건지는 몰라도 그와 연관된 사건이라는 건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게요, 도련님. 정말 일이 힘들어서 감기라도 걸린 게 아닐까 걱정되네요. 어젯밤 바람도 오후보다 서늘했으니까요.”

에드는 텐스의 입에서 나온 어젯밤이라는 단어에 다시 몸을 움찔했다.

무언가 알겠다는 듯 텐스는 가늘어진 눈으로 에드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방금 에드의 몸이 움찔한 걸 보니 정말 어디가 아픈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텐스가 턱을 손으로 쓸며 목소리를 쫙 내리깔자 로넨과 에드의 목울대가 동시에 꿀꺽 움직였다. 텐스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에드가 어제 저녁을 먹고 바로 방으로 올라갔는데 왜 감기에 걸린 걸까요? 전하의 명으로 사용인들의 방은 항상 따뜻하게 유지하고 있을 텐데 말이죠.”

“응, 응. 맞아.”

“만약 밖으로 나왔다 해도 어젯밤의 날씨는 적당히 서늘한 정도였을 텐데요. 몇 시간 동안이나 밖에 있지 않았다면……. 헉! 혹시…….”

텐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해하는 척했다. 그 모습에 지레 찔린 에드는 텐스의 입을 급히 막았다.

“텐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감기라뇨? 저는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한걸요?”

“하지만 에드의 얼굴 엄청 빨간데…….”

로넨의 말에 에드가 급히 일어나 세면대로 향했다. 거울을 보자 정말 그 말대로였다. 에드는 일부러 크게 말했다.

“텐스의 말대로 방이 너무 더워서 그런가 봐요. 아…… 오늘 너무 덥네요. 하하하, 찬물로 씻을까.”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사라지는 에드를 물끄러미 보던 로넨이 텐스에게 말했다.

“텐스, 새벽에 기온이 뚝 떨어져서 지금 성 곳곳에 고드름이 얼 정도로 춥지 않아?”

* * *

소란스러운 아침을 보낸 에드는 늦은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왔다.

“에드, 아침 식사가 늦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에드가 이상하다며 주치의를 불러야 한다고 방을 나가지 못하게 하는 로넨을 달래고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도련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공 전하께서 이미 이런 일을 대비해서 수도에서 먹었던 약보다 훨씬 좋은 걸 구비해 두셨습니다. 에드도 좋지? 식사 끝나면 바로 먹을 수 있게 말해 놓을게.〉

이 상황 자체가 재밌다는 듯 실실거리던 텐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방 안에서 나오지 못했겠지.

하지만 제 옆에 앉아 쓴 향이 물씬 풍기는 약재를 내려놓은 채 웃고 있는 텐스를 보고 있자니 그를 향해 고마운 마음을 담아 주먹을 툭, 내지르고 싶었다.

에드는 부주방장이 챙겨 준 따스한 수프를 떠먹으며 산만했던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때 텐스의 맞은편 의자가 뒤로 끌리더니 익숙한 한 사람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 제이논?”

“안녕, 에드.”

제이논이 거멓게 내려앉은 눈가를 긁적이다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오늘 나 좀 도와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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