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16화 (116/198)

“네, 신전을 오래 비우실 수 없는 대신관님만 먼저 출발하시고, 다른 신관분들은 일을 전부 마무리하신 후에 떠난다고 하셨어요.”

“그렇구나.”

혼잣말하듯이 작게 중얼거린 제이논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에드의 어깨를 톡, 치며 말했다.

“혹시 고민거리나 북부 성에서 지내면서 힘든 점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 줘.”

* * *

“좋아! 이걸로 끝!”

만년 일 중독인 에드는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새벽부터 북부 성에서 해야 할 일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도 남은 시간을 주체 못 하고 성 밖으로 나가 로넨과 함께 로아의 집 제작에도 참여했다.

“에드, 봐 봐. 천장을 이 정도 더 높이는 게 좋지 않을까?”

“천장을요?”

“응!”

에드는 로넨과 함께 제작한 설계도를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집을 만들어도 결국 로아는 로넨과 함께 잘 것 같은데.’

지금도 로아는 자신이 자는 방이 따로 있음에도 매번 몰래 빠져나와 로넨과 함께 자고 있었다. 도련님이야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로넨의 옷에 묻은 여우 털을 가볍게 떼어 내며 에드는 여우 집의 설계도를 분석했다.

‘뭐 만드는 데에 의의가 있는 거겠지.’

소매를 걷어 올린 에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터에 쌓인 나무를 살폈다. 로넨의 부탁으로 기사들이 크기대로 잘라 둔 나무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하루 만에 끝낼 수는 없겠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해 보자.’

생각보다 집 크기가 커서 언제 끝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지만, 우선은 로넨과 둘이 해 보고 안 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할 생각이었다.

에드는 빙의 전에 해 봤던 미니어처 제작 과정을 떠올리고 재료들을 분류했다. 그러자 에드의 행동 본 로넨 역시 쭈그려 앉아 낑낑거리며 나무 조각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련님, 무거우니까 의자에 앉아 계세요. 장갑도 안 끼시고! 손에 나무 가시라도 박히시면 어떻게 해요.”

“그럼, 도련님 말고 지나가던 기사의 도움은 어때?”

에드의 잔소리에 대한 답은 옆이 아니라 등 뒤에서 들려왔다. 어느새 나타난 이르텔이 그를 보며 듬직하게 서 있었다.

“아, 참고로 난 장갑 꼈다.”

“이르텔!”

로넨이 활짝 웃으며 그를 반기자 허리를 굽혀 꾸벅 인사한 이르텔이 그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땅바닥에 펼쳐진 그림을 내려다보며 옆에서 재잘거리는 로넨의 말에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이제 뭘 하면 되지?’

눈으로 묻는 이르텔에게 에드는 말했다.

“재료를 분류해 부족한 게 없는지 먼저 파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로넨 도련님. 전 이 설계도에 대해 잘 모르니까 어떻게 재료를 분류해야 할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알겠어! 에드, 내가 직접 만지고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 이건 괜찮지?”

둘을 번갈아 보던 에드가 못 말리겠다는 듯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련님. 대신 꼭 이르텔 경에게 부탁하셔야 해요?”

“응, 알았어!”

“일단 조그마한 것들은 에드에게 부탁하고…… 도련님, 바닥을 꾸밀 넓은 판자가 부족한 것 같은데 이걸로 판자를 더 만들까요?”

로넨을 내려놓고 어딘가로 향했던 이르텔이 단단한 철목을 들고 돌아왔다.

“파편이 튈 수 있으니까 조금 떨어져 있으셔야 합니다.”

그러더니 이르텔이 함께 들고 온 도끼를 나무에 박아 넣기 시작했다. 힘이 센 그가 한 번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나무가 널찍한 판자들로 바뀌고 있었다.

‘내가 했으면 종일 해야 했을 텐데.’

그 모습을 보며 감탄한 에드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재료가 실시간으로 준비되고 있었으니 이제는 터가 될 땅을 고르게 다져야 했다.

부스럭, 부스럭, 샤샤샥.

“도우미 등장!”

그때 풀숲에서 텐스가 불쑥 튀어나왔다.

“엇? 텐스.”

“에드의 영혼의 부름을 듣고 왔다!”

깜짝 놀란 에드가 어버버 거리는 동안 성큼성큼 다가온 텐스가 그의 손에서 삽을 뺏어갔다.

“어? 이리 주세요, 텐스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제가 할게요.”

“말했잖아, 에드. 난 방금 에드의 강한 부름을 듣고 왔다고. 아……지금 당장 땅을 다지지 않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밤에 한숨도 자지 못할 거야.”

방금 목소리 끝이 흔들리지 않았어?

에드는 이르텔에 이어 텐스까지 난입해 오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텐스를 생각한 적도 없는데 무슨 부름이에요. 그보다 텐스, 지금 힘들어서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은데 이리 주세요.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수풀에 있던 거예요.”

“난 에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아하하, 땅을 다지는 게 이렇게 재밌는 일이었을 줄이야. 고마워 에드. 나 이제 천직을 찾은 기분이야.”

으아아아, 기합 소리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텐스가 땅을 반듯하게 고르자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떨결에 하는 일을 전부 뺏긴 에드가 제 손을 내려다보는데 뒤에서 불쑥 찻잔이 내밀어졌다.

‘뭐지? 이건?’

눈을 깜빡인 에드가 뒤를 돌아보자 에린이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찻잔을 들고 서 있었다.

“에드, 부탁한 디저트랑 차 가져왔어.”

주방에 있어야 할 에린이 여기까지 온 것도 놀라운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런 감정을 다 날리고도 남았다.

“내가 차랑 디저트를 부탁했다고? 심지어 여기까지 가져다 달라고?”

“아 에드가 아니라 제…….”

“아! 그거!”

그때 텐스가 뒤에서 소리치며 에드 곁으로 달려왔다. 에드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텐스는 누가 부탁한 건지 아세요?”

텐스가 땅에 삽을 박고 손잡이에 기대더니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에드가 디저트를 먹고 싶어 하는 거 같아서 이곳에 오기 전에 내가 에린한테 부탁했어.”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는 텐스를 보며 에드가 의심스러워하며 쳐다보았다.

“텐스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죠.”

“아…… 아닌데!”

제 눈초리에 시선이 흔들리는 걸 보니 분명 뭔가 있다 생각한 에드가 그를 더 다그치려 할 때였다. 뒤쪽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감탄사가 들려왔다.

“와! 대단하다!”

이내 그들 곁으로 도도도 거리며 달려온 로넨이 텐스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텐스는 에드의 마음도 읽을 수 있구나. 그럼, 그럼 내 생각도 알 수 있어?”

에드는 그 순간 텐스의 눈동자에 빛이 반짝하는 걸 분명 봤다.

“물론이죠, 도련님.”

“정말?”

“네! 에드가 북부 성에서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죠! 아얏.”

그와 동시에 이르텔이 텐스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자 텐스가 입을 합, 하고 다물었다.

에드가 그런 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이르텔이 시선을 돌리며 로넨에게 말했다.

“목 좀 축이고 다시 할까요, 도련님?”

차를 마시는 동안 에드는 몇 번이고 텐스에게 말을 붙이려고 했지만, 그는 요령 좋게 빠져나갔다.

〈아이쿠, 도련님. 차가 입에 잘 맞지 않으신가 봅니다. 제가 우유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아, 에드. 뭐라고 했지? 제대로 듣지 못했어. 식당에 다녀와서 마저 들을 테니까 잠시만!〉

〈앗! 저기에 나무가 떨어져 있네! 잠깐만, 에드. 저런 건 바로 치우지 않으면 누가 다칠 수도 있어. 에드는 로넨 도련님과 먼저 가!〉

〈헉,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대신관님 배웅을 위해서 나는 마차를 점검해야 하니까 먼저 가 볼게. 에드, 나머지 이야기는 이따가 하자고!〉

결국 헤어질 때까지 에드를 피하는 데 성공한 텐스는 왔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홀연히 자취를 감춘 그의 빈자리에 에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텐스와 나눈 대화는 하나도 없잖아?’

* * *

텐스가 떠나고도 한참 일을 돕던 이르텔이 시계를 한 번 슥 보더니 손을 털고 일어났다.

“에드, 도련님을 모시고 시간에 맞춰서 입구로 나오도록 해.”

“네, 알겠어요.”

에드는 로넨과 함께 방으로 올라갔다. 그 후 톱밥이 묻은 로넨의 머리를 조심스레 털 고 빗으로 빗어 넘긴 뒤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혔다.

“다 됐습니다, 도련님.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응, 없어! 에드.”

그리고 북부 성 입구에 나가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대신관이 대공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 노구가 북부 성 사람들을 괜히 번거롭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대신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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