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형이 말하고 있으니까.”
로넨이 로아를 달래는 사이 에드는 고개를 돌렸다. 단상 위에서는 대공의 축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에드는 조명에 반짝거리는 대공을 멍하니 쳐다보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진행된 모든 파티가 끝났을 때는 깊은 밤이었다.
“에드.”
대공은 자선 행사가 이어지는 곳으로 향하기 전에 에드를 불러 세웠다.
로넨을 방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대연회장을 나서던 에드는 곁에 있던 제이논에게 그 일을 맡기고 대공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네, 대공 전하.”
“아까 안 보이던데, 잠깐 밖에 나갔다 왔다고?”
“네, 더워서 바람을 쐬러 나갔단 온 길이었습니다.”
“그렇군.”
작게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말을 이었다.
“에드는 이제 그만 방으로 올라가서 쉬도록 해. 그리고 내일은 연회에 참가한 사용인들에게 모두 휴가를 줬으니까 늦잠을 자도 괜찮아. 오늘 하루 정말 수고했어.”
“네,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밖으로 나서는 대공을 배웅한 에드는 모두가 빠져나간 대연회장을 다른 사용인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정리하고 방으로 올라왔다.
그 후 잘 준비까지 모두 마친 에드는 오늘 일을 정리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아, 글씨가 날림이네.”
수첩을 펼치자 보이는 것이 가관이었다.
어두운 곳에서 신관에게 배운 정보들을 빠르게 적어 나갔더니 글자가 엉망이었다. 연회장을 정리하느라 평소 책상에 앉았을 때보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일 하루는 휴식을 취할 수 있으니까.’
에드는 조금 고민하다 펜을 들었다.
‘분명 내일 되면 내가 뭐라고 썼는지 알아볼 수 없을 테니 지금 정리하자.’
그렇게 한창 약초에 대해 정리하던 에드는 아까 들은 신관의 제안을 떠올렸다.
“흐음, 남부랑 수도는 북부보다 물가가 비싸고…… 또 공부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 최소 반년은 걸릴 거라고 봐야겠지?”
다행히 비용은 지금까지 충분히 저축한 돈이 있었으니 상관없었다. 그보다는 북부를 비우는 기간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에드는 그게 끝내 마음에 걸렸다.
‘대공 전하의 병도 그렇고, 로넨 도련님도 아직은 옆에서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한데.’
조금 더 공부를 이어 나가고 싶다는 생각과 도움이 필요한 대공 형제 사이에서 고민하던 에드는 볼을 긁적이다 침대에 올랐다.
‘어쨌든 지금 당장 결정해야 할 문제는 아니니 조금 더 고민해 보자.’
* * *
다음 날, 모처럼 만의 휴가였음에도 에드의 일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몸을 쉬게 두면 안 된다며 대신관은 대공과 함께 북부 성 주민들을 살피러 나가고, 에드는 로넨과 성에 함께 남아 로아를 보살피고 있었다.
“으앗! 로아! 여기야! 여기!”
끼아아앙.
“아하하하, 에드도 거기 서 있지만 말고 이리 와.”
에드는 지칠 줄 모르는 아이와 털 뭉치를 한참 따라다니다 하얗게 불타 자리에 앉았다.
‘로넨의 활동량만으로도 벅찼는데 이제 여우까지 더해지다니……. 지금이라도 도망치는 게 맞지 않을까?’
테이블에 엎어져 앓는 소리를 흘리던 에드는 발밑으로 로아가 뛰어오자 무릎에 올리며 작게 웃었다.
‘하지만 이 귀여운 생명체를 두고 가긴 어딜 가겠어.’
그렇게 한참을 더 놀고 나서야 로넨이 로아의 먼지를 씻기겠다며 방으로 돌아가자 에드는 작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 가볍게 피로감을 해소한 에드는 언제 늘어져 있었냐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용인들의 일을 도왔다.
그 후로도 에드는 대공이 대신관과 북부 성으로 돌아왔을 때 마중을 나갔고, 저녁 식사 정리까지 마친 뒤에 방에 돌아왔다.
휴가였지만 휴가 같지 않았던 하루를 마무리 짓고 에드가 방에서 쉬려고 할 때였다. 똑, 똑 노크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어? 제이논.”
문을 열자 방문 앞에는 제이논이 서 있었다.
“자려고 하는데 방해한 건 아니지?”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제이논이 하품을 작게 하며 말했다.
“내일 대신관님께서 신전으로 돌아가실 때 배웅을 해야 하잖아. 그때 에드가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는데, 괜찮으면 내 방으로 올라가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아, 네. 잠시만요.”
에드는 책상 위에 올려 뒀던 수첩과 만년필을 챙겨 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제이논을 따라 들어선 방은 여전했다. 어딘가 어수선해 보였지만 그럼에도 질서가 잡혀 있었다. 발로 바닥에 놓인 물건들을 툭, 툭 치우며 테이블에 에드를 앉힌 제이논이 빠르게 할 일들을 정리해 나갔다.
“……이 중에서 에드가 할 일은 이것들이거든? 내일 아침까지만 고생 좀 해 줘. 이번 행사 끝나면 당분간 북부 성에 큰일은 없으니까.”
에드가 해야 할 일을 수첩에 꼼꼼하게 적은 후 제이논에게 다시 한번 확인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에드. 그렇게 하면 돼.”
“네, 알겠어요. 제이논.”
에드가 수첩에 만년필을 껴 놓고 표지를 덮자 제이논이 손을 뒤로 짚으며 피로한 눈을 깜빡였다.
“에드, 시원하게 맥주 한잔하지 않을래?”
북부는 이제 완연한 늦가을로 접어들었지만, 쉴 새 없이 움직인 제이논은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에드는 가볍게 손부채질하는 제이논을 보며 그의 말동무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주방에서 가져올게요.”
“아냐, 여기에 앉아 있어. 내가 맛있는 안주도 챙겨 올 테니까.”
냉큼 자리에서 일어난 제이논이 방을 나서자 에드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난로를 살피다 장작을 조금 더 넣을 때, 제이논이 먹을거리를 챙겨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 맥주가 맛있게 잘 만들어졌다고 주방장님이 엄청나게 자랑하시더라.”
제이논이 맥주를 따르며 하는 말에 에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맥주를 마시다 보니 제법 시간이 흘렀다. 에드는 다시 작게 하품을 하는 제이논에게 말했다.
“제이논, 피곤해 보이는데 이제 잠자리에 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응,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한 일도 없건만 왜 이렇게 피곤하지?”
“한 일이 없긴요. 오늘만 해도 제이논은 전하와 함께 북부 성을 2바퀴는 넘게 돌았을걸요?”
“흐흐흐, 그건 그래.”
에드가 트레이에 컵과 그릇을 정리하자 제이논이 말렸다.
“내가 치울게.”
“아뇨, 제가 방으로 내려가는 길에 주방에 들르면 되니까 제이논은 어서 잘 준비해요.”
“고마워, 에드.”
에드는 옅게 웃으며 트레이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나도 제이논에게 옮았나.’
서늘한 복도를 걸으며 하품을 길게 한 에드는 주방에 트레이를 갖다 놓고 방으로 올라왔다. 다른 걸 살필 겨를도 없이 침대에 누웠다.
‘맥주 한 잔도 안 마셨는데 이렇게 졸음이 쏟아지다니.’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리기도 전에 스르륵 잠이 든 에드는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다가 주머니가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제이논의 방에 수첩을 놓고 왔구나.”
지난밤 시간이 너무 늦어 그대로 잠들었던 에드는 아침이 되자마자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제이논의 방으로 올라갔다.
‘제이논이 벌써 준비를 마치고 나간 건 아니겠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거라고 떵떵거리던 제이논의 모습을 떠올린 에드는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볼을 긁적거렸다.
에드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것이지만 원작에서 제이논은 어떤 때라도 대공의 일정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철인으로 묘사되었으니 이미 방을 나섰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제이논의 방문 앞을 기웃거리던 에드는 다행히 방문 틈새로 불빛이 비치는 걸 보고 노크했다. 그 기척에 제이논이 빠르게 방문을 열었다.
“아, 에드.”
“안녕하세요, 제이논. 다행히 아직 방에 있었네요.”
잘 자고 일어났는지 제이논의 얼굴은 어제보다 밝아 보였지만 어쩐지 에드를 보고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이제 막 나가려던 참이었어. 근데 이렇게 일찍부터 웬일이야?”
“아, 제가 어제 방에 물건을 두고 간 거 같아서요.”
에드가 방문 틈으로 시선을 움직이며 물건을 찾자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은 제이논이 책상 위에 놓인 수첩을 가지고 왔다.
“이거 말하는 거 맞지?”
“맞아요! 혹시 여기 없으면 복도를 다시 살펴봐야 하는 건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어요.”
“어제 놓고 가서 내가 잘 가지고 있었지. 아! 나 이제 나가봐야 해서 먼저 가 볼게. 어제 말한 일들 잘 부탁해.”
수첩을 소중하게 받아드는 에드를 물끄러미 보던 제이논이 시계를 힐끗 확인하더니 급히 방 밖으로 나왔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어…….”
그런데 금방이라도 계단을 뛰어 내려갈 것 같았던 제이논이 다시 뒤로 돌더니 입을 열었다.
“참, 에드.”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던 에드가 그 소리에 제이논을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걸까?’
당장이라도 뭔갈 말하려던 제이논의 시선이 에드의 손에 들린 수첩에 닿아 떨어지지 않았다. 에드는 그 시선에 의아함을 느꼈다.
“……오늘 신관분들 모두가 가는 게 아니라 대신관님만 먼저 몇몇 분들과 함께 떠나시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