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10화 (110/198)

에드는 햇볕에 반짝이는 로넨의 머리카락을 보며 새삼 느꼈다.

‘처음에는 로넨이 친형만 무사히 만나면 바로 도망을 치자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어?”

그때 주위를 둘러보던 로넨이 놀라더니 살짝살짝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는 무언가를 숨기는 게 뻔히 보였지만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에드는 부러 알은체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으며 상념을 이어 나갔다.

‘로넨이 어른이 될 때까지 여기 있으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지.’

하지만 짐짓 모른 척을 하는 에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넨은 쭈뼛거리다 결국 걸음을 멈췄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거지?’

에드가 로넨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풀숲에 뾰족 튀어나온 갈색 귀를 볼 수 있었다.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집중해서 보자 쫑긋쫑긋 움직이는 것이…… 저거, 아무래도 여우 귀인 것 같았다.

‘혹시 산속에서 만났던 여우인 걸까?’

고개를 살짝 기울인 에드가 수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로넨이 마주 잡은 손을 크게 흔들며 말했다.

“에드.”

“네, 도련님.”

“야생동물과 정을 붙이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조금만 놀면 안 될까?”

그에 에드는 확실히 깨달았다.

‘어제 치료해 준 여우가 맞는구나.’

에드는 시무룩한 로넨의 모습을 내려다보다가 치료소 쪽을 흘낏, 곁눈질했다.

“음, 그럼 잠깐 인사만 하는 건 어떨까요?”

“정말?”

“네, 여우가 어제 도와준 게 고마워서 찾아온 것 같으니 잠깐 보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그 후로도 계속 찾아오면 제가 대공 전하께 여우에 대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로넨이 에드를 잡아끌었다. 떡갈나무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 귀만 움직거리던 여우가 로넨의 기척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위를 휙휙 둘러보던 로넨이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저를 보고 있는 여우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를 지켜보던 에드도 로넨의 곁에 앉자 여우가 반가움에 꼬리를 살랑이며 몸을 일으켰다.

“아픈 데는 다 나았어?”

고개를 기울여 여우의 다리를 살펴본 로넨이 묻자 여우가 마치 말을 알아들은 듯이 앞발로 땅을 가볍게 파헤쳤다. 잔망스러운 그 모습에 로넨이 작게 웃자 여우가 으헷헷헷, 하고 또 묘한 소리를 내었다.

‘저 울음소리가 기분이 좋을 때 내는 건가 보구나.’

에드는 로넨과 여우가 교감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다 제게로 다가온 여우가 다리 사이에 몸을 가볍게 비비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덧그려졌다.

부드러운 털이 바지에 가볍게 스치다 떨어졌고, 여우는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는 듯이 고개를 들이댔다.

에드가 손으로 여우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리자 여우의 귀가 뒤로 늘어지며 목 안에서 작게 그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더 쓰다듬어 달라며 여우가 에드의 손에 머리를 비비자 손바닥이 간질거리며 기분 좋은 느낌이 났다.

‘마치 아란의 털을 쓰다듬었을 때처럼 기분이 좋네.’

에드가 복슬복슬한 작은 여우의 온몸을 한참을 쓸어내리자 로넨이 에드와 여우를 번갈아 보다가 웃었다.

“여우도 우리랑 같이 있어서 즐거운가 봐.”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걸 보니 무리랑 오래전에 헤어지고 혼자 지냈나 봐요.”

“아까 형이 여우를 경계했던 건 이 애가 에드를 물까 봐 그런 거였는데, 괜한 걱정이었네.”

“대공 전하께서 그러셨어요?”

“응, 그런데 형이 여우를 붙잡고 에드가 있는 천막에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건 조금 재밌었어.”

“대공 전하께서 여우를 붙잡고 설명하셨다고요?”

“어, 작고 어리지만, 야생동물이라 가볍게 물어도 에드가 다칠 수 있다면서.”

에드는 여우를 붙잡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대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손을 멈췄다. 그러자 여우가 으헷헷헷 웃으며 폴짝폴짝 뛰었다. 빨리 또 저를 쓰다듬어 달라는 듯한 요청에 로넨이 얼른 손을 내밀었다. 여우를 몇 번 쓰다듬어 주다가 고개를 번쩍 들어 에드를 바라보았다.

“아, 맞다! 여우가 밥은 먹었을까? 아침에 선물을 막사 앞에 갖다 놓느라 정작 여우는 쫄쫄 굶었을지도 몰라…….”

로넨이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손수건에 감싸진 열매를 바닥에 내려놓자 여우가 주둥이로 열매를 밀며 로넨과 에드 앞에 도로 갖다 놓았다.

로넨이 그를 다시 여우에게 내밀며 말했다.

“여우야, 우린 이미 배부르니까 네가 먹어. 물고기도 잡느라 힘들었을 텐데.”

“물고기는 어떻게 잡았을까요? 어려서 아직 사냥에 익숙하지 않을 텐데요.”

“응, 그러니까 신기해. 어떻게 이렇게 작은 몸으로 사냥했는지.”

로넨은 기특하다는 듯이 여우의 앞발을 토닥토닥 두드렸고 여우는 혀로 로넨의 손등을 가볍게 핥았다.

“아하하, 간지러워.”

그때 대신관과 함께 치료소 밖으로 나오던 대공은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있는 로넨과 에드를 보았다. 치료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풀숲에 둘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대공이 조용히 움직여 다가가 보니 둘이 새끼 여우 한 마리를 앞에 두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침에 에드의 막사 앞에서 본 그 여우였다.

“하하, 어제 우리가 도움을 준 녀석이 여기까지 놀러 왔나 보네.”

대공의 뒤를 따른 대신관이 인자하게 웃으며 말하자 그를 발견한 로넨이 아앗, 하며 일어났다. 여우가 대공을 올려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에드의 그림자 뒤로 숨었다.

“어젯밤 다리를 다쳐 치료해 줬는데 착하게도 선물을 가지고 왔더라고요.”

에드의 말에 대공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정은 로넨에게 들어서 그도 알고 있었다.

‘작은 여우기도 하고 행동에서 에드와 로넨을 좋아하는 게 보여. 위험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대공은 어쩐지 마음이 가라앉았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마음이 복잡한 것이 생경하면서도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에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동물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로넨을 잘 돌봤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특별한 취급을 받는 에드를 보며 뚱한 모습을 보이는 부하들이 더러 있었지만, 에드는 다정한 성격과 빠릿빠릿한 일 처리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덕분에 1년도 안 지났음에도 북부 성에서 에드를 경계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은 없었고 다들 밝게 뛰어다니는 그를 좋아했다.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낯선 이에게 자신의 곁을 잘 내어 주지 않는 아란도 에드에게는 쉽게 호의를 보이며 장난을 쳤고, 저 어린 여우도 에드를 좋아해 안달인 것이 눈에 보였다.

가볍게 팔을 두드리던 대공의 손가락이 문득 멎었다. 그의 표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에드에게 닿은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대공은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었다. 만약에 에드에게 심술궂게 구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날 테고, 다른 사람이 그에게 악심을 품은 것을 느낀다면 그가 먼저 나설 것이 분명했다.

만약 에드에게 곤란한 일이 생긴다면 그들이 나서서 도와줄 테니, 에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는데…….

아침에 여우를 쫓아낸 것도 혹시라도 에드를 물면 어쩌나 걱정스럽고, 늦게 잠든 그를 건드려 깨울까 봐 쫓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그것과는 또 다른 종류였다.

‘이 감정들은 로넨을 볼 때랑 달라.’

에드를 둘러싼 환경들이 문제가 아니라 에드의 올곧은 시선이 오로지 나에게 닿았으면 하는…….

대공은 살짝 흐트러졌던 자세를 바로 했다. 반듯한 시선이 에드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명쾌하게 딱 떨어지지 못하는 생각에 대공은 미간을 찌푸리다 곧 고개를 저었다.

“…….”

선선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우에게서 시선을 뗀 대공은 에드를 바라보았다. 지난밤 자다가 중간에 깼다기에 막사 안을 조용히 유지했더니 잘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얼굴이 말갰다.

에드의 뒤에서 고개를 빠끔 내민 여우가 대공과 시선을 마주치자 에드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저를 쫓아내지 말라고 그러는 것이겠지.’

아까 자신이 잡아 주의를 줄 때는 낑낑거리느라 바쁘더니 에드에게는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확연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어려도 여우는 여우인 건지 어딜 어떻게 붙어야 하는지 아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로넨이 킥킥 웃으며 즐거워하자 대공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좋아하니 어쩔 수 없긴 하군.”

그러자 대공의 옆에 선 대신관이 옅게 웃었다.

“어제 보니 야생성도 아직 자라나기 전인 새끼 여우라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공자님과 에드가 저리 좋아하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대신관은 인자한 시선으로 로넨과 에드를 내려다보았다. 대공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관이 그렇게 말하니 괜찮겠지. 그나저나 북부에 온 뒤로 계속 사람들을 치료하느라 고생하는데 식사까지 제대로 대접하지 못해 미안하군.”

“아닙니다, 대공 전하. 이 노구야 그런 거창한 행사보다는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 볼 수 있는 지금이 더 좋습니다.”

대공의 시선이 벗어나자 로넨에게 다가가 겅중겅중 뛰는 여우를 내려다보던 에드는 대공과 대신관이 나누는 대화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북부에 오시자마자 쉬지도 못하시고 바로 사람을 돕고 계시구나.’

본래 북부 성에 도착한 신관들은 피해 지역에 와서 사람들을 돕는 게 아닌 대공 전하의 환대를 받을 예정이었다.

대신관과 일반 신관들 역시 그 일정을 알고 있었음에도 환대 대신 로넨의 부탁에 이렇게 기꺼이 피해 지역에서 고생하고 있었다.

에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가늠하다가 대공과 대신관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뗐다.

“저, 대공 전하. 괜찮으시다면 식사 시간을 조금만 더 뒤로 미룰 수 있을까요?”

에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공은 무언가 기대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식사 시간을 조금 더 뒤로 미뤄도 괜찮겠나?”

대신관 역시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안 그래도 이른 아침에 먹은 게 소화가 덜 되었는데 도리어 잘 되었습니다.”

“그럼, 제가 점심 식사를 돕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될까요?”

“에드가?”

에드는 오랜 여정으로 지치고 힘들었을 텐데, 흔쾌히 로넨의 부탁을 들어준 대신관에게 개인적으로나마 조그마한 성의를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제가 살던 곳에서 자주 먹던 요리를 이번 식사 때 맛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이곳 요리는 할 줄 모르지만, 한국 자취생의 요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까. 다행히 재료도 비슷하고.’

그렇다고 너무 시간이 걸리면 기다리는 사람이 힘드니까 감자전이나 감자탕 정도를 할 생각이었다.

북부의 감자는 포슬포슬하고 담백한 게 한국과 비슷했고, 고기 역시 넉넉히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역시 추울 때는 뜨거운 국물이 최고지!’

에드가 머릿속으로 음식들을 생각하며 옅게 웃자 대공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과 대신관의 허락을 받은 에드는 서둘러 요리를 준비 중인 천막으로 걸어가며 수첩을 꺼내 들었다.

‘감자전이야 이곳에도 채칼이 있으니까 그걸 쓰면 되겠다. 감자탕은…… 저번에 다 같이 식사했을 때 먹은 스튜도 약간 고춧가루가 들어간 것처럼 매콤했어. 분명 물어보면 그거랑 비슷한 조미료를 알려 줄 테니 그걸 사용하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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