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09화 (109/198)
  • 그리고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대신관님이 말한 대가는 나와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높아! 그렇지 않았다면 대공 전하의 손을 잡은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리 없잖아?’

    한결 편해진 기분으로 결론을 내린 에드는 대공을 곁눈질했다.

    ‘……아무 데나 굴러다니는 돌만 눈에 띄어도 대공 전하가 생각나더니 이렇게 직접 보니까.’

    에드는 가슴 한편이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작게 숨을 들이켜며 대공이 건넨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시자 속이 따스하게 데워졌다.

    ‘그런데 대공 전하께서는 왜 아직 안 주무시고 밖에 나와 계신 거지? 불침번은 일반 기사들이 서는 걸로 알고 있는데.’

    평소와 다르게 조금 깊어진 눈매로 모닥불을 응시하는 대공의 시선에 에드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대공 전하께서도 고민거리가 있어서 기사 대신 불침번을 서며 밖에 계속 계셨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내게라도 털어놓으시면 좋을 텐데…… 여기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이르텔 경이나 제이논이었다면 넌지시 운이라도 떼셨을지 몰라.

    머릿속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갈래 끝에 에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마침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떠올랐다.

    “대공 전하, 이따가 제가 잠자리를 살펴봐 드릴까요?”

    불침번을 마치면 대공의 뒤를 따라붙어 시중을 들겠다는 에드의 말에 대공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에드.”

    “네, 대공 전하.”

    “중간에 잠이 깨서 피곤하지 않아?”

    “한숨 자고 나서 그런지 그렇게 피곤하진 않은데요.”

    “그렇다 해도 에드, 스스로를 더 살피면 좋겠어.”

    “저 스스로를요?”

    이미 북부 성에서 분에 넘치게 잘 먹고 잘 자고 잘 지내고 있는데요, 그런 대답을 하려는데 대공의 손이 에드의 머리에 닿는 게 더 빨랐다.

    “그래, 그랬으면 해.”

    “…….”

    가볍게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사라지는 손길에 에드는 조금 더 그 온기가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다음 날 오전에 눈을 뜬 에드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막사 안은 커튼을 친 방처럼 어두웠으나 밖에서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사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이건 치료소로 갖다 두면 되나?”

    “어, 아까 대신관님이 말한 초소로 가져다 놔.”

    “바닥에 놓인 상자들도 수레에 실어. 구호 물품이라서 한꺼번에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아.”

    “알았어. 그런데 제법 무거운데?”

    “대공 전하께서 모포와 건식을 더 넣으셔서 무게가 늘어난 것 같아. 조심해서 옮기자고.”

    “그래, 그러니까 너도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밖에서 티격태격하며 들리는 소리에 에드가 막사 문을 열고 나가자 볕에 눈이 부셨다.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환한 바깥을 살펴보다가 생각했다.

    ‘천막 안에 소음이 들리지 않도록 마도구를 놔둔 모양이구나.’

    아마도 지난밤에 꿈 때문에 깼다는 자신의 말 때문에 대공이 손을 쓴 것 같았다. 그러니까 해가 중천에 떠도 모르고 푹 잤다가 마도구의 유효 시간이 끝나자 잠에서 깬 거겠지.

    ‘아니, 그래도 너무 정신없이 잤는데.’

    〈어서 들어가서 자, 에드. 이번에는 중간에 깨지 말고.〉

    마치 그 말이 마법처럼 스민 것처럼.

    막사 앞까지 자신을 데려다준 대공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해 주다 손을 떼자 에드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공 전하께서도 편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 에드도.〉

    바로 이 막사 앞에서 등을 돌린 대공을 상기하던 에드는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어? 에드. 일어났어?”

    “잘 잤어, 에드?”

    북부의 기사들이 짐을 운반하다가 막사 밖으로 나온 에드를 발견하고 가볍게 인사를 해 왔다.

    “아, 네. 안녕하세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대공의 잔상을 지워 낸 에드가 수레 앞으로 빠르게 다가가 뭐 도울 일 없을까? 하고 기웃거리자 기사들이 웃었다.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니 괜찮다고, 에드.”

    “구호 물품도 다 나눠 준 건가요?”

    “어, 이제 이 수레 하나만 운반하면 돼.”

    “맞아, 맞아. 그러니 그렇게 목을 빼고 뭐 도울 일 없을까 살피지 않아도 된다고.”

    에드는 계면쩍었다. 모두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저만 이렇게 세상모르고 잔 건가 싶어져 뺨이 달아올랐다. 쭈뼛거리는 에드를 보며 기사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새벽까지 대공 전하와 불침번을 섰으니 늦게 일어난 것도 아니야, 에드.”

    “참, 그러고 보니 아까 로넨 도련님이 에드를 찾았는데.”

    “로넨 도련님께서요?”

    “어, 막사 앞까지 오셨다가 발길을 돌리시더라고.”

    “급한 용무가 있으셨던 걸까요?”

    “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드는 기사들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서둘러 로넨을 찾아 나섰다. 어디에 계시려나, 주위를 둘러보다 로넨이 지난밤 지냈던 막사 근처로 발길을 옮겼다.

    “아! 에드!”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드를 발견한 로넨이 뛰어오자 에드는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도련님,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

    작게 고개를 끄덕인 로넨이 손에 든 작은 나무 열매를 내보였다. 에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이게 뭔가요?”

    “오늘 자고 일어났더니 내 천막 앞에 이 붉은 열매와 작은 물고기가 놓여 있는 거야.”

    “네.”

    “처음엔 뭐지? 했거든. 그런데 막사 옆 풀숲에서 스스슥 소리가 나는 거 있지?”

    “소리가요?”

    “어. 그래서 살금살금 가 봤더니, 어제 우리가 작은 여우를 구해 줬잖아?”

    “네.”

    “그 여우가 가져온 건가 봐. 여우가 풀숲에 엎드려 있다가 내가 보이자 폴짝 뛰더라고. 자세히 보니까 주둥이랑 앞발에 열매 물도 들어 있어서 눈치챘지.”

    아, 하며 에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어제 자신을 구해준 것이 고마워 보답한 모양입니다.”

    “응, 그런가 봐. 한참을 내 곁에 머무르기에 더 놀까 싶었는데, 대신관님 말씀이 떠올라서 어서 가라고 손짓했어. 그러니까 그제야 겅중겅중 뛰어갔어.”

    “네.”

    “그런데 여우가 뛰어간 곳이 숲 쪽이 아니라 에드의 막사 쪽인 거야. 그래서 나도 뒤따랐거든. 에드의 막사에도 이런 게 놓여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로넨의 말에 에드는 옅게 미소 지었다. 작은 여우와 로넨이 교감하는 모습이 상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가 자고 있어서 발걸음을 돌리신 거였군요. 그냥 깨우시지 그러셨어요.”

    “응, 그런데 형이 에드가 피곤할 거라면서 깨우지 말자고 그랬어.”

    “……형, 이라면 대공 전하께서요?”

    “응, 형이 일어나서 치료소 주위를 살피다가 여우가 나타나서 그런지 조금 예민해진 것 같았어. 혹시나 에드의 막사에 들어갈까 봐 경계하면서.”

    “…….”

    “그래서 내가 사정을 설명하니까 그냥 포획하기만 했는데 어리고 위험해 보이지 않아도 여우는 여우라면서 저 풀숲 쪽으로 데려갔어.”

    에드는 로넨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대공 전하께서도 어제 늦게 주무셔서 피곤하셨을 텐데, 나 때문에 편히 쉬시지도 못한 거 아닐까?’

    에드는 대공의 상태가 걱정이 되어서 로넨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대공 전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아시나요?”

    그러자 로넨이 치료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형? 형은 대신관님과 함께 있을 텐데.”

    “대신관님이요?”

    “응.”

    “그럼 잠시 대공 전하를 뵙고 올게요, 도련님.”

    로넨의 대답에 에드가 치료소로 발길을 옮기려 하자 로넨이 바로 뒤따랐다.

    “나도 갈래! 에드.”

    에드는 로넨이 손에 달랑달랑 쥔 열매를 내려다보다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 손수건에 열매를 놓고 부드럽게 감싼 뒤 건네자 로넨이 씨익 웃으며 자기 주머니에 쏘옥 집어넣었다.

    “고마워! 에드.”

    에드는 로넨이 잡아 오는 손길에 옅게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예전보다 확실히 손이 커졌네.’

    예전에는 한 손에 다 들어오고도 남았을 정도로 작고 말랐었는데, 지금은 살도 보기 좋게 올라 딱 기분 좋게 잡혀 왔다.

    ‘그러고 보니 빙의를 한 지도 시간이 제법 흘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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