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대신관의 얼굴 위로 숲의 어두운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
“신력을 사용하는 신관과 다르게 자신의 생명을 대신해서 타인의 상처를 치료하는 치료사가 말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갉아가며 상대방의 상처를 치료하다니.’
이내 궁금증이 치밀어 오른 에드 대신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그 능력은 자기 자신을 치료할 때는 아무런 해가 없는 건가요?”
“이 능력은 정확하게 물독에서 생명이라는 물을 나눠 주는 거라고 할 수 있네. 물독에서 퍼낸 물을 다시 물독에 부으면 그대로이듯 아무런 해가 없다네.”
로넨이 이후 내용이 궁금했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대신관을 보챘다.
“그래서요? 그래서 그 용은 어떻게 됐어요? 치료사 덕분에 다 나았나요?”
“네, 대공자님. 치료사의 능력, 그리고 그의 보살핌 때문에 용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눈을 떴습니다.”
“와, 그다음은요? 용이 치료사에게 고마워했나요?”
그와 동시에 대신관이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닙니다. 정신을 차린 용은 바로 치료사를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 * *
“움직이지 마세요. 다친 상처가 다시 터질 수도 있습니다.”
용은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며 제 옆에서 이상한 약재를 갈고 있는 희멀건 인간을 쳐다봤다.
-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정신을 차리시면 바로 무리하게 움직이실 것 같아 치료제에 마비약을 섞었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라고 말하는 듯한 치료사의 얼굴에 용은 무심코 “아, 그렇군.” 하고 답할 뻔하다가 이를 드러냈다.
- 정신을 잃은 상대방에게 비겁하게 약을 사용하다니, 이래서 인간은 상종할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 이렇게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엔 무얼 하려는 거지? 피라도 뽑을 셈이냐!
- 내가 정곡을 찔러 대답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어서 해독제를 써서 몸을 풀어라!
그 이후로도 용은 치료사에게 계속 말을 걸었지만,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낮과 밤을 지내는 동안 용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 너는 왜 나를 치료하기 위해 네가 가진 수명까지 사용한 거지? 저 신을 믿는 신관들조차 우리의 치료를 거부하고 있을 텐데.
그러나 여전히 치료사가 말이 없자 목청을 드높였다.
- 내 마비가 풀리면 이 마을 사람들을 네가 보는 앞에서 잡아먹겠다!
- 도대체 그 입은 언제 열리는 것이냐? 정신을 차리고 들었던 네 목소리가 이제는 가물가물할 지경이다! 아니, 정말 네가 말을 했었던 것인지조차 헷갈리는 것 같다! 납치라도 해야 그 무거운 입을 열 것이냐?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용의 투덜거림에 치료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용의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그 뒤로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OO입니다. 앞으로는 이름으로 불러 주십시오.”
갑작스러운 치료사의 말에 무심코 이름을 부르려던 용이 당황해 눈을 굴리며 발끈했다.
-누가 인간 따위를 이름으로 불러 줄 것 같으냐!
* * *
눈을 번쩍 뜬 에드는 막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밖은 아직 어둑한 밤이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눈꺼풀을 몇 번이나 깜빡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웬 이상한 꿈을 꾼 거지?’
막사 안은 어두웠고 밖에서는 이따금씩 옅은 불빛이 비쳤다가 사라졌다. 불침번을 서는 기사들이 발소리가 자잘하게 들리다 멀어졌다.
간이 침상에서 일어나 앉은 에드는 손을 뻗었다. 테이블에 놓인 램프를 켜며 가볍게 눈을 비볐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아까 대신관님이 해 주신 이야기 때문인가 보다.’
에드는 대신관이 전해 준 용에 대한 설화 때문에 유적지에서 미처 풀지 못한 궁금증을 몇 가지 해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민거리 하나가 끝나니 새로운 골칫덩이가 생겼다.
〈신력을 사용하는 신관과 다르게 자신의 생명을 대신해서 타인의 상처를 치료하는 치료사가 말입니다.〉
‘그럼 그 치료사와 내 능력의 대가 역시 비슷하다고 봐야 하려나?’
거기에서 출발한 추측은 자꾸만 크기를 키워 나갔다.
‘만약 수명이 준다면 능력을 한 번씩 쓸 때마다 얼마나 줄어드는 걸까? 막 몇 년씩 사라지고 그러는 걸까?’
막사에 돌아와서도, 로넨과 함께 식사를 할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대신관의 말이 에드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다 간신히 잠이 들었는데 그런 실감 나는 꿈까지 꾸다니, 마치 제가 이야기 속의 치료사가 된 듯했다.
“……흐음.”
가볍게 손바닥으로 뺨을 두드린 에드는 램프를 끄고 도로 침상에 누웠다.
‘자자.’
일단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자자. 그리고 일어나서 맑은 머리로 생각해 보는 거야.
하지만 한 번 깬 잠은 다시 쉽게 들지 않았고 에드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복잡했다.
‘만약 이 사실을 대공 전하께서 아시면 자책하실 게 분명한데…… 로넨 도련님께는 이 이야기를 비밀로 해 달라고 해야 하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고민에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는 침상 밖으로 나왔다. 팔짱을 낀 채 막사 안을 서성거리다가 아, 하고 중얼거렸다.
‘잠깐만, 그런데 이야기 속 치료사의 능력에 비해 내 능력은 너무 약하잖아? 그럼 대가 역시 훨씬 적지 않을까? 어쩌면 없을 수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치료되는 양이 다르니 소모되는 힘도 다를 게 분명했다. 혹은 그 치료사와 자신의 치유 방법이 완전히 다를 수도 있었고.
‘그러니까, 대공 전하를 돕는 정도로는 내 수명에 별 지장이 없을 게 분명해! 맞아, 나는 로넨 도련님이 결혼해서 손자까지 볼 때까지 살아야 하니까.’
머릿속에서 ‘허허’하고 웃고 있는 꼬부랑 할아버지까지 떠올린 에드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미리 걱정을 사서 할 필요는 없다고.’
어깨를 살짝 으쓱한 에드는 막사 밖으로 빠져나왔다. 답답하게 머리를 짓누르던 고민을 떨쳐 내자 선선한 바람을 들이켜고 싶었다.
‘그래도 대공 전하가 이 사실을 아시면 분명 치료를 안 받으실 텐데…… 역시 로넨 도련님께 이 이야기는 둘만의 비밀이라고 말해야겠다. 손가락을 꼭꼭 걸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막사 주위를 걷던 에드는 그 순간 어? 하고 놀랐다.
치료소 근처에 불침번을 하기 위해서 모닥불을 피워 놓은 곳에 누군가 홀로 앉아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대공이었다.
“대공 전하!”
작게 대공을 부른 에드는 빠르게 뛰어갔다. 불쏘시개를 들고 타들어 가는 장작을 툭툭 건드리던 대공이 고개를 들자 에드가 인사를 꾸벅했다.
“에드, 잠자리가 불편해? 야외에서 자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좀 적응하기 힘들지?”
“아, 아뇨.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머리 좀 식히러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밤공기가 아직 차니까 이쪽으로 와서 편히 앉아.”
대공은 불길이 잘 통해 따뜻한 자리를 에드에게 넘겨주며 옆으로 살짝 자리를 옮겼다.
“감사합니다, 전하.”
자리에 앉은 에드는 대공을 흘낏, 살폈다. 눈을 내리깐 채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대공의 모습에 살짝 고민한 에드는 입을 뗐다.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시선을 든 대공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아니.”
옅은 웃음기가 서린 대공의 얼굴에는 에드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려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에드는 그런 대공을 바라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참, 어제 대신관님께 신전에서 전해지는 설화에 대해 들었는데, 내용이 유적지에서 본 그림과 유사했습니다.”
대공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에 대한 설화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말이지?”
“네, 대공 전하께서도 들으셨습니까?”
“아니, 이전에 떨어졌던 유적지에 대해 수소문하다가 알게 됐어. 대신관도 비슷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군.”
에드는 대공의 얼굴을 살피며 생각했다. 하지만 대공의 기색을 다 읽을 수는 없어 에드는 입술에 잘근거렸다.
“그럼 그 치료사가 가진 능력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치료사?”
대공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반문하다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내가 아는 이야기는 치료사가 아닌 약초사였는데.”
“약초사요?”
에드는 대공의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응, 약초사가 다친 용을 치료하는 설화였거든.”
“아.”
“왜? 에드가 대신관에게 들은 이야기는 달라?”
“……아뇨, 비슷한 이야기였습니다. 사람에게 공격당해 다친 용을 보살피는 내용이었어요.”
“아마 대신전에는 건국 초기 때부터 쌓인 기록이 많으니 대신관도 설화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
“네, 도서관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이야기라 꽤 흥미가 가더라고요. 그 때문인지 꿈까지 꿨지 뭐예요?”
“꿈이라니, 무슨 꿈?”
쌀쌀한 밤바람에 대공이 에드에게 따뜻한 차가 담긴 컵을 넘기며 물었다. 에드는 작게 감사를 표하며 에둘러 답했다.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은 내용이었던지 정확히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요, 대충 용이 나왔다는 것만 어렴풋이 남은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잠이 깨어 밖으로 나온 거군.”
“네, 다시 자려고 누웠는데 어쩐지 뒤척이게 되어서요.”
에드는 대답하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이다 보니까 세세한 부분들에서 조금씩 다른 점이 있는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