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논에게는 이곳 사람들의 질서와 안전 유지를 부탁하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신관님. 장소가 좁아 혼란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치료소로 사용할 천막을 넉넉하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조용히 감사를 표한 대신관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밖에서 기웃거리며 막사 안쪽을 살피는 로넨과 그 뒤에 선 에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막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가 궁금한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들여다보는 로넨을 본 대신관이 웃으며 말했다.
“대공자님, 죄송하지만 대공자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밖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로넨이 에드와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서며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그럼 대공자님과 에드에게는 조금 힘들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치료 보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대신관의 부탁에 로넨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차게 대답했다.
“네, 얼마든지 맡겨 주세요. 대신관님!”
“그저 이 노부의 말동무를 겸해서 요청을 드린 것이니 너무 무리는 하지 마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대공자님?”
“네! 알겠어요, 대신관님.”
씩씩하게 대답하는 로넨에게 다시 한번 인자하게 웃어 준 대신관이 에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에드는 대기하는 환자를 살펴보고 상처의 경중에 따라 색을 남겨 주게나.”
에드는 대신관이 내미는 노트와 붓, 그리고 동그란 통을 받아 들며 물었다.
“상처의 경중에 따라 다른 색으로 표시하는 건가요?”
“위급한 환자를 구분해 두지 않으면 치료가 늦어질 수도 있으니, 이렇게 사람이 많을 때는 미리 정리를 해야 하네. 가벼운 경상은 다른 신관들도 치료가 가능하니 말일세. 부상의 중증도는 다른 신관이 파악해 줄 테고 에드는 그에 맞춰서 색을 칠하기만 하면 되니 너무 걱정은 말게.”
에드는 그제야 대신관의 말을 이해했다.
‘대신관님의 신력이 무한한 것도 아닌데 그에개만 환자가 몰리면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겠구나. 현대처럼 소독이 잘 되는 곳도 아니니 시간이 지날수록 감염 위험도 더 커질 테고…….’
에드는 저에게 중요한 일이 맡겨졌다는 걸 깨닫고 작게 심호흡을 했다. 에드의 어깨가 살짝 솟았다가 내려앉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대공이 잔잔하게 웃으며 긴장감이 드러난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도와주는 신관들이 자세히 알려 줄 테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에드.”
“……네, 훗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이번 기회에 잘 배워 두도록 하겠습니다.”
대공의 응원에 붓과 염료를 잘 갈무리한 에드는 한 신관의 인솔을 받으며 밖으로 나갔다.
“대신관님, 대공자님께서 앉으실 의자는 어디에 두면 될까요?”
“내 옆에 두면 좋을 것 같네.”
“네, 대신관님.”
치료소가 모습을 갖추자 대신관은 자신의 초소를 담당할 신관들에게 마지막 지시를 내리고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시작해봄세.”
* * *
환자들을 분류하는 곳으로 향하던 중 에드는 저를 인솔하는 신관에게 이것저것 유효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미미한 찰과상의 경우 신력을 사용하지 않고 약초를 이용해 치료할 예정입니다. 신력을 사용하면 상처가 더 빠르게 재생되지만, 몸의 기능을 끌어다 쓰는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는 게 건강에도 좋습니다.”
차분한 신관의 설명에 에드는 집중했다.
“미처 분류하지 못한 환자 중에 중상자가 있을지도 모르니 신력은 최대한 온전하게 남기는 편이 좋습니다. 약초는 산속에서라도 급하게 구할 수 있지만, 신력은 단기간에 보충할 수 없으니까요.”
이어지는 신관의 말에 에드가 눈을 빛냈다.
“혹시 급하게 상처 치료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가 따로 있을까요?”
“다양한 약초와 약재가 있지만, 대표적인 걸로는 뼈를 잘 붙게 해 주는 딱총나무가 있습니다. 생김새와 특징은 저 천막에 도착하면 하나씩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곳 북부에서도 구할 수 있는 약초가 있다면 의원을 만나기 어려운 북부 사람들의 생활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자 절로 의욕이 솟아올랐다.
“따뜻한 남부와 중부에 비해 북부는 기후와 환경이 많이 다른 데 구할 수 있는 약초가 있을까요?”
걱정스런 표정을 하는 에드를 보며 신관이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이곳에 올 때 곳곳에서 익숙한 약재들이 보였습니다. 치료가 끝나면 되도록 추운 지방에서도 잘 살아남는 종류들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신관의 도움을 받아 신전만의 독특한 노하우를 스펀지처럼 흡수하던 에드의 귓가에 조금씩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관은 에드에게 다시 한번 알렸다.
“아까 알려 드린 대로 약초만 써도 되는 경상자는 노란색, 일반 신관들의 신력만으로도 치료할 수 있는 환자들은 초록색, 중급 이상의 신관들의 도움이 필요한 중상자는 파란색으로 각각 환자의 몸과 그들의 이름이 적힌 노트에 표시 부탁드립니다. 몸에 묻은 색을 보고 기사분들과 시종분들이 해당 천막으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노트에까지 따로 표시해 두는 이유가 있나요?”
“경과에 따라 후속 조치가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해 두는 게 좋습니다. 차도에 따라 표시 색상을 바꿔서 다시 분류하는 거죠.”
에드는 노련함이 드러나는 신관의 말을 들으며 해당 과정을 수첩에 자세하게 적었다. 이걸 조금 더 공부해서 북부 성의 보고 시스템에 대입하면 업무 방식을 조금 더 체계적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성 내의 모든 시종인들의 보고를 집사장이 듣고 취합하여 대공 전하께 드리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하지만 신관이 환자를 분류하는 것처럼 보고 단계를 나누게 되면 간단한 보고나 처리는 제이논이나 이르텔에게 바로 전달해 전하와 집사장의 일을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대공 전하도 로넨 도련님과 놀 시간이 더 생기겠지!”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에드의 말에 깜짝 놀란 신관이 되물었다.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에 에드는 아, 하고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아……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어서 들어가죠!”
* * *
모닥불이 타오르는 벽난로 앞 의자에는 녹초가 된 에드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로넨이 그 옆에 앉아 어딘가 신나 보이는 표정을 하고 의자 밑으로 발을 흔들고 있었다.
“도련님……. 도련님은 괜찮으신가요?”
“응? 뭐가 괜찮아?”
여전히 기운이 넘쳐 보이는 로넨을 보며 에드는 아이들의 체력이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에드, 힘들어 보이는데 신관님을 모셔 올까?”
“아닙니다, 그냥 오랜만에 계속 움직였더니 조금 지친 거라서요. 쉬고 계신 신관님께 부탁드릴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이 노부가 살짝 봐주는 건 되려나.”
갑작스레 들려온 음성에 에드가 몸을 바로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천막 입구에는 대신관이 찻잔 두 개를 들고 들어서고 있었다.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허브차일세. 감기는 신력도 통하지 않는 무서운 질병이니 모쪼록 조심하세나.”
에드와 로넨의 앞에 차례대로 찻잔을 놓아 준 대신관이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대신관님.”
작게 고개를 끄덕인 대신관이 에드의 맞은편에 앉더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 말을 들어 보니 에드 자네도 사고에 휘말려서 다쳤다고 하던데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은 건가?”
“네, 괜찮습니다.”
에드가 자세를 바로하며 대신관의 손을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자 로넨이 활짝 웃으며 그의 팔을 끌어올려 그 위에 얹었다.
이 상황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던 에드는 제 손끝을 통해 흘러들어 오는 따뜻한 기운을 느끼고 움찔 몸을 떨었다.
“거부하지 말게. 외상은 없더라도 내상이 있을 수도 있으니.”
“대신관님께서 굳이 저 때문에 힘을 쓰실 필요는…….”
“쉿! 말을 하면 기껏 사용한 신력이 흐트러질 수 있네.”
손끝에서 시작된 따뜻한 기운은 몸 전체를 돌고는 머리를 오르더니 이내 사라졌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군. 피로감은 아마 사고로 인한 근육통과 충격이 남아 그런 것 같으니 대공 전하나 대공자님께서는 마음 놓아도 될 것 같구먼.”
이 모든 게 대공과 로넨이 꾸민 일이라는 걸 깨달은 에드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대신관은 그런 에드를 보다 의문이 생겼는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에드 자네 혹시 의사뿐만 아니라 다른 마법사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나?”
“네?”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에드가 대신관에게 의문을 표했다.
“분명 사고가 발생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자잘한 상처뿐만 아니라 내상까지 전부 치료된 상태네. 간단한 찰과상을 입었을 뿐인 주민들도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았는데 말이야. 이 부분이 조금 의문이 드는구먼.”
에드는 제 능력이 대신관에게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당시 대공 전하께서 워낙 잘 지켜 주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저 이외에도 결계 안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 다 멀쩡한 걸 보면 특별히 이상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골똘히 에드를 쳐다보던 대신관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능청을 떨었다.
“상처가 모두 나았다면 그 과정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나.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네. 늙으니 이것저것 심심해서 물어본 거니 신경 쓰지 말게.”
천막 밖으로 나가려는 대신관을 보며 에드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들리는 신관의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에드, 시간 괜찮다면 이 노부와 이곳 주변을 같이 산책하지 않겠나?”
“대신관님,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에드가 대답하기도 전에 로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대신관이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대공자님도 함께 나가시죠. 다만 밖이 아직 추우니 단단하게 입고 나오셔야 합니다.”
“에드, 나 외투 좀 입혀 줘.”
“하지만 도련님, 대신관님을 모시고 나가는 거니 평소처럼 뛰어노실 수 없어서 조금 지루하실 수도 있을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