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05화 (105/198)

“네,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고 푹 쉬도록 하게.”

모든 진찰을 마친 주치의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에드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주치의 선생님은 북부에서 태어나 줄곧 이곳에서 자랐다고 하셨죠?

“그렇네만.”

“북부의 상징이 왜 검은 용이 됐는지도 알고 계신가요?”

진료 도구를 챙기던 주치의가 에드를 바라보았다.

“음, 북부는 옛날부터 마물의 피해도 많이 받고 재해도 자주 일어나서 지금까지 멀쩡히 남은 고대의 기록이나 유적지가 거의 없다네. 그래서 내가 아는 것이라고 해 봤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는 이야기가 전부이지.”

“아.”

“하지만 이것도 이미 북부 역사서에 다 적힌 것들이라 도서관에서 찾아볼 수 있을 걸세. 다만, 물어본 검은 용에 대한 건 북부가 완전히 자리를 잡기도 전부터 정해진 상태여서 자세한 정보는 없는 걸로 알고 있네.”

주치의의 대답에 에드는 그가 보았던 고대 유적지의 벽화 이야기를 삼켰다. 그건 북부 사람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부분이라는 걸 주치의와의 대화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드는 도로 자리에 앉은 주치의가 꺼내는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옷을 추슬렀다.

* * *

지진이 발생한 후 며칠 동안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대공은 재해 현장을 복구하는 일에 집중했고, 에드는 로넨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대신전에서는 북부에 방문하는 일정을 앞당겼다. 본래 대신전을 나온 대신관과 신관들이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하는 때는 연초와 연말이었는데,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신관이 서둘러 북부에 오겠다며 연락했다.

“에드, 오늘 오후에 대신관님이 북부에 방문하시는 거잖아?”

“네, 도련님.”

“혹시 대신관님께 부탁 한 가지만 드릴 수 있을까?”

응접실에서 대신관에게 드릴 꽃다발을 정리하던 에드는 시선을 들었다.

“도련님, 대신관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으세요?”

“응, 형한테 부탁해도 되는 일인데 대신관님이 오신다고 해서…….”

“저도 같이 부탁드려 볼 테니 혹시 그 내용을 살짝 말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에드의 말에 아까 전보다 표정이 조금 밝아진 로넨이 입을 열었다.

“지진이 났을 때 다행히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은 형 때문에 무사했지만, 산속에 사는 동물들이랑 근처 주민들은 다쳤잖아…….”

아, 하고 작게 탄식을 내뱉은 에드는 로넨의 속 깊음에 마음속으로 감탄했다.

“알아보니 대신관님이 오실 때 다른 신관분들도 같이 온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분들에게 재난으로 피해 본 사람들의 치료를 부탁드리고 싶어. 사실 에드의 몸을 먼저 봐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오는 길에 보니 곳곳에 다친 사람들이 눈에 띄어서…… 미안해, 에드.”

에드는 대신관에게 드리기로 한 꽃다발을 로넨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제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도련님.”

에드는 자신의 말에도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을 한 로넨을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이것 보세요, 도련님. 원래도 작은 상처만 있었는데 주치의 선생님께서 잘 진찰해 주셔서 이렇게 다 나았는걸요?”

로넨은 에드가 소매를 걷어 보여 주는 팔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도련님은 대신관님께 북부 주민들의 치료를 부탁드려 보세요. 그때 보았던 분들이라면 틀림없이 도와주실 거예요.”

점심이 지난 늦은 오후, 북부의 기사들이 정복을 입은 채 성문 앞에 죽 늘어섰다. 멋지고 웅장한 모습이었다.

로넨과 함께 대신관이 탄 마차가 들어오길 기다리던 에드는 성문 앞에 선 대공을 바라보았다. 재해 현장 복구로 밤낮없이 일을 봐 피곤할 텐데도 그런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 늠름한 모습이었다.

“에드, 대신관님이 오셨나 봐.”

그때 발꿈치를 들고 밖을 내다보던 로넨이 한 손으로 들고 있던 꽃다발을 두 손으로 고쳐 안으며 말했다.

로넨의 말에 고개를 돌린 에드는 히이잉, 작게 말 울음소리를 흘리며 북부 성으로 들어오는 마차를 볼 수 있었다.

마중을 나간 이르텔을 필두로 몇 대의 마차가 성안으로 들어오자 대공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선두에 섰던 마차 문이 열리고 대신관이 내리자 반갑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대신관.”

“피해 지역을 복구하느라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어 이 노구를 환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공 전하.”

“일정을 조정해 북부에 방문하려면 신경을 쓸 게 많았을 텐데 이리 찾아와 줘서 나야말로 고맙군.”

“아닙니다, 대공 전하.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는데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더 빨리 오지 못해 죄송스럽지요. 그래도 오면서 구호 물품을 넉넉하게 챙겨 왔으니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랍니다, 전하.”

인사를 나누는 대공과 대신관을 뒤쪽에서 바라보던 로넨이 에드의 팔을 톡톡 쳤다.

“에드, 빨리 부탁을 드리러 가보자.”

긴장한 얼굴을 한 로넨의 손을 마주 잡은 에드가 그를 끌고 천천히 대신관에게 다가갔다. 한숨을 작게 포옥 내쉬며 긴장을 달랜 로넨이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대신관님.”

“다시 뵈어 정말 반갑습니다, 대공자님. 잘 지내셨습니까?”

“네! 북부에 도착한 이후로 정말 잘 지냈어요. 매일매일 새롭고 즐거운 일이 가득했거든요. 대신관님은요? 잘 지내셨나요?”

“네, 저도 신의 품속에서 평온하게 지냈습니다. 대공자님께서 북부에서 적응을 잘하고 행복하게 지내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정말 기쁩니다.”

대신관의 다정한 말에 로넨이 활짝 웃으며 꽃다발을 내밀었다.

“대신관님께서 북부에 오신 것을 환영하기 위해서 꽃다발을 준비했는데요, 마음에 드시면 좋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대공자님.”

꽃다발을 품에 안은 대신관이 인자하게 웃자 로넨은 에드를 힐끗, 올려다보다 작게 운을 뗐다.

“저, 그런데 대신관님…….”

“네, 대공자님. 이 노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편히 말씀하세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따가 다친 사람들과 동물들을 치료해 주실 수 있나요?”

대신관은 북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쳤을 텐데도 더듬더듬 이어지는 로넨의 부탁에 부담스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활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대공자님께서 먼저 이리 말씀해 주시지 않았으면 제가 더 서운할 뻔했습니다. 혹시라도 이 노구가 늙었다고 성에서 쉬게 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으니까요.”

“정말요?”

“네, 그러니 대공자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가져온 구호 물품을 간단하게 정리 후 바로 부상자들을 돌볼 생각이었으니까요.”

* * *

북부에 도착한 대신관은 로넨에게 건넨 말처럼 정말 간단하게 짐만 푼 후 신관들과 함께 지진의 피해가 있었던 가렌다 산 근처로 이동했다.

로넨과 에드는 혹시 모를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 조금 떨어져 대신관의 뒤를 마차를 타고 쫓았고 대공은 기사들과 함께 신관들의 호위를 맡고 있었다.

“에드, 제이논이 말해 줬는데 다행히 지진이 났을 때 그 근처 주민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던 상태라 큰 피해는 없었다고 해. 동물들 역시 작은 상처뿐이었다고 하고.”

로넨의 말에 에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진의 피해가 크지 않아서 정말 다행입니다, 도련님.”

재해가 일어난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오늘 이렇게 다시 보니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었는지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대공 전하와 기사들이 없었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을 수도 있었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사이 마차가 벌써 가렌다 산 근처에 만들어진 임시 거처에 도착했다. 로넨과 마차 창문 밖을 내다보던 에드는 마차가 서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 전하!”

멀리서 이미 대공과 신관들이 온 것을 본 사람들이 임시 거처에 나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도움을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바쁘신 전하께서 매일 이렇게 와 주시니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말에서 내린 대공은 옅게 웃으며 영지민들을 살폈다. 다행히 임시 거처가 불편하지는 않은 것 같아 안심이었다.

“오늘은 내가 아니라 우리 로넨 때문에 온 거네. 동생이 다친 사람과 동물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통 잠을 못 자고 있어서 말이야. 그래서 오늘 북부에 도착한 대신관과 신관들을 모셔보았어.”

대공의 말에 마차에서 내리는 로넨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대신관이 그들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여러분, 오면서 피해 상황은 들은 상태입니다. 다행히 크게 다치신 분은 없지만 조금 있으면 겨울이 오니 조금이라도 빨리 치료를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신관이 잔잔하지만 정확한 음성으로 사람들을 다독이자 곁에서 대공도 거들었다.

“임시 거처에 치료소를 마련해뒀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치료를 시작하고 내일은 신관들을 나눠서 한쪽은 치료소에서 사람들을 보살피고, 다른 한쪽은 산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움직이지 못하는 동물들을 치료하도록 하겠다.”

대공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의 얼굴에 미세하게 남아 있던 불안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를 확인한 대신관이 자애롭게 웃으며 입을 뗐다.

“대공 전하께서 미리 준비해 주셔서 빠르게 치료를 시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우선은 많이 다친 사람부터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공은 대신관의 요청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지.”

그 후 대신관이 짧은 기도를 마치자 대공은 그를 사람들을 구호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막사로 안내하며 운을 뗐다.

“북부에 도착해서 쉬지도 못하고 이곳으로 온 걸 텐데 잠시라도 편히 쉬는 게 좋지 않겠나, 대신관.”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몸이 편안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움직일 수 있을 때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대공과 대신관이 짧은 대화를 나누던 사이에 밖에서 채비를 마친 제이논이 들어왔다.

“대공 전하, 대신관님이 요청하신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제이논의 보고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대공은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그럼, 힘들겠지만 영지민들을 부탁하네. 그리고 혹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말해 주게. 기사들과 함께 최대한 협조해 줄 테니.”

“말씀 감사드립니다, 전하. 그럼 외람되지만 몇 가지 청을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대공은 대신관에 말에 살포시 웃으며 얼마든지 말하라는 듯 시선을 맞췄다.

“거동이 불편해서 이곳까지 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다친 사람이 사는 곳과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저희 대신 조사를 부탁드려도 괜찮겠습니까.”

“그거야 어렵지 않네. 그것만 도와주면 괜찮겠나.”

“그리고 이곳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는 동안 저희가 가져온 구호물자를 나눠 주는 일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이곳을 지킬 기사들 몇을 뺀 나머지에게 몸을 추스르지 못하는 환자들의 확인을 명하겠네.”

대공의 말에 대신관은 얼굴에 옅게 웃음을 띠고는 제이논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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