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은 그런 에드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치료 방법이 신관보다 에드의 치료 능력에 가깝게 느껴지는 거 같아.”
* * *
조금 전까지의 열기가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통로를 걷는 대공과 에드 사이는 말 한마디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에드는 이 분위기를 타파하고 싶었지만 아까 들은 대공의 말이 걸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대공 전하가 말한 것처럼 고대인들은 나처럼 치유의 능력을 갖고 있었던 걸까? 그게 진짜라면 왜 그 능력이 나한테 생긴 거지?’
대공 역시 에드가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하느라 그가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그 그림이 지워진 게 아니라 정말 에드가 말한 것처럼 사람의 모습을 한 용이 부분적으로 돌아가 검게 물든 모습이라면…….’
한참을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두 사람은 막다른 통로에 도착해서야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막혀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출구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갈림길이 없는 걸 보면 입구는 여기가 맞는 것 같아. 그 증거로 이 근처에 바람이 통하는 게 느껴지거든.”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대공은 에드를 잠시 세워 두고 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에드, 다행히 함정은 없는 것 같은데 잠시 이리로 와 볼래?”
에드가 가까이 다가오자 대공이 마법으로 빛의 띄우더니 벽을 밝혔다.
이 벽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왼쪽에는 용이, 오른쪽에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중앙에 있는 표시랑 그 앞에 놓인 수정구 두 개로 보아 특정한 조건을 채우면 이 벽이 열리는 거 같아.”
“이 오래된 공동이 아직도 멀쩡한 걸 보면 여기에도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은데 그 조건이 대체 뭘까요?”
에드가 그림과 수정구 주변을 기웃거리다 대공을 쳐다보았다.
“그…… 손바닥이라도 올려 볼까요?”
“그럼, 내가 먼저 손을 올려 볼게. 에드는 혹시 모르니까 거기서 좀 떨어져 있고.”
대공이 왼쪽에 놓인 수정구에 손을 올려놓자 구슬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공이 한참을 그렇게 있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에드도 슬며시 오른쪽에 놓인 수정구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큰소리와 함께 벽 사이가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전하, 생각보다 조건이 간단했나 봐요!”
하지만 대공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에드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분명 함정이나 독이 묻어 있지 않을까 해서 그가 이곳저곳 건드렸을 때 왼쪽 구슬에는 반응이 있었지만, 오른쪽 수정구에는 반응이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용의 피가 흘러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대공의 머릿속에는 에드가 고대인의 능력과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돌아가면 이르텔과 제이논을 따로 보내 이곳을 조사해 봐야겠군.’
생각을 마친 대공이 에드를 이끌었다.
“자, 에드. 이제 돌아가자.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기묘한 유적지에서 밖으로 빠져나오며 에드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디로 이어진 길일까 싶었는데 통로를 나와 도착한 곳은 가렌다 산의 호숫가 근처였다.
“대공 전하.”
에드가 대공을 올려다보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나왔던 길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어느새 밤이 깊어진 하늘엔 달이 떠 있었다.
‘지진이 난 후로 시간이 꽤 흘렀군.’
상황을 파악한 대공은 에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드, 어디 불편한 곳은 없지?”
“네, 괜찮습니다.”
“좋아, 그럼 가자.”
에드는 그 손을 조심스레 마주 잡으며 대공이 이끄는 길을 함께 걸었다. 길은 어두웠고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제 손을 감싼 대공의 따스한 손길에 에드는 한결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이쪽으로 가면 막사가 있는 방향이죠?”
“응, 내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테니 부하들이 그쪽에 모여 있을 거야.”
에드는 대공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전하께서 이미 너무 많은 마법을 사용한 상태이시니 최대한 빨리 그들과 합류해야 해.’
다행히도 그들은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횃불을 들고 근처를 수색하는 기사단들을 만날 수 있었다.
“대공 전하!”
“괜찮으십니까? 전하?”
이르텔을 중심으로 몇 명의 기사가 빠르게 다가오자 대공은 가볍게 웃으며 그들의 걱정을 일축했다.
“그래, 괜찮아. 상황은?”
“지진이 완전히 멈춘 걸 확인한 후 사람들을 산 아래로 내려보냈습니다. 마을 사람들 인솔과 전하를 찾는 수색대를 빼고 남은 기사들은 마도구를 사용해 지진으로 발생한 추가 피해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수고했어. 로넨은 어디에 있지?”
“먼저 북부 성으로 모셨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이르텔이 몰고 온 말에 에드를 태우며 지시했다.
“나는 지진이 발생한 현장을 살펴본 후 북부 성으로 돌아가겠다. 조사 중인 기사단원들에게 위험한 곳이 보이면 그들끼리 대처하지 말고 기록만 한 후 북부 성으로의 복귀를 준비하라고 일러둬.”
이르텔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 * *
재해 현장을 둘러본 뒤 대공과 함께 북부 성으로 돌아온 에드는 죽 방 안에 머물렀다.
〈주치의가 올 테니까 씻고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에드.〉
〈금방 올 거니까 사람들을 돕겠다고 일하지 말고, 알았지?〉
대공이 기사들과 다시 재해 현장으로 떠나면서도 몇 번이나 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에드는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이 많이 늦었는데.’
북부 성을 나선 대공을 기다리고 있자니 에드는 마음이 허하고 염려스러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를 서성거렸다.
에드는 가끔 램프를 든 기사들이 지나갈 때마다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도로 어두워지는 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홀로 시간을 보내자 에드의 머릿속에 낮에 있었던 일이 조금씩 떠올랐다.
‘……땅 아래에 그런 유적지가 있을 줄이야.’
아까는 동굴과 벽화를 보느라 눈이 핑핑 돌아갔다면 지금은 조금 더 차분하게 그 상황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검은 용과 마을 사람들이 그려져 있던 벽화와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대공 전하…… 그리고 전하 혼자의 힘만으로는 열리지 않았으나 내가 함께 수정구에 손을 대자 열리던 벽.’
느릿하게 지나가는 회상에 에드는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똑, 똑.
그때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황급히 정신을 차린 에드가 대답하자 주치의가 방으로 들어섰다.
“에드, 진찰하러 왔는데.”
“아, 네.”
에드가 침대 위로 올라가 헤드에 등을 기대자 주치의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머리가 어지럽거나 울렁거리지는 않나?”
“네, 특별히 어지럽거나 울렁거리지는 않습니다. 아픈 곳도 없고요.”
에드의 얼굴을 살피며 작게 고개를 끄덕인 주치의가 진료 기구를 꺼냈다.
“다행히 머리에 큰 충격은 없던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신관에게 한 번 치료받는 게 좋지 않을까 하네. 마침 며칠 후에 대신관이 북부에 오신다고 하니 그분께 도움을 받으면 좋을 것 같군.”
“아뇨, 그럴 정도는 아닙니다.”
“원래 사고 직후엔 몸이 놀라 증상이 바로 나타나지 않기 마련일세. 지금은 괜찮아도 나중에는 온몸이 아파 옴짝달싹 못 할 수도 있고.”
주치의는 에드의 체온을 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외적으로 보이는 큰 상처는 없으니 다행이군.”
“대공 전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에드를 진료한 후에 대공 전하께도 진찰받아 보실 것을 권유할 생각이지. 그러니 전하 걱정은 말고 본인 몸 걱정부터 하게, 에드.”
에드는 어딘가 야단치는 것 같은 어조의 말을 뱉는 주치의를 바라보며 이마를 긁적였다.
“……네.”
“다른데 불편한 곳은 없고?”
“대공 전하께서 감싸 주셔서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래,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봤네만 어찌 그리 무모하게 굴었는가. 에드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네.”
에드는 멋쩍게 웃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은 똑같이 행동했을 터였다.
‘대공 전하께서 강하신 건 알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웃기는. 대공 전하께서 재빠르게 움직이셔서 다행이었지, 정말 큰일이 날 뻔했네.”
“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이번엔 상처가 난 곳에 연고를 바르도록 하지. 약간 따끔거릴 걸세.”
에드의 몸에 자잘하게 난 상처들을 확인한 주치의가 약통을 꺼내 꼼꼼하게 약을 발랐다.
“처지가 다 끝났는데 어떤가? 약을 더 발랐으면 하는 곳은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