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라면 대공 전하 혼자 힘으로는 계속 버티기 힘드실 거야.’
아까보다 확연히 줄어든 흔들림 속에서 일어난 에드는 조금씩 단상으로 이동했다. 대공 역시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에드를 발견했지만, 결계를 유지하는 것에 집중하느라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우르르 콰앙!
에드가 대공에게 거의 접근했을 때, 마치 마지막이라는 듯이 거센 진동이 일어났다.
에드가 그 진동에 쓰러진 순간, 그 주변 땅이 갈라지며 이곳저곳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이르텔과 제이논이 에드를 구하러 오려 했지만 두 사람 모두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어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다.
“기사들 모두 섣부르게 움직이지 말고, 2차 붕괴에 신경 쓰며 주변 사람들을 지켜라!”
에드는 커다랗게 울리는 대공의 목소리에 우왕좌왕하던 대중들이 진정하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이 자신을 구하려다 위험에 빠지지는 않겠다 안심하던 에드는 이내 또 다른 걱정에 빠졌다.
‘아, 나 때문에 로넨이랑 전하께서 슬퍼하면 안 되는데…….’
땅 아래가 쑤욱 꺼지며 부유감이 드는 중에 에드는 누군가 자신을 감싸 안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 *
타닥타닥.
어두운 공간 속에서 희미한 모닥불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
에드의 입에서 신음 같은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자, 에드. 넘어졌을 때 머리를 부딪쳤을 수도 있으니 이대로 입만 살짝 벌려 봐.”
에드는 자신의 입 안으로 차가운 물이 들어오는 걸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헉!”
아니 정확히는 일으키려다 둔한 통증을 느끼며 다시 쓰러졌다.
“움직이지 말라니까. 에드도 참…….”
에드는 그제야 지금 자신이 어디 있는지, 그리고 쓰러지기 전에 제 몸을 보호했던 게 누구였는지를 알아챘다.
“이제 괜찮아, 에드.”
힘겹게 눈을 뜬 에드는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는 대공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도 괜찮으신지요?”
“다친 건 에드지 내가 아닌걸.”
“하지만 아까 전하의 입가에 피가 비쳤는데요.”
“그걸 보고 움직인 거야?”
“……네.”
“일시적인 충격으로 그런 것이라 보다시피 아무렇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에드는 대공이 자신의 입가를 가리키며 옅게 웃자 아까까지 불안하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지진은 멈춘 걸까요?”
“그런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거겠죠?”
대공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행히 에드가 넘어진 진동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만약 지진이 계속됐더라도 마법도 지속되고 있었고, 이르텔에게도 뒷일을 부탁했으니까 피해는 없었을 거야.”
에드는 그제야 마지막 걱정을 내려놓으며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는 그럼 그 땅 아래인가요? 밑에 이런 공동이 있었을 줄은 몰랐네요.”
그에 대공이 작게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가 쓰러졌을 때 이곳을 조금 조사해 봤는데 생각 이상으로 넓은 곳인 것 같더라고. 북부 성 근처에 이런 비밀 장소가 있을 줄이야.”
어지럼증이 많이 가라앉은 걸 느낀 에드가 힘을 주어 일어났다. 온몸에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부러 힘을 실어 말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다 대공 전하를 걱정하고 있을 테니 탈출구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요?”
대공 역시 그가 무리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에드를 쉬게 하는 것보다는 빨리 주치의에게 그의 상태를 확인받고 싶었다.
“곳곳에 놓인 조각상이나 벽화를 보면 이곳에도 밖으로 통하는 통로가 있을 것 같은데…….”
“역시 위로 탈출하는 건 어렵겠죠?”
“잘못 마법을 쓰면 지진으로 부서진 천장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어서 안 될 것 같네.”
에드는 대공의 대답에도 낙담하지 않고 이내 모닥불의 장작을 하나 들어 이곳저곳 비춰 보더니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글씨는 거의 다 지워져서 읽을 수 없지만, 벽화를 보니 근처 그림들이 모두 어느 한 방향을 향해 움직이는 거 같습니다. 저 방향으로 가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요? 대공 전하, 저희 저쪽으로 가 봐요!”
에드는 어느새 두려움도 잊고 고대 유적지를 탐험하는 것 같은 호기심에 휩싸였다.
‘그래, 사실 난 원래 이런 판타지스러움을 원했다고! 황궁이나 귀족들의 권모술수가 아니라!’
대공은 갑자기 어딘가 신나 보이는 에드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천천히 그가 말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에드가 작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대공 전하, 그런데 벽에 그려진 그림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대공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에드가 횃불로 가리키는 벽화에는 희미하지만, 북부를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었다.
“용이 맞는 것 같죠, 전하?”
“그러네. 그림만 그려져 있어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에드는 횃불을 조금 더 치켜들었다. 환하게 밝혀진 벽에는 왜 처음부터 눈치채지 못했을까 할 정도로 많은 양의 그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람을 위에 태우고 있는 용부터 사람과 함께 무리를 이루고 있는 용 등의 정말 각양각색의 용과 고대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에드는 그 그림들을 집중하며 바라보다가 모든 그림들이 어느 한 벽화를 중심으로 그려진 걸 발견했다.
그 그림은 옛날에 본 파노라마 사진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이건 뭘 뜻하는 걸까요?”
대공이 에드가 손으로 가리킨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게 만약 시간순으로 그려진 것이라면…….”
에드는 불빛에 비치는 대공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으로 턱을 짚은 채 대공은 그림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에드는 대공의 뒷말이 궁금했지만,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되묻지 않았다.
말없이 벽화를 보던 대공이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에드를 불렀다.
“에드, 잠시 이리로 와 볼래?”
“네.”
에드는 대공의 부름에 빠르게 움직였다.
“아무래도 이건 이 북부의 유적지에 용에 관한 그림들이 많은 이유를 설명해 주는 거 같아.”
“아, 그럼 북부의 상징에 왜 검은 용이 들어갔는지도 알 수 있겠네요?”
대공은 불빛에 반짝이는 에드의 눈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그 유래가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황궁이면 모를까, 북부에는 곳곳을 살펴봐도 검은 용과 관련된 자료가 없었거든.”
대공이 그림의 첫 부분을 짚고는 에드를 바라봤다.
“일단 여기 검은 용이 하늘에서 떨어진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북부 성 같아. 이 근처에 그려져 있는 꽃과 바위들이 지금도 그 근처에 그대로 남아 있거든.”
에드는 대공의 추론을 들으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나는 그림 속의 이곳이 북부 성일 거라고 생각도 못 했는데, 전하는 벽화에 그려진 작은 단서만으로 이런 추론을 하시는구나.’
“처음에는 이 용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고대인들이 그를 다치게 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아. 에드는 어때?”
에드는 대공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깐 멈칫했지만. 곧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제 생각에도 고대인들이 용을 공격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랬다면 주변에 그려진 벽화들처럼 용과 함께 살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에드의 눈동자를 보며 대공은 속으로 살짝 웃었다. 그리고 일부러 그의 의견에 반박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음, 그런데 고대인들이 멋대로 용을 잡아서 사육하고 길렀을 가능성은 없는 걸까? 용의 입장에서는 괴로운 시절이지만 벽화를 그린 고대인들이 멋대로 왜곡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나?”
에드는 대공의 말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전하께서 말한 의견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랬다면 지금 북부 성의 상징이 검은 용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들이 용을 가축처럼 여겼다면 이렇게 검은 용을 신성하게 모시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대공은 이어지는 그림들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이 그림을 보면 쓰러진 용을 제단에 올려놓고 있어. 이걸 그들이 용을 사냥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에 에드는 그림과 그 주변 흔적들을 짚었다.
“제 생각에 고대인들은 용을 구하기 위해 제단으로 옮긴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 이 부분을 보시면 신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용의 몸에 손을 대는 장면이 있죠? 만약 전하의 말대로라면 이 이후의 그림은 붕대를 두르고 누워 있는 용이 아닌 사냥감을 나누는 축제가 그려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용이 있던 자리에 사람이 존재하는 건? 용은 사라져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간 걸까?”
에드는 그림을 보면서 가장 걸렸던 부분을 찔러 오는 대공의 말에 멈칫했다.
“음, 그건…… 근거는 없지만, 용이 사람으로 변한 거 아닐까요? 제가 옛날에 봤던 책 중에는 용이 여러 종족으로 변하는 게 가능하다는 기록이 있었거든요. 더 이상 본체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어서 치료를 위해 자신을 치료해 준 고대인의 모습을 빌린 게 아닐까요? 여기 이 부분을 보면 사람의 몸에 드문드문 검은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있잖아요. 이게 그걸 뜻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빙의한 세상 속에서 가상의 드래곤 이야기를 꺼내게 될 줄이야…….’
에드는 이 상황에 살짝 민망함을 느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뻔뻔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판타지 소설 속 드래곤이나 이곳에 묘사된 용의 외형도 비슷한데 뭐 똑같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에드의 말을 듣고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대공이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나 역시 에드가 한 말에 대부분 동의해. 용이 정말 사람으로 변하는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고대인과 용족 사이에는 무언가 비밀이 있는 게 분명해. 일단 내가 걸리는 부분은 여기 이 부분인데. 고대인이 용의 목 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 게 보이지? 이게 정말 치료 목적이라면 왜 약이나 붕대를 감아 주지 않은 걸까?”
“저 시대의 신관이 아닐까요?”
“나도 처음에는 신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다른 거 같아. 치료 마법이라면 상처 부위에 직접적으로 걸어야 하는 게 일반적인데 지금 이 사람은 상처를 돌보는 게 아니라 목을 껴안고 있잖아.”
에드는 벽화를 가리키는 대공의 말을 듣고서야 그가 느끼던 이상한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벽화를 집중해 보던 에드가 고개를 돌리자 대공과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