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102화 (102/198)

〈대공 전하, 전하께서는 8살 때부터 큰 말을 탔다고 집사장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요.〉

〈로넨 도련님이 아직 어리시긴 하지만 얌전한 말을 타면서 적응하시면 큰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에드는 반쯤 눈이 감긴 로넨의 말을 가만가만 들어 주며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주었다. 하루 종일 기사들을 응원하고 박수를 치느라 피곤했는지 그가 이불을 덮어 주었을 때 로넨의 눈은 이미 감긴 상태였다.

로넨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에드는 조용히 움직여 막사 안을 밝히는 램프를 끄고 막사 밖으로 나왔다. 따스한 막사 안과 다르게 밖으로 나오니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내일은 북부 성의 마지막 행사답게 북부 기사단 전체가 참여하는 사냥 대회가 있었다.

가을의 끝자락이라서 활동하는 동물의 수가 많지는 않을 테지만, 숲 전체를 배경으로 하는 대회다 보니 다들 의욕이 넘쳤다.

그 때문인지 대부분의 기사들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막사 안에서 무기를 점검하거나 잠자리에 든 상태였다.

그런 그들과 달리 일찍 잘 필요 없던 에드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대회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대회 전에는 에드가 돌아다녀도 어쩐지 데면데면했던 사람들이 오늘은 그와 눈이 마주치면 이곳저곳에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에드는 이 상황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홀로 외지인 취급을 받던 자신이 드디어 북부 성의 일원이 된 기분이었다.

“에드, 자지 않고 왜 나왔어?”

어느새 숲 입구 언저리까지 도착했을 때 어디선가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드는 손에 든 램프를 움직여 주위를 둘러보다가 숲의 산책로 초입에 서 있는 대공을 발견했다.

“대공 전하.”

“밤바람이 찬데.”

대공은 곁으로 빠르게 다가온 에드에게 자신의 외투를 걸쳐 주며 말했다. 언제나처럼 그의 호의를 거절하려던 에드는 대공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걸 깨닫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대공은 축 늘어진 에드를 보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포기한 것 같아 다행이야, 에드. 로넨은 잠자리에 든 모양이지?”

“……네, 오늘 피곤하셨는지 잠자리에 들자 금방 잠이 드셨어요.”

“에드도 피곤할 텐데 일찍 자지 않고.”

“잠깐 바람을 쐬고 들어갈까 해서 나왔습니다.”

대공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투 대회는 어때? 이제 진정한 북부 성의 일원이 된 기분이 들어?”

“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다른 분들과 함께 일하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겉돌고 있었겠죠.”

“아니, 에드는 이번 대회가 아니었더라도 결국 북부 성 사용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거야. 나와 로넨의 마음을 얻었는걸.”

“저는 일개 하인인데도 대공 전하께서는 항상 저를 믿고 응원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대공이 작게 웃었다.

“일개 하인이라기엔 에드는 로넨의 친구면서 내 치료사기도 하잖아.”

“아.”

“나는 이렇게 에드가 무의식적으로 사람을 돕는 면이 멋지다고 생각해.”

“……좋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에드의 그런 면모가 사실은 어릴 때 무척 외로웠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해.”

대수롭지 않은 투로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대공의 말에 에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에드를 보며 대공은 분위기를 환기할 겸 주제를 바꿨다.

“그래, 집사장과 함께하는 공부가 힘들진 않고?”

“……여기서 힘들다고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어떻게 되기는. 내가 집사장과 면담하는 자리를 갖는 거지.”

대공의 장난스러운 어투에 에드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힘들진 않은데요,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떤 생각?”

“제가 지식을 배운다 한들 정말 북부 성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요.”

대공은 조금씩 축 늘어지는 에드를 보며 별걸 다 걱정한다는 듯 말을 걸었다

“에드,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잘난 척하는 걸로 들릴 수도 있는데. 북부 성은 에드가 없었을 때부터 완벽했었어. 그러니 아무도 에드에게 처음부터 모든 걸 잘하길 바라지 않아. 되레 아무리 큰 실수를 저질러도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수습할걸?”

대공의 말에는 자부심이 느껴지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배려심이 묻어났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대공 전하.”

“에드가 그 조그마한 몸으로 사고를 쳐 봤자 내가 어릴 때 마법으로 성 이곳저곳에 구멍을 내던 거에 비할 수 있을까.”

“……정말 대공 전하께서 그런 사고를 치셨단 말입니까?”

대공은 피식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런 나를 키우고 마물과 황성의 위협 속에서도 북부를 지켜온 게 저 북부의 주민들이야. 에드가 그동안 보아 온 북부 성은 자신들의 기대에 맞지 않았다고 실망하고 배척할 사람들처럼 느껴졌어?”

잠시 생각에 빠졌던 에드는 이내 대공을 똑바로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전하의 말씀을 들으니 제가 했던 걱정과 불안이 정말 별거 아닌 일들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역시 전 로넨 도련님과 대공 전하를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다음 날 오전 사냥 대회가 시작되고, 에드는 막사에서 기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반나절 정도 진행되는 대회로, 대공도 기사들과 함께 움직였다. 포획한 사냥감의 종류와 양으로 점수를 매기는 형식이었다.

“누가 제일 큰 사냥감을 잡을 것 같아?”

로넨이 차를 마시며 묻자 테이블에 간식을 내려놓던 제이논이 답했다.

“아무래도 대공 전하이시지 않을까요? 매년 그랬듯이요.”

“형이 항상 가장 큰 사냥감을 잡았어?”

“네, 작년에는 다른 산에서 대회를 개최했는데 그때는 커다란 곰도 잡으셨어요.”

와, 하며 로넨이 감탄하자 에드는 로넨의 찻잔에 따뜻한 차를 더 따랐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으니 사냥을 마친 기사들이 돌아올 때였다.

“가렌다 산은 고지가 낮고 큰 동물이 없어서 곰 같은 사냥감은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작고 날쌘 동물들이 많아서 또 다른 즐거움이 있을 겁니다.”

제이논의 설명에 로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형이 어떤 사냥감을 잡아 올지 정말 기대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뿌우우, 뿔피리 소리가 울리자 로넨이 벌떡 일어났다. 사냥 대회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로넨 도련님, 같이 가요.”

대공을 보러 빠르게 움직이는 로넨을 제이논이 뒤따랐고 에드는 남아서 막사 안을 정리했다. 대공이 막사에 돌아왔을 때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끼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어, 에드?”

막사 밖으로 나온 에드가 로넨이 향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차였다. 짐수레를 옮기던 기사들 중에 한 명이 그를 불러 세웠다.

“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에게 다가가자 짐수레에는 산토끼와 새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에드는 짐수레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이건 혹시 대공 전하께서 잡으신 사냥감들인가요?”

“많지? 전하께서 매년 실력이 느시는 느낌이라니까?”

에드가 작게 웃자 짐수레를 옮기던 기사들이 그에게 작게 눈짓했다.

“손 펼쳐 볼래? 에드.”

“제 손이요?”

에드가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내밀자 기사들 모두 제각각의 주머니에서 색이 특이한 새 깃털과 작고 붉은 열매, 버섯 등을 내려놓았다.

하나하나 양은 적었는데 전부 모이니 한 손으로 받기에는 부족해 두 손으로 받쳐야 할 정도로 부피가 제법 되었다.

“이게 다 뭔가요……?”

에드가 말끝을 흐리며 의아해하자 기사들이 서로를 쳐다보고는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별건 아니니 정이라 생각하고 받아 둬.”

“이번 무투 대회에서 에드가 고생한 것 같아서 체력 보충하라고 주는 거야. 그거 독버섯 아니니까 물에 넣고 끓여서 먹어 봐. 담백하고 맛있을 거야.”

“그 새 깃털은 대공 전하께서 잡으신 새를 수거하러 갔을 때 우연히 주운 거거든. 근데 예뻐서 펜대로 쓰면 좋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 난 펜을 잘 안 쓰지만, 에드는 글을 쓸 일이 많으니까.”

에드는 제 손과 기사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사들은 작게 웃으며 에드의 어깨를 톡, 톡 가볍게 치고는 짐수레를 다시 끌며 사라졌다.

* * *

뿌우우.

어수선했던 장내가 정리되자 무투 대회의 끝을 알리는 뿔고둥 소리가 울렸다.

“무투 대회가 끝나서 정말 아쉬워요.”

“그러게요, 평소에는 대공 전하의 모습을 보기가 어려우니까요. 아차, 저희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빨리 안 가면 앉을 자리도 없을걸요?”

얼추 사람들이 진정하고 자리를 잡자 대공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좌중을 가볍게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올해도 무탈하게 무투 대회를 마칠 수 있어서 기쁘군. 개최 전날에 내린 비로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그 순간이었다. 흔들흔들, 발밑을 지탱하고 있는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더니 시야가 흔들렸다.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 대공이 외쳤다.

“지진이다! 모두 몸을 숙이고 목과 머리를 보호해!”

대공이 외치자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 앉아 몸을 숙였다.

에드도 곧바로 바닥에 몸을 굽혔다가 살짝 시선을 들었다. 로넨이 어디 있는지 확인했다가 이르텔이 보호하는 것을 보고 도로 고개를 수그렸다.

동시에 우우웅, 귓가에 작게 진동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빛의 장막이 넓게 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공의 능력이었다.

여전히 땅은 흔들렸지만, 낙석으로 인한 피해는 보호막이 막아 주고 있었다.

쿠웅!

그때 위쪽에서 커다란 충돌음이 들렸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결계 위를 본 에드의 온몸으로 서늘한 긴장이 내달렸다. 지진의 여파로 산사태가 일어나 보호막 위로 흙과 바위가 쏟아지고 있었다.

다행히 보호막은 이번 충격 역시 막아냈다. 하지만 에드는 이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 냈을 대공이 걱정되어 급히 단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대공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입가 한쪽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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