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저희는 골동품 수집가인데요, 폭설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다가 눈이 그쳤기에 이동했는데 그만 마차가 이렇게 비탈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상황을 파악한 텐스가 똑똑 마차 문을 두드린 뒤 열었다. 그러자 에드의 눈에 좁은 길에 맞닥뜨린 두 대의 마차가 보였다. 내려가는 마차와 길에 삐딱하게 선 마차가 서로 피해 움직이기에는 길이 좁았다.
에드가 마차 밖으로 나서자 로넨도 함께 폴짝 뛰어내리며 상황을 살폈다.
“마차 바퀴가 흙에 빠졌구나.”
“네, 그렇네요. 도련님.”
북부로 향할 때 비가 내렸을 적 상황과 비슷한 모습에 텐스가 이곳저곳 살피다가 운을 뗐다.
“단단한 나무판을 마차 바퀴에 대면 좋을 것 같은데요.”
“단단한 나무판이요?”
마차 앞에 서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키가 큰 상인이 뒤에 선 하인들을 향해 말했다.
“짐수레에서 그림을 감싼 나무를 꺼내 와라.”
그러자 빠르게 움직인 하인이 마차 뒤에 있던 짐수레에서 나무판을 꺼내 왔다.
그러자 텐스가 대공이 썼던 방법으로 마차를 진창에서 꺼냈다. 이를 본 상인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요.”
“뭐, 됐으니 어서 길이나 비켜 주시죠.”
“그럴 순 없지요. 이리 큰 은혜를 입었는데! 아! 혹시 미술품이나 골동품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상인이 로넨과 에드의 옷차림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하인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하인들이 짐수레에서 몇 가지 짐들을 가지고 왔다.
“저는 황실에 미술품과 골동품을 납품하는 상인으로 이번에 동부에서 진행한 전시회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럼 이 길은 북부 성과의 거래를 위해 들어가던 것입니까?”
텐스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가 알기로 이번 분기에 북부 성에서 미술품 관련 교역 계획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닙니다. 길을 잘못 들어서 그만.”
“아아, 그러시군요.”
텐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인이 마차 문을 활짝 열고 안쪽에 그림이며 도자기를 죽 늘어놓았다.
“제가 취급하는 것들은 모두 유명한 작가가 초기에 그린 것이거나 귀한 골동품인데 혹시 마음에 드시는 게 있다면 이렇게 저를 도와주신 인연으로 반값, 아니 포장값만 받고 드리겠습니다.”
“흐음.”
이런 종류에 관심이 없는 텐스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로넨이 그림 하나에 관심을 보였는데 그건 작은 아기 고양이가 털실 뭉치를 가지고 노는 그림이었다.
“에드, 이거 귀여운데 창고에 두면 어떨 것 같아?”
로넨이 관심을 보이자 상인이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역시 귀한 분이라 안목이 다르십니다. 그 작품은 요즘 신인 작가 중에서도 가장 떠오르는 안드류가 어린 시절 그린 작품으로서 따스한 정서와 섬세한 화풍으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에드는 로넨이 가리킨 그림을 다시 살펴보았다. 색감이 따뜻하고 붓 터치가 세심했으나 자세히 보면 덧칠한 부분이 뭉개져 번진 부분이 있었다.
‘원작에서는 이런 그림으로 장난을 치는 사기꾼들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현대와 다르게 이곳은 미술품이나 골동품을 감정하는 과정이 까다로웠다. 이 때문에 종종 화랑 직원이 진품을 빼돌리고 모조 작품을 갖다 놓는 일이 일어났다.
에드는 그림을 내려다보다가 안드류, 안드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하다가 아! 했다.
안드류는 원작에서 노예 출신에서 대화가의 반열에 오르는 인물로 후에 황제의 초상화를 그리다가 잘못해서 벌을 받았다. 평소에도 겁이 없던 그는 황제가 ‘짐이 폭군으로 보이는가?’ 하고 물었을 때 ‘네.’ 라고 답해서 더 유명해지는 인물이었다.
‘아직은 신인 화가에 불과하지만.’
에드는 고개를 돌려 상인을 바라보았다.
“안드류라면 어린 시절 노예로 지내다가 실력을 인정받아 화가로 활동하는 작가 아닙니까?”
“아, 역시! 북부는 예술적인 기품이 흐르는 곳이라더니 이런 신인 작가도 알아보시는군요!”
“그런데 그는 어렸을 때 사정이 좋지 않아서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몇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에드가 묻자 잠시 얼은 상인이 흠흠, 하며 대답했다.
“그렇기에 귀한 것이죠, 그가 몇 개 그리지 않은 작품 중에 하나이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이건 안드류 화가가 직접 남긴 서명인가요?”
에드는 그림 아래에 찍힌 서명을 보며 물었다. 안드류는 어릴 때 본인의 본명이 아닌 자신이 지은 가명으로 활동했다.
‘그 이름이 아마 앤드였던가……그랬는데. 노예가 그림을 그리다 걸리면 혼날 거라는 생각에 그랬다고 했었어.’
가늘게 뜬 눈으로 에드를 살피던 상인이 입을 떼려는 그때 한 하인이 상인의 곁에 와서 속삭였다.
“주인님, 저기 마차에 찍힌 문양이 아무래도…….”
그들의 모습을 보던 에드가 텐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텐스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함께 북부 성으로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그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시는 분이 북부 성의 하나뿐인 대공자님이셔서요.”
“…….”
“그런 대공자님께서 그쪽과 그림에 관심을 기울이시니 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상인은 어버버하며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자 텐스가 쐐기를 박았다.
“물론, 도망가셔도 되는데요. 이 사실을 들은 대공 전하께서 대공자님을 위해 직접 움직이신다면 찾는 데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을 거랍니다. 그러니 괜한 수고 마시고 따라오시지요.”
텐스의 말에 고개를 떨구고 얌전히 성으로 따라온 상인은 대공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솔직히 털어놓았다.
“죄,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무엇이 말이지?”
“저, 저희들은 한미한 귀족들에게 그림을 파는 작은 상단인데 이번에 북부에서 폭설로 발이 묶여 예상치 못한 지출이 생기자 그만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내 동생을 노린 것이란 말인가?”
“절,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도련님이 북부의 대공자이신 걸 알았다면 이런 허튼짓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돈이 급해서 그만 마차의 문양과 신분을 확인하지도 못하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들에게 폐를 끼쳤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내 동생인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게 아니라 거짓으로 그림을 팔아먹을 생각부터 하지 말았어야지, 그렇지 않은가?”
“…….”
“황실을 드나든다, 이름 있는 작가의 초기 그림이다, 그런 거짓말로 현혹하지 않았더라도 그림이 좋았으면 대공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구매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 대공은 제대로 대답 못 하는 사기꾼들을 지하 감옥에 가둔 후 에드를 불렀다.
“자칫 로넨 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까지 속여 이익을 취할 뻔한 사기꾼들을 잡는데 에드가 혁혁한 도움을 줬으니 그에 합당한 상을 줘야 할 것 같은데.”
“아, 아닙니다. 대공 전하.”
대공은 텐스에게 들은 사건의 전말을 떠올리며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때 대공의 곁에 있던 집사장이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에드, 저들이 이상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알현실에 남겨진 사기꾼들의 그림을 내려다보던 집사장이 시선을 돌려 온화한 눈빛으로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게, 헤린스 백작 저에서 일했을 때 마침 같은 작가의 그림을 본 적이 있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눈썰미가 좋군.”
집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공은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에드. 어떤 상을 받고 싶은지 부담 갖지 말고 말해 줘.”
* * *
“에드, 이것 봐. 고양이가 너무 귀여워.”
로넨이 창고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공에게 선물 받은, 하얀색 고양이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에드도 비슷한 그림을 받았는데 그건 노란색 고양이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나와 닮았다면서 선물을 해 주셨지.’
에드는 방에 걸어 놓은 그림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걸까?
로넨은 선물 받은 그림을 창고에 가져와 걸었지만, 에드는 그러지 않고 자신의 방에 걸어 두었다. 로넨의 그림과 짝을 맞춰서 전시해 두면 보기에 한결 더 좋을 것을 알았지만, 어째선지 자신만의 공간에 두고 싶었다.
잠깐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로넨이 에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에드는 다가온 로넨을 보며 질문을 던졌다.
“도련님은 어떤 고양이가 더 귀여우세요?”
“응, 나는…….”
하면서 말을 끈 로넨이 씨익 웃었다.
“그러는 에드는?”
“저는 둘 다 모두 좋습니다.”
“그게 뭐야.”
로넨이 코를 찡그리며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나도 그래. 하양이 노랑이 모두 귀여워.”
그때 제이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
에드가 문가를 바라보자 두 손 가득히 책을 들고 있는 제이논이 보였다. 에드가 달려가 책을 나눠 들자 제이논이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고마워, 에드.”
“이거 다 창고 책장에 둘 책인가요?”
“어, 로넨 도련님이 읽기에 좋은 책들로 가져와 봤어.”
에드가 책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자 제이논이 말했다.
“내가 정리할 테니까 집무실로 올라가 봐. 대공 전하께서 찾으셔.”
“전하께서요?”
“어.”
책을 소파에 내려놓은 에드는 창고를 나섰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