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눈을 꼭꼭 뭉치며 대공은 에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에드는 어느 편에 설 거지?”
에드는 창고 벽으로 붙는 로넨과 장난기 섞인 대공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몸을 숙여 뭉쳐 놓은 눈들을 손으로 끌어모으며 대공과 거리를 벌렸다.
“저는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겠습니다.”
* * *
눈싸움은 엉성했다.
일부러 눈을 다른 곳으로 던지는 대공과 눈을 뭉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로넨, 그리고 어느새 로넨의 곁으로 다가와 눈을 모아주는 에드 사이에서는 눈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눈발이 점차 거세지자 대공은 그들을 챙겨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차를 끓일까요?”
에드가 티포트를 챙기자 로넨이 응! 하며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대공은 창고를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마력탄 상자는 로넨과 에드의 것을 합친 모양이군.”
“네! 따로 놓았더니 자리를 많이 차지해서요. 근데 실용품만 놓으려니 이상해서 인형이랑 작은 화분도 갖다 놓으면 좋을 것 같아요.”
“인형과 화분?”
“네, 소파랑 책장 위도 꾸미려고요.”
“창고가 한결 더 멋져지겠는데.”
대공의 칭찬에 로넨이 방긋 웃으며 찻잔을 대공 앞에 내려놓았다. 로넨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대공은 에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인형은 어떤 종류의 인형을 가져다 놓을지 정했어?”
“아뇨, 그건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눈이 그치면 도련님과 함께 시장을 갈 예정입니다.”
“그렇군, 그럼 그때 시간이 되면 나도 함께 가도 될까?”
“정말요, 형?”
“로넨과 에드가 북부의 시장에 가는 건 처음이니 내가 동행해 안내하면 좋을 것 같아.”
“와, 형이랑 같이 나간다!”
* * *
하지만 그 약속은 일주일이 넘게 내리는 눈 때문에 지켜질 수 없었다. 벽난로 앞에 앉은 에드는 눈이 내리는 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환한 낮인데도 두텁게 내려앉은 눈구름 때문에 어두운 밤 같았다.
그때 똑똑,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가 문을 열자 텐스가 서 있었다.
“텐스, 밖의 일은 별 탈 없이 보고 온 건가요?”
“어, 계속 눈이 내리는 것 외에는 큰 문제는 없어서.”
“대공 전하께서도 함께 입성하셨고요?”
텐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르텔과 성채 주변을 조금 더 둘러본다고 하셨어.”
“아.”
처음엔 소복하게 내리던 눈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거칠어지며 거센 눈보라를 일으켰다.
다행히 북부 성은 이런 일에 대비가 잘 되어 있었다. 도로가 정비된 큰길은 열선 마도구를 이용해 눈을 금방 녹였고 마을 촌장들과 연락망을 구축해 영지 내 상태를 파악했다.
하지만 시기가 한겨울이 아닌 봄이었기에 폭설 대비를 미처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다행히 로넨과 에드가 상인들에게서 구입한 마력탄이 충분했던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추위에 떨며 버티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에드, 추운데 여기 있지 말고 제이논 방에 같이 가 있자.”
비록 마력탄 수량에 여유가 있다 해도 눈이 언제 그칠지 모르는 상황이라 북부 성 인력들은 최대한 물자를 아끼기 시작했다. 그 방법 중 하나가 큰 방에 여러 명이 모여 함께 지내는 것이었다.
에드는 램프를 끄고 텐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텐스가 제이논의 방문을 열었을 때 방 안의 풍경에 에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에드, 어서 와!”
에드의 눈앞으로 종이 꽃가루가 휘날리고 휴대용 마법 폭죽이 펑펑 터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에드가 어리둥절해하자 제이논의 침대에 앉아 있던 로넨이 달려와 손을 잡고 콩콩 뛰었다.
“에드의 마력탄 덕분에 북부 사람들이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대! 그래서 고마움에 작은 파티를 연 거야!”
아까 분명 입성하지 않았다던 대공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에드의 머리에 붙은 꽃가루를 털어주었다.
“그런 거라면 로넨 도련님께서도 큰 도움을 주셨는데요.”
로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나는 에드를 따라서 같이 산 거니까 오늘은 에드를 위해 열린 파티야!”
그게 이렇게 파티까지 열 일인가? 하며 에드는 테이블에 놓인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마법 초에 켜진 불꽃이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그러자 대공이 에드에게 속삭였다.
“이럴 땐 그저 즐거워하면 돼, 에드. 북부에서 폭설이 내릴 땐 사소한 즐거움이라도 크게 부풀리며 축하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다들 지쳐 힘들어지니까.”
아, 하며 테이블로 다가간 에드는 초를 후, 불었다. 그러자 다시 종이 꽃가루가 흩날리고 마법 폭죽이 펑펑 터졌다.
에드는 옅게 웃었다.
‘이런 따뜻한 마음과 분위기가 있기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북부가 살아남은 게 아닐까?’
그러니 자신 역시도 그런 다정한 북부의 일원이 되어야겠다고 에드는 생각했다.
열흘 넘게 내리던 눈이 그친 이후로 북부 성에는 활기가 되살아났다. 식당 화로에는 불이 활활 타올랐고 사람들은 그동안 멈췄던 일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에드, 준비 다 됐어?”
로넨 또한 그랬다. 눈이 내리는 동안 성에 갇혀 있던 게 갑갑했는지 눈이 녹아 외출 허락이 떨어지자 아침 일찍부터 에드의 주위를 맴돌았다.
“네, 거의 다 되어갑니다.”
식당에서 도시락을 챙겨 온 에드가 답했다. 오늘은 창고를 꾸밀 인형을 사러 밖으로 나가는 날이었다.
시장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대공은 폭설로 인해 밀린 업무들이 남아 있어서 오늘 함께 하지 못했다.
“형이 같이 못 가는 건 아쉽지만 정무를 본 후 뒤따라 온다고 했으니까 섭섭해하지 말고 우리 먼저 외출하자, 에드.”
에드는 자신의 곁에 서서 말하는 로넨을 바라보았다. 말과는 다르게 대공과 함께 외출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지 목소리에 서운함이 뚝뚝 묻어났다.
“네, 도련님.”
“응응.”
로넨의 옷차림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밖으로 나온 에드는 마차 앞에 서 있는 대공에게 인사했다. 로넨은 혹시라도 대공이 일정을 수정해 함께 성을 나서는 건가 싶어서 그 앞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형도 오늘 같이 나가시는 건가요?”
대공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같이 나가지 못해 마중이라도 나왔어. 근데 로넨을 보니 일은 제이논에게 맡기고 그냥 나가고 싶네.”
“저야 함께 나가고 싶지만 그러면 안 돼요, 형.”
“그런가?”
“네, 형은 북부의 기둥이자 주인이시니까요. 힘드시더라도 정무를 보고 외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대신 제가 밤에 안마해 드릴게요!”
“로넨 덕분에 기운이 나는걸. 안마를 해 준다고 하니 기대도 되고.”
대공은 로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에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 다녀와, 에드. 시간이 되면 연락할게. 혹시 돈이 부족하면 텐스한테 말하고.”
대공의 자상한 당부에 에드는 옅게 웃었다.
“네, 대공 전하.”
* * *
성을 나선 마차가 구불구불한 길에 접어들자 에드는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폭설이 내려서 길이 엉망일 줄 알았는데 벌써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기분이 좋은지 마차를 끄는 텐스의 흥얼거림이 들렸다. 길이 덜 말라 질척이는 느낌은 있었지만 사람과 마차가 다니기에는 충분했다.
‘이게 북부의 저력이구나.’
분명히 역경이 많은 곳이었지만 사람들의 협동과 제때제때 보급되는 물자들로 그 어려움을 이겨 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에드랑 이렇게 둘이 나가는 거 오랜만인 것 같아.”
에드는 시선을 돌렸다. 로넨이 아직 눈을 다 털어 내지 못한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에드와 시선을 맞췄다.
“네, 도련님.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벌써 북부에 온 지도 꽤 되었고요.”
“응, 에드는 어때? 북부가 마음에 들어?”
“네, 아직 이런 말을 하기는 이를지 모르겠지만 사람들도 좋고 마음이 편해지는 곳 같아요.”
“맞아, 폭설이 내릴 때는 조금 걱정되었는데 형과 함께 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았고. 게다가 작은 파티도 열고 해서 정말 좋았어.”
로넨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때 밖에서 텐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에드, 창문 닫아.”
에드는 무슨 일이지? 하면서 창문을 닫았다. 그러자 마차가 서며 텐스가 마부석에서 내리는 기척이 났다.
“그쪽에 무슨 일 있는 겁니까?”
에드는 마차 밖에서 들리는 텐스의 음성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