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예쁘다.”
순수하게 감탄하는 로넨을 바라보며 에드는 벽에 걸린 액자와 벽 한쪽에 자리 잡은 옷걸이 등을 둘러보았다. 모두 로넨의 취향이었다.
작은 책장 옆에는 카펫을 깐 뒤 긴 소파를 배치하고, 한쪽 벽에는 목검을 잘 정리해두었다. 이르텔에게 조언을 얻어 연무장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또 뭘 갖다 놓으면 좋을까?”
로넨이 골똘히 생각하던 그때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에드가 뒤를 돌아보자 대공이 문가에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대공 전하.”
에드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물었다.
“들어가도 될까?”
요 며칠 대공은 그냥 들어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이렇게 허락을 구했다. 아마도 그들만의 공간이라는 걸 존중하기 위함 같았다.
“물론이죠, 형!”
대공의 손을 잡아끌어 안으로 이끈 로넨은 에드에게 물었다.
“그렇지? 에드.”
“물론입니다.”
대공은 창고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잘 가꾸고 있어?”
“형! 이것 보세요. 오늘은 테이블을 꾸며 봤어요.”
자신이 만든 공간이 자랑스럽고 뿌듯한 로넨은 대공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며 즐거워했다.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듣다가 시선을 돌렸다.
“에드가 꾸민 곳은?”
대공의 질문에 에드는 이마를 긁적였다. 대공은 창고 안에 에드의 자리도 따로 마련해 주었다. 커튼을 치고 커다란 가림막을 세워 분리해 둔 공간이었는데 제법 넓었다.
에드는 그곳에 뭘 둘까? 고민하다가 장작을 땔 때 화력이 오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마력탄을 구입해 이곳에 보관하기로 했다.
〈자금은 걱정하지 말고 에드가 꾸미고 싶은 대로 꾸며 봐.〉
그렇게 말하는 대공의 말에 좀 넉넉히 구해 뒀다. 원작에서 겨울도 아니건만 북부에 보름이 넘게 폭설이 내린다는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게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고, 정말 오랫동안 폭설이 내린다는 보장은 없지만.’
에드는 제 몫으로 생긴 공간에 폭설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해 두기로 했다. 북부 성에는 이미 마력탄이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비무환의 자세로 움직였다.
“그게 아직 꾸미진 않았고요.”
“그럼 마력탄만 구입한 거야?”
“네.”
대공은 웃으며 말했다.
“에드가 북부 성이 많이 추웠던 모양인데, 오늘부터는 장작을 더 때야겠어.”
대공의 오해에 에드는 바로 부인했다.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따뜻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치곤 마력탄을 너무 많이 주문했던데?”
대공이 시선을 돌리자 창고 앞에서 덜커덩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멈추는 소리가 났다.
대공을 따라 창고 밖을 내다본 에드는 입을 뗐다. 설레는 마음에 목소리에 조금 힘이 실렸다.
“구매한 마력탄이 지금 도착했나 봐요.”
“그런 거 같네.”
“나가서 보아도 될까요?”
“물론이지.”
대공의 대답에 에드는 빠르게 움직여 창고 밖을 나갔다. 짐수레에는 동글동글한 마력탄이 상자에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읏차, 에드는 힘을 줘 상자를 들었다. 그러자 짐수레에서 내린 텐스가 상자를 빼앗듯이 들어 그를 옮겼고, 밖으로 나온 대공도 수레에 담긴 상자를 들어 함께 옮겼다.
로넨도 에드의 옆에서 상자를 들려다가 힘이 부족한지 끙끙거리며 작은 상자를 들었다.
에드는 분주히 움직이는 그들을 보다가 상자를 들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놓으면 될까?”
“네, 한쪽에 차곡차곡 쌓으면 됩니다.”
대공이 상자를 내려놓자 그 위에 상자를 쌓은 텐스가 손을 가볍게 털며 물었다.
“그런데 웬 마력탄이야? 북부 성 창고에 이미 많이 있는데.”
에드는 미리 생각해 둔 답을 꺼내 놓았다.
“북부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마력탄부터 구입해 창고에 넣어 둔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저도 제 공간이 생겼으니 제일 먼저 마력탄을 챙겨 두려고요.”
“오, 에드도 북부 사람이 다 되었네.”
텐스의 이야기를 듣던 로넨이 외쳤다.
“그럼 나도 마력탄을 살래!”
결국 창고는 로넨이 구입한 마력탄까지 더해져 가득 찼다.
그리고 보름 후, 봄답지 않게 북부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날의 눈은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에드, 눈 온다.”
로넨과 북부 창고에서 마력탄을 정리하던 에드는 허리를 폈다. 창고의 반을 차지한 마력탄 상자를 한곳으로 밀어 두고 공간을 확보하던 중이었다. 로넨이 구입한 마력탄까지 더해지자 아지트보다는 다시 창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로넨이 문가로 달려갔다. 에드는 모포를 챙겨 로넨의 곁으로 다가갔다. 소리 없이 내린 눈이 벌써 길에 소복소복 쌓이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엄청 커.”
“봄인데도 함박눈이 내리네요, 도련님.”
“북부는 백작 저에서 못 보던 게 많은 것 같아. 그래서 좋아.”
에드는 로넨에게 모포를 둘러 주며 밖을 내다보았다. 빙의를 한 후 이렇게 많이 내리는 눈은 처음 보았다.
문가에서 손을 내민 로넨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얗게 눈이 쌓이는 길에 발자국을 뽁뽁 찍다가 추운지 두 손을 모아 입에 대고 호오, 하고 불었다.
그 모습을 본 에드가 옷걸이에 걸린 로넨의 모자와 외투를 챙긴 후 밖으로 나섰다.
“도련님, 외투 챙기셔야죠. 그러다 감기라도 드시면 큰일입니다.”
“응! 알았어.”
에드는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새하얀 눈길에 발자국을 찍기에 여념이 없는 로넨에게 뛰어갔다.
“어서요, 도련님.”
에드가 로넨에게 외투를 입히고 모자를 씌우자 로넨이 씨익 웃으며 에드에게 모포를 둘러 주었다.
“에드도 춥잖아.”
“감사합니다, 도련님.”
“다음에는 창고에 장갑도 가져다 놓자. 눈을 만지고 싶은데 손이 시려서 아쉬워.”
“네,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니야, 내가 갖다 놓을래. 에드랑 내 거랑 짝을 맞춰서 갖다 놓을 거야!”
“그럼 형 장갑도 부탁해도 될까, 로넨?”
로넨이 크게 외치는 순간, 대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 옆으로 고개를 빠끔 내민 로넨이 눈발을 헤치고 걸어오는 대공을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형! 눈이 엄청 많이 내려요.”
“자, 여기에 장갑이 있으니까 끼고.”
“북부는 봄에도 이렇게 눈이 오고 그래요?”
“더러 있는 일이니까 외출할 때는 항상 여분의 외투를 준비하는 것이 좋아, 로넨.”
“네, 형!”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에드는 몸을 돌렸다. 대공이 로넨의 손에 장갑을 끼워 주고 에드에게 걸어왔다.
“코가 빨간데, 에드.”
그 지적에 에드가 코를 가볍게 문지르자 대공이 팔에 걸친 도톰한 후드를 에드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하며 에드가 그를 걸치자 대공이 에드의 머리에 쌓인 눈을 가볍게 털어 냈다.
“아무래도 둘이 눈을 구경하고 있을 것 같아서 나와 봤어.”
대공은 에드의 손에도 장갑을 끼워 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아서 조금 더 밖에 있어도 될 것 같았다.
“나온 지 얼마나 되었지? 춥지는 않고?”
“방금까지 창고를 정리하다가 나온 거라 그리 춥지 않습니다. 모포도 덮고 있었고요.”
대공은 에드의 외투에 달린 모자를 씌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갑을 낀 로넨은 작은 눈덩이 두 개를 뭉쳐 눈사람을 만들고는 나뭇잎을 따다가 머리카락도 붙여주고 나뭇가지로 손도 달았다.
“에드는 눈을 본 적이 별로 없지? 남부는 겨울에도 눈이 그리 내리지 않으니까.”
대공은 로넨이 창고 창턱에 눈사람들을 쪼르르 세우는 것을 보며 질문했다. 로넨이 눈사람을 만들기 쉽게 자리에 앉아 눈을 뭉치고 있던 에드가 몸을 일으켰다.
“네.”
“이렇게 눈이 내리는 걸 보니 어때?”
“봄의 한가운데서 눈이 오는 걸 보니까 신기하기도 하고요, 북부에 올 때 걱정되는 점들이 있었는데 방한복의 질이 아주 좋고 마력탄도 효과가 좋아서 오늘보다 더 많은 눈이 내린다고 해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 로넨이 작게 뭉친 눈을 에드의 발치에 가볍게 톡, 던졌다. 대공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그에게도 작은 눈덩이를 살포시 던졌다.
“형! 눈싸움해요.”
“그리고 로넨 도련님께서도 눈을 아주 좋아하시는 것 같고요.”
대공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가 뭉쳐 놓은 눈을 집어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하며 로넨을 향해 말했다.
“이건 선공인 거지, 로넨?”
“아앗.”
대공이 눈을 던지기도 전에 로넨은 뒤로 돌아 뛰었다. 그리고 창고 안으로 달려가 작은 티 테이블을 방패로 삼으며 나왔다. 본격적으로 눈싸움에 대비하려는 모습이었다.
대공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발이 거세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생각했다.
‘로넨과 에드가 눈과 친해질 수 있게 조금 더 놀다가 들어가도 될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