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저녁때까지 휴식을 취하겠다는 로넨의 말에 방으로 돌아온 에드는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에드의 부작용이 되고 싶지 않아.〉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하듯이 말하던 대공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시선을 내리깐 에드는 자신의 손을 앞뒤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방을 나섰다. 대공의 집무실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갔지만 확실한 것은 이것 하나였다.
‘내가 대공 전하의 힘이 되고 싶다는 것.’
그래서 똑, 똑 대공의 집무실 문을 노크한 에드는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을 때 마음을 다잡았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간 에드는 책상에 앉은 대공을 바라보았다. 피로할 텐데도 평소와 다름없이 내정을 돌보며 최선을 다하는 대공의 모습에 에드는 경외감이 들었다.
에드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다정한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에드.”
“그게, 저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에드는 대공에게 자신의 힘, 치유의 힘에 대해 말할 생각이었다. 대공이 자신을 염려하여 거리를 두는 걸 알았으니 그에 대한 걱정을 덜고 그를 치유하고 싶었다.
“에드에 대한 이야기? 그렇다면 없는 시간도 내야지.”
펜대에 깃펜을 꽂으며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를 소파로 안내하며 대공은 책상에 있던 티포트와 찻잔을 챙겼다.
소파에 앉은 에드는 작게 숨을 골랐다.
대공은 에드가 긴장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분위기를 가볍게 풀며 차를 따랐다.
“아까 에드가 준비해 준 차야. 피로에 좋다고 해서 마셨는데 정말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라 아껴서 마시고 있지.”
대공이 내민 찻잔을 받아든 에드는 아직 따뜻한 온기가 가시지 않은 차를 마시며 말을 골랐다.
대공은 그런 에드를 여유롭게 기다려 주었다. 에드는 차분한 대공의 시선에 입을 뗐다.
“대공 전하, 아무래도 제가 전하의 걱정을 덜어 드릴 수 있는 조력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공은 어렵사리 꺼내는 에드의 말에 집중했다.
‘내 걱정을 덜어 줄 수 있는 조력자라니, 에드는 이미 나와 로넨에게 이미 귀한 사람인데.’
그러나 말을 끊지 않고 대공이 기다리자 에드는 이내 마음을 먹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게 저, 제가 미약하지만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치유의 힘?”
“네, 누군가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이 힘이 대공 전하의 부작용을 치유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차를 마시던 대공은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게 정확히 어떤 힘인지 알려 줄 수 있을까?”
차를 한 모금 마셔 입술을 적신 에드는 대답했다.
“저도 이 힘을 편의상 치유의 힘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게 정확히 어떤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에드가 시선을 마주쳐 오기에 대공은 계속 말하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전하께서 염려하시는 점이 어떤 건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하와 손을 잡고 잔 그다음 날에도 저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
“또한, 대공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것처럼 제 몸에 이상이 생긴다고 해도 전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하께서는 이 불확실한 힘이 꺼림칙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겠지만…… 저를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에드를 대공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관도 아닌 자가 치유와 관련된 힘이 있다는 것이 발각되면 자칫 종교 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는 부분이지. 또 신전이 아니라도 대가 없는 치유의 힘이라면 납치되어서 좋을 대로 이용당할 수도 있고.’
에드 역시 이걸 알고 있으니 지금까지 모두에게 비밀로 했던 거겠지.
대공은 주위를 살펴보았다. 집무실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혹시나 하여 주변을 면밀하게 경계한 후 말했다.
“에드, 그 힘이 언제 발현한 건지 기억나?”
에드는 원작을 떠올려 보았지만, 이 힘이 언제 생긴 것인지는 뚜렷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괜히 말을 지어냈다가 대공에게 의심을 사지 않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저도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상처가 생기거나 부상을 당했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빠르게 치유가 되어서 알아차렸습니다. 미미한 힘이었지만 남들과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테이블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린 대공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몰라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건데, 이 힘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는 말한 적은 없는 거지?”
에드는 신중한 대공의 질문에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네, 없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다른 사람을 치유해 본 적은?”
“그 역시 없습니다.”
대공을 턱을 가볍게 쓸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한테 이렇게 하는 이유가 뭐지, 에드?’
온실에서 에드가 자신의 손을 보고 심란해한다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자신에게 이 정도 일은 익숙해지다 못해 무뎌진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지금 당장이야 불편한 점이 있긴 해도 며칠 휴식을 취하면 낫는.
‘그런데 고작 그 정도의 불편함을 덜어 주고 싶다는 이유로 에드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움직이다니.’
대공은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포르르 튀며 톡, 터지는 것 같은 묘한 감각을 느꼈다. 간지러움과 닮은 느낌이었다. 가슴께에서 피어난 것이 느릿하게 발끝으로 퍼져 나가는 기분을 느낀 대공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래, 에드. 나를 믿고 이런 사실을 알려 줘서 고마워.”
“그럼 대공 전하, 다시 한번 제 능력이 효과가 있는지 확인해봐도 될까요?”
대공은 자신의 속도 생각도 모르고 오로지 치유에만 관심이 있는 에드를 보며 옅게 웃었다.
“에드.”
“네, 전하.”
“하지만 에드의 힘이 완벽하다는 보장이 없으니 우선은 부작용이 없는 것이 정말인지 확인해보고 그 후에 이야기를 계속해 보는 건 어떨까?”
“…….”
“그리고 에드의 힘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함구하도록 하고.”
대공의 손을 내려다보던 에드가 시선을 들었다. 실망이 깃들어 기운이 빠진 눈동자였다.
대공은 그런 에드를 보며 저도 모르게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토닥이고 싶었다
하지만 대공이 움직이기도 전에 에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죄송하지만 한 말씀 드려도 될지요.”
기운이 빠졌던 시선에 결연한 빛이 떠오르는 걸 보며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에드.”
“정말 감사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저를 걱정하셔서 해 주신 말씀임을 알지만, 저는 어릴 때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그저 닥친 운명에 순응하고 굴복해야만 했습니다.”
대공은 에드의 빈 찻잔에 따스한 차를 부어 주며 에드가 말을 이어 나가기를 기다렸다.
“지금까지 제게 있었던 일들은 대개 그랬습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아야 했고,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는 그런 상황의 연속이었지요.”
“…….”
“하지만 그랬던 제가 로넨 도련님께서 부당한 일을 당한다고 느꼈을 때 외면하지 않고 저 스스로 움직이자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외로웠던 로넨 도련님은 다정한 대공 전하를 만날 수 있었고, 일개 하인이었던 저는 대공 전하의 따스한 보살핌에 더 큰 세상을 보고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어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대공은 에드와 시선을 더 깊이 맞췄다.
“대공 전하께서 어떤 것을 걱정하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전하께서 겪고 계시는 부작용을 낫게 할 방법이 있는데 그를 시도하지 않아 후에 몸이라도 상하신다면…… 그건 저에게 몹시 마음이 아프고 가혹한 일이 될 것입니다.”
“…….”
대공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멈췄던 에드는 메마른 입술을 살짝 잘근거리다 입을 뗐다.
“그러니 대공 전하, 제게 전하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
대공은 에드의 거듭된 청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모르는 사이에 몸에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르니 먼저 주치의에게 진찰을 받자고 했다.
“에드, 북부에 도착한 이후로 몸에 전에 느끼지 못했던 이상 증세가 나타난 적 있나?”
에드는 주치의의 질문에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습니다.”
“밤에 잠은 잘 자고?”
“네, 방이 따뜻하고 이불도 포근하고 폭신해서 그런지 백작 저에 있을 때보다 더 깊이 잠이 드는 거 같습니다.”
“식사는 어떤가? 잘하고 있나?”
“물론입니다.”
진료 노트에 에드의 상태를 적으며 주치의가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북부가 추워서 걱정이었는데 로넨 도련님도 그렇고 에드도 그렇고,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북부 성의 주치의로서 굉장히 안심이네.”
“북부 성의 사람들이 잘 대해 주니 마음이 편해서 그런 것 같아요. 음식도 맛있어서 입에 잘 맞고요.”
“아주 다행이야.”
에드는 제 몸을 살피는 주치의 너머로 보이는 대공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팔짱을 낀 채 창가에 서 있는 대공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에드의 상태를 꼼꼼히 살핀 주치의는 들어 올린 에드의 셔츠를 내렸다.
“다 됐다, 에드.”
“감사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주치의가 대공에게 다가갔다. 그는 대공과 작게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인사를 꾸벅하고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