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91화 (91/198)

텐스의 대답에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였다. 그러자 로넨이 목 뒤로 팔을 두르며 자신을 꽈악 안아왔다. 조금씩 떨림이 느껴지는 손에 대공은 로넨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로넨이 대피할 곳은 본성의 지하 공간이었다. 민첩하게 움직인 대공이 지하 계단으로 들어서는 찰나 에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 전하!”

지하 계단으로 내려오는 대공을 발견하자 안쪽에 앉아 있던 에드가 달려 나왔다. 평소와 달리 격앙되고 염려가 가득한 모습에 대공은 로넨을 내려놓으며 옅게 웃었다.

“다행히 잘 도착해 있었네, 에드. 없었으면 찾으러 가려 했는데.”

“마물은 몇 마리나 나타난 건지요?”

대공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답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로넨을 잘 부탁해, 에드. 에드는 에드의 몸과 로넨을 잘 챙기는 것이 오늘의 임무야.”

에드의 앞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린 대공은 몸을 돌렸다.

그런 대공의 등을 바라보던 에드가 잽싸게 뛰어 대공의 뒤를 따라잡았다.

“그, 그럼 대공 전하께서는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고 돌아오시는 것이 오늘의 임무이십니다.”

대공은 등 뒤에서 들리는 에드의 목소리에 뒤로 돌았다. 그리고 오른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거였던가?”

대공이 내민 손 모양은 로넨과 에드가 약속할 때 만드는 형상이었다. 대공이 새끼손가락을 세우고 살짝 까딱이자 에드는 곧 제 손가락을 그 손가락에 걸었다.

“그리고 엄지도 이렇게 찍어야 합니다.”

에드가 엄지를 세우며 말하자 대공이 나직하게 웃으며 엄지를 세워 에드의 손가락에 맞댔다.

이 작은 맞닿음으로도 대공과 에드는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조금 더 손가락을 붙이고 있던 대공은 에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에드.”

어두운 숲속을 한 무리의 말들이 힘차게 달렸다.

“대공 전하! 오른쪽입니다.”

정찰대가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신호탄을 이르텔이 살피며 말했다. 대공은 불빛을 확인하며 속력을 높였다.

자작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사우니 숲은 안개가 자주 끼는 곳으로 시야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이르텔은 마물들이 사우니 숲에 출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동면에 깨기 전에 발견하기 힘들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르텔의 염려와 다르게 대공 전하가 말한 방향으로 정찰대를 보내니 그가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마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표식이 올라온 곳에 도착해 대공이 말에서 내리자 횃불을 들고 있던 정찰대가 마물이 있는 곳을 향해 빛을 비췄다.

“아란.”

대공의 묵직한 저음이 울리며 소환술로 불러낸 은빛 늑대가 숲에 나타나자 이르텔은 기사단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며 명했다.

“비행이 가능한 마물은 상대하기가 까다롭다. 궁수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대기 후 마물이 지상으로 떠오를 시 도망치지 못하게 경계, 나머지 대원들은 마물이 대공 전하와 궁수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그 순간 잠에서 깨듯이 두 마리의 마물이 몸을 털며 고개를 움직였다. 큰 독수리 같은 검고 큰 마물의 머리 깃털이 바짝 서자 기사단원들의 눈동자에 긴장감이 들어찼다.

이르텔은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었다.

“모두 위치로!”

이미 수차례 마물 퇴치 경험이 있는 단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자리를 잡았다.

콰앙!

그 순간 힘차게 달려 나간 아란이 오른쪽 마물의 다리를 콱 물었다. 마치 강철을 입에 문 것처럼 쇠 된 소리가 숲에 기분 나쁘게 울려 퍼졌다.

아란의 이빨에 벗어나기 위해 뒤로 물러나는 마물의 움직임에 거대한 흙먼지가 희뿌옇게 일었다.

이르텔이 외쳤다.

“마도구를 이용해 안개를 밀어내고 횃불에 불을 더 붙여 주위를 환하게 밝혀라! 잠깐이라도 시야가 사라지면 안 된다!”

단원들이 명을 수행하자 안개와 어둠이 밀려들었던 숲이 밝아졌다.

대공은 아란의 공격에 무방비해진 마물을 향해서 검을 날렸다. 이마 정중앙에 검의 일격을 맞은 마물이 끼기긱, 불유쾌한 소리를 내며 쿵, 뒤로 넘어갔다.

동시에 아란이 왼쪽 마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현세에 적응한 마물은 고개를 숙여 부리로 아란을 경계하며 날개를 퍼덕였다.

“보조 기사들은 마도구를 사용해 마물이 있는 곳을 향해 물을 뿌려라!”

숲에 쩌렁쩌렁 울리는 이르텔의 음성 뒤로 아란이 재차 허공으로 뛰어올라 마물이 날아오르는 것을 방해했다.

그 모습을 주시하던 대공은 아란이 마물의 한쪽 날개를 물어 꺾자 검을 손으로 쓸며 명했다.

“아란, 물러서.”

검 끝에 마력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며 대공은 검을 크게 휘둘러 벼락의 힘이 담긴 마법을 날렸다.

곧이어 굉음과 함께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사라진 곳에는 한 무더기의 재만 남아 있었다.

마물이 사라진 걸 확인한 단원들이 여기저기서 한숨을 내쉬던 중 대공이 안개 너머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한 마리가 더 있군.”

* * *

지하 대피소에서는 로넨과 에드, 제이논과 텐스가 램프를 켜고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있었다.

모포를 머리까지 덮고 무릎을 끌어모아 앉은 로넨은 두려움이 한결 가셨는지 편안한 표정으로 육포를 먹으며 텐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가고 우리만 여기에 있어?”

텐스는 로넨에게 물을 챙겨 주며 답했다.

“북부 성에는 대피소가 많습니다, 도련님. 그래서 북부의 주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동선을 짜서 철마다 훈련합니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이 모두 대피소로 잘 피해 있을 거예요.”

“아, 그렇구나. 우리는 이렇게 한곳에 모여있어서 다행이다. 만약 나 혼자 대피소에 내려와 있었으면 분명히 외롭고 무서워서 아직도 떨고 있었을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도련님. 도련님 곁에는 제가 항상 있을 테니 절대 혼자 떨어지실 일이 없답니다.”

제이논이 가슴을 쾅쾅 두드리며 말하자 로넨이 작게 웃었다. 지하는 밝지 않았지만 이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자 걱정과 긴장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아까 주기적으로 대피 훈련을 한다고 했잖아. 그럼 북부는 이런 일이 많은 거야?”

“수도에 비하면 마물의 출몰이 잦은 편이지만 일반적으로 대공 전하께서 금방 격퇴하셔서 영지에 큰 피해 없이 끝이 나곤 해요.”

“으응.”

제이논의 대답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로넨이 물을 마시며 시선을 돌렸다. 곁에 앉아 있는 에드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대피소에 들어온 이후로 에드의 말수가 줄어든 것 같았다.

‘마물이 나타나서 무서워서 그런가?’

에드가 걱정이 된 로넨이 그의 이름을 살짝 불러 보았다.

“에드.”

하지만 지하 대피소에 창이라도 작게 나 있으면 바깥 상황을 보기 좋을 텐데…… 하고 생각에 잠겨 있던 에드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에드, 도련님이 부르신다.”

제이논이 가볍게 허벅지를 톡, 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에드는 로넨이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걸 깨달았다.

“아, 네. 도련님.”

“괜찮아, 에드?”

“네, 괜찮아요. 도련님.”

“그럼 그때 이야기 좀 해 줘. 나는 마물을 보지 못했는데 에드는 저번에 사고로 틈새에 빠진 적이 있었잖아.”

로넨의 질문에 에드는 처음 균열의 틈에 빠졌던 날을 회상했다.

“……대공 전하께서 든든히 지켜주셔서 커다란 마물을 보았을 때도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로넨의 얼굴이 환하게 달아올랐다. 형의 활약에 이번에도 문제없이 마물을 무찌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에 피어오르자 발을 쭉 펴고 까딱거렸다.

데엥데엥데엥.

그때 성안을 울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로넨은 귀를 쫑긋 세웠다. 아까와는 다르게 느릿하게 울리는 종소리였다.

텐스와 제이논이 귀를 기울이는 걸 보며 로넨은 침을 꼴딱 삼켰다.

데엥데엥데엥.

그리고 다시 울리는 종소리에 텐스가 웃었다.

“이제 방으로 올라가셔도 됩니다, 도련님.”

* * *

방으로 올라온 로넨은 창문에 손을 짚고 밖을 바라보았다.

‘형이 돌아오는 것까지 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에드와 텐스의 만류로 결국 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밤이 늦었으니 아침에 일어나 전하를 뵙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련님.〉

텐스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깊은 한밤중이었고 마물을 무찌른 형에게도 휴식이 필요할 테니까.

‘그래도 보고 싶은데.’

로넨은 이제 이마까지 창문에 대고 밖을 바라보았지만 대공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에드, 나 이제 잘래.”

형이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초조했지만 결국 로넨은 창가에서 몸을 뗐다. 뒤에서 자신을 살피고 있는 에드가 쉬지 못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네, 도련님.”

로넨은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잠깐 뒤척였지만,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걱정과 다르게 금방 잠이 들었다.

에드는 로넨의 숨이 고르게 퍼지는 걸 내려다보다가 이불을 그의 목까지 끌어 올려 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던 에드는 돌연 몸을 돌렸다. 조금 돌아가는 길이지만 대공의 방을 지나가 그가 무사히 귀환했는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계단을 오른 에드가 복도로 들어서자 대공의 방에서 이르텔이 나오는 게 보였다. 어? 하며 그를 발견한 에드는 얼른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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