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곳까지 아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르텔에게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와 다름없었다.
고민에 빠진 듯한 이르텔의 모습에 일거리를 찾아 줄 것으로 기대한 에드는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음, 우선 가볍게 운동장 열 바퀴부터 돌아 볼까? 지금 당장 시킬 일은 없지만, 뭐든 체력이 갖춰져야 불시에 일이 닥치더라도 처리할 수 있는 법이거든.”
“아…….”
“아니면 팔굽혀펴기부터 하는 것도 좋고. 팔다리에 근육이 좀 붙으면 뛰는 것도 수월해지니 말이야.”
진중한 이르텔의 말에 짧게 침음한 에드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와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래도 현재 내 직책이 명확하지 않고 로넨 도련님의 전용 사용인이라 알려져서 이런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에드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아무래도 대공 전하를 찾아뵈어야 할 때인 것 같았다.
* * *
에드가 북부 성에서 대공의 방을 찾은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방문을 두드리는 일조차 긴장이 되어 에드는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겨우 똑, 똑 노크했다.
“대공 전하, 에드입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응, 들어와.”
안에서 들리는 인자한 목소리에 에드는 방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대공은 업무를 보던 중이었는지 옆에는 집사장이 서 있었다.
“그래, 에드.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일하시는데 제가 방해가 되었을지요? 그렇다면 그리 급한 문제는 아니니 일이 끝날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아, 에드. 에드의 방문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했잖아. 그러니 무슨 일 때문에 나를 찾았는지 편히 말하도록 해.”
에드는 사정을 설명하려다가 대공과 집사장의 궁금증이 담긴 시선을 한 번에 받자 어쩐지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집사장님은 대공 전하께서 어릴 때부터 함께 북부 성을 관리해온 어르신이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대공은 북부 성에 돌아왔을 때 집사장과 함께 있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그때마다 대공은 집사장에게 북부 성의 대소사는 물론이거니와 마음도 툭 터놓고 고민 상담을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어르신 앞에서 혹시 북부 성에서 제가 맡을 일이 없는지 물으려니 에드는 이제 처음으로 일을 시작한 신입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나도 집사장님처럼 대공 전하의 신임을 받는 인재가 되고 싶은데.’
어쩐지 두 사람 앞에서 조금씩 작아지는 기분은 느낀 에드가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게, 제가 북부 성에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요.”
“음, 그렇지.”
“혹시 제가 맡아서 할 일이 없을까 해서 말입니다.”
에드의 말에 그를 보던 대공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로넨을 돌보는 일로도 충분히 많이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로넨 도련님께서는 워낙 착하고 얌전하시다 보니 제가 신경 쓸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또 이곳에서는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도련님을 함께 돌봐 주고 계시기도 하고요.”
그러니 제이논이나 텐스처럼 대공 전하를 도울 수 있는 일을 달라며 에드가 눈을 빛내자 대공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대공은 올곧은 시선의 에드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것 같아 천천히 북부 성에 적응해 나갔으면 했는데.’
자신이 맡아서 할 일이 있었으면 한다니.
하기야 백작 저에 있을 때부터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감 있게 일하던 에드였다. 그를 배려하고자 했던 것이, 맡은 일을 수행하며 자긍심을 느껴 왔을 에드를 오히려 불안하게 만든 것 같아 대공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작게 한숨을 삭인 대공은 곁에 있는 집사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고 하는데, 집사장. 북부 성에서 에드에게 맡길 일이 있을까?”
말없이 대공과 에드의 대화를 듣던 집사장은 대공의 심기를 살피듯이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물론 있습니다.”
집사장의 대답에 에드의 눈이 반짝 빛났다. 북부 성을 오랫동안 지켜 온 그라면 자신에게 딱 맞는 일을 찾아줄 것 같아서 기대되었다.
“하지만 그 전에 거쳐야 할 절차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절차라면 어떤 절차를 말하는 거지?”
“에드에게 일을 맡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북부 성과 남부 헤린스 백작 저의 생활 양식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에드는 로넨 도련님을 모시는 자이고요.”
“그렇지.”
“그러니 우선은 에드가 북부의 생활 방식을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합니다. 아직 어리신 로넨 도련님께서는 곁에 있는 에드를 통해 많은 부분을 습득하실 테니 말입니다.”
집사장의 말이 일리 있다 생각한 에드는 대공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에드. 앞으로 공부를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
* * *
‘대공 전하께서 내가 원한다면 바로 수업을 시작할 수 있다고 했지.’
노트와 필기구를 정리해 챙긴 에드가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깐깐한 교사나 북부 성에서 오래 일한 관리인이 내 교육을 맡을 것 같은데, 대공 전하와 집사장님이 기대하고 계실지 모르니까 힘들더라도 열심히 따라가도록 해야지.’
오랜만에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에드는 대공과 함께 있던 집사장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로넨이 들어왔다.
“에드! 잘 잤어?”
“네, 도련님. 도련님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그리고 형이 식사를 마치면 에드와 응접실로 가라고 했거든. 이 말을 전하러 왔어!”
“응접실이요?”
“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식사하고 가자.”
도서관이나 자신의 방에서 개인 교육을 받을 줄 알았던 에드는 의아했다.
‘혼자서 공부하는 게 아닌 건가?’
그런 에드의 의아함은 응접실 문을 열었을 때 한층 더 짙어졌다. 테이블 위에는 온갖 질 좋은 색감의 천들이 펼쳐져 있었고 어째선지 집무실에서 일하고 있어야 하는 대공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서 와, 로넨. 그리고 에드.”
“어? 형도 와 계셨네요? 그런데 이건 다 뭐예요?”
에드는 로넨과 대공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분명히 오늘부터 북부의 생활 방식에 대해, 공부한다고 했는데 이 천들은 다 뭘까?’
“오늘 좀 할 게 있어서.”
“와, 형. 천이 정말 예뻐요! 에드, 거기에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봐. 촉감이 엄청 부드럽고 좋아! 색도 다 예쁘고.”
“아, 네. 도련님.”
응접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선 에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운 모직과 우아한 비단이 가득 쌓인 테이블 옆에는 며칠 전에 자신을 북부 성의 재단사라고 소개한 사용인이 서 있었다. 그는 다양한 장신구가 그려진 책을 펼치며 대공과 대화를 나누었다.
“보석의 종류는 고르신 천에 맞추어서 다른 걸로 바꿀 수도 있으니 마음에 드시는 장신구의 모양과 형태가 있는지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공 전하.”
“그렇군.”
그렇게 응접실 안의 분위기를 살피던 에드는 책자를 넘기는 대공의 손이 멈추자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 대공 전하. 오늘부터 북부 성의 업무에 대해서 배우는 게 아니었는지요?”
아무래도 제가 생각한 수업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 에드는 필기구와 노트를 품에 안은 채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러자 책자를 내려다보던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아직 응접실 한쪽에 멀뚱멀뚱 서 있는 에드에게 손짓했다.
“오늘은 북부 주민들이 입는 옷들을 공부하는 시간이니까 이쪽으로 와서 재단사가 어떤 옷감을 고르는지 살펴봐, 에드. 추운 지방에서는 옷을 지을 때 어떤 옷감을 사용하는지 배워야지.”
“아.”
에드는 너무 고급스러워 손을 대기도 겁나는 천들에 시선을 줬다가 황급히 걸음을 뗐다. 그렇게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가자 재단사가 그를 소파에 앉히고는 천들을 어깨에 대 보았다.
“에드처럼 늘씬한 스타일은 이런 어두운색이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북부는 겨울철에 해가 빨리 지는 날이 많으니 밝은색의 옷도 준비해 두는 건 어떠실까요?”
“그럼 둘 다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에드는 대공과 재단사가 주고받는 대화가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주의 깊게 듣다가 고민에 빠졌다.
‘이게 진짜 수업하는 게 맞는 걸까? 아무리 들어도 그냥 옷가게에서 옷을 맞추는 직원과 고객 같은데…….’
하지만 고민에 빠진 에드와 다르게 대공은 직원과 아니, 재단사와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형, 이건 어때요?”
그리고 그때 로넨이 새로운 옷감을 들고 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재단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로넨 도련님, 안목이 아주 훌륭하신데요?”
“그럼 색은 대충 정해졌으니 이제 옷감과 그에 어울리는 장신구를 골라 볼까?”
에드는 그런 세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
에드는 방에 걸린 옷들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북부 의복 양식을 가르쳐 준다며 수업을 시작한 이후로 에드의 방에는 옷들이 자꾸만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