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87화 (87/198)
  • “죄송합니다, 저보다는 대공 전하께서 다치시지 않아 다행입니다.”

    대공은 발갛게 달아오른 에드의 이마를 내려다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죄송하기는. 썰매를 타러 간다고 해서 외투를 챙겨왔는데 오히려 나 때문에 불상사가 생길 줄이야. 우선 주치의에게 진료받고 식당으로 내려가자, 에드.”

    “그리 세게 박은 건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요? 별로 아프지도 않고요.”

    에드의 대답에 대공은 걱정스럽다는 듯 답했다.

    “에드가 거울을 안 봐서 모르는 모양인데.”

    “…….”

    “지금 에드의 이마가 발긋하게 달아올랐거든.”

    그러니 잠시만 기다리라며 저를 의자에 앉히고 방을 나서는 대공의 등을 에드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 *

    “우와아!”

    썰매는 눈이 쌓인 경사가 있는 골짜기 사이를 빠르게 내려왔다. 에드는 썰매를 끌고 올라가다가 옆에서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로넨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꽉 잡으세요! 줄을 절대 놓치면 안 됩니다!”

    “으응! 알았어!”

    한 썰매를 같이 탄 로넨과 텐스의 목소리가 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활짝 웃으며 내려가는 로넨의 볼은 흥분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신나게 뛰어노는 그들을 보며 에드는 제 머리를 감싼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썰매를 타러 북부성을 나섰을 때, 대공이 직접 입혀 준 방한용 외투에 달린 후드였다.

    〈밖에 나가면 추우니까 답답해도 벗지 말고.〉

    에드에게 후드를 푹 덮어씌운 대공은 끈을 잡아당겨서 모자 크기를 조절하며 에드와 시선을 맞췄다.

    〈괜찮아, 에드? 소리가 잘 안 들리진 않고?〉

    〈……네, 괜찮습니다.〉

    대공은 로넨과 에드의 옷차림을 한 번씩 더 살펴본 후에야 그들이 마차에 탈 수 있게 문을 열어 줬다.

    에드와 함께 마차에 올라탄 로넨은 흥분한 채 말했다.

    〈에드, 오늘 우리가 탈 썰매는 떡갈나무에 강철 날을 붙인 거래! 그래서 눈길에서 슝슝 엄청 잘 나간대. 에드 것도 내가 챙겼으니까 재미있게 놀다 오자!〉

    목적지에 도착하자 로넨은 누구보다 빠르게 썰매를 챙겨서 눈이 쌓인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에드는 그런 로넨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북부성에 남아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대공이 생각났다.

    ‘……대공 전하도 이곳에 함께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끄응, 작게 침음한 에드는 북부 전체를 다스리는 그가 이런 일에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같이 있던 대공이 이곳에 없으니 머리로는 이해해도 어째선지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지는 것 같았다.

    “엣취.”

    ‘……아니, 이런 생각이 드는 건 그냥 골짜기가 추우니 몸과 마음이 헛헛해져서 그런 걸까?’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에드는 천천히 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어? 에드!”

    주방에 물을 가지러 갔던 에드는 주방 밖으로 나서려던 에린을 만났다. 그간 서로 일이 바쁘다 보니 마주쳐도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누기 어려워 아쉬웠는데 이렇게 그녀와 마주치니 반가웠다.

    “에린, 오랜만이네.”

    “그러게, 이렇게 대화를 하는 건 백작 저를 떠나고 거의 처음인 것 같아.”

    “그동안 잘 지냈어?”

    “응, 에드는?”

    “나도 잘 지냈어.”

    방금까지도 요리를 하고 있었던 건지 에린의 얼굴에 밀가루가 묻은 채였다.

    “에린, 얼굴에 밀가루 묻었다.”

    “어? 진짜?”

    그러면서 그녀가 밀가루가 묻은 소매로 얼굴을 닦으려 하기에 에드는 손수건을 꺼내며 그녀를 말렸다.

    “옷에도 묻었으니까 손수건으로 닦는 게 좋을 것 같아.”

    “고마워! 에드.”

    “많이 바쁜가 봐?”

    “아니, 그리 바쁘진 않아. 그런데 아직 북부성에 적응이 덜 되어서 그런지 그냥 정신이 없네.”

    에린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박박 문지르며 티 없이 웃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에드도 옅게 웃으며 답했다.

    “혹시 힘든 일 있으면 말하고. 우린 백작 저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잖아.”

    “괜찮아, 모두 다 잘해 줘서 그런 거 없어.

    “다행이다, 근데 어딜 가던 길이야?”

    “……아, 맞다. 나 달걀을 가지러 가려고 했었지.”

    그새 그걸 잊은 거냐며 에린이 제 머리통을 콩, 쥐어박았다. 에드는 에린이 손에 든 바구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내가 갖다줄까? 몇 개면 되는데?”

    “응?”

    “내가 갖다줄게.”

    “에드도 바쁜데 괜찮아?”

    에린은 말끝을 흐리며 에드를 바라보았다.

    ‘난 주방에만 있으면 되지만 에드는 북부성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느라 힘들 텐데.’

    하지만 그런 에린의 생각과 다르게 에드는 한가했다. 로넨과 함께 공부할 때 외에는 거의 자신의 방에서 놀고먹는 거나 다름없어서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썰매를 타고 온 이후로 벌써 2일이나 지났는데 지금까지 한 일이라곤 밥 먹고 자고 밥 먹고 자고를 반복한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헤린스 백작가에서 온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지내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제 앞의 에린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아니야, 마침 할 일이 없어서 성 지리도 익힐 겸 돌아다니는 거라서 괜찮아”

    “그럼 부탁할게, 에드.”

    “이런 걸로 뭘.”

    에드는 바구니를 움켜쥐고 주방을 나섰다. 하지만 주방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디선가 나타난 제이논을 만났다. 그는 에드에게 어딜 가는지 물으면서 자연스럽게 에드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빼앗아 들었다.

    “마침 닭장에 가는 길이었으니 내가 갔다가 올게!”

    대답도 듣지 않고 쌩하니 사라지는 제이논을 보며 에드는 그제야 들고 있던 바구니를 빼앗겼다는 걸 알았다.

    그 이후로도 이상한 일들은 계속 일어났다.

    세나를 만나 이불 걷는 걸 도와주러 가던 중에 어디선가 나타난 텐스에게 그가 도우려던 일을 빼앗겼고, 무거운 짐을 나르던 하인을 발견해 짐을 들어 주려던 중에는 이르텔이 나타나 그 대신 짐을 날랐다.

    졸지에 계속해서 할 일을 강탈당한 에드는 방으로 돌아와 고민에 빠졌다.

    ‘자꾸 내가 할 일을 빼앗기는 느낌인데…… 설마 이게 텃세인 걸까?’

    로넨 도련님의 하인이라는 직위는 있었지만 원래 자신은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이었으니까.

    오랫동안 북부성을 위해서 일해 온 사용인들로서는 에드가 굴러온 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에드는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어째선지 복도에서 기웃거리는 제이논을 발견하고 그 앞으로 달려가 물었다.

    “제이논, 제가 해야 할 일 없을까요?”

    그러자 느긋하게 돌아다니던 제이논이 꼬리에 불이 붙은 닭처럼 에드에게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 바쁘니까 나중에 이야기해!”

    “안 바쁜 거 다 아니까 지금 이야기해요.”

    에드는 제이논의 뒤를 힘차게 따라붙었다. 그러나 북부성의 지리를 잘 아는 그를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새 계단 아래로 사라져 버린 제이논의 모습에 허탈해진 에드는 이번엔 자신과 제이논의 추격전을 구경하던 텐스를 발견하고 다가가 물었다.

    “텐스, 저에게 맡길 일 없나요?”

    텐스는 더 민첩했다. 대답도 없이 제이논 보다 빠르게 에드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에드는 그런 텐스를 쫓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을 껌뻑였다.

    ‘아, 아니. 대체 뭐가 저렇게 빨라?’

    바람처럼 사라지는 텐스의 모습에 허, 짧게 한탄한 에드는 북부 성 후원으로 나왔다. 이제는 북부 성이 제법 익숙해져 길을 잃을까 염려하는 마음은 없었다.

    에드는 후원에 핀 꽃들을 바라보다가 근처를 지나가는 이르텔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빠르게 달려갔다. 후원 곁에 있는 연무장에서 나오는 길인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이르텔 경.”

    “안녕, 에드.”

    “그런데 혹시 저에게 시키실 일 없으신가요?”

    “시킬 일?”

    에드의 물음에 이르텔이 턱을 쓸었다. 그러고는 에드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며 생각했다.

    ‘지금 겨우 후원에서 연무장까지 달려와 놓고 숨이 차서 이렇게 헐떡거리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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