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86화 (86/198)

“네, 아주 따뜻합니다.”

“봄이라 평상시보다 따뜻하기는 한데, 에드는 북부에 처음 온 거라 날씨에 적응하려면 시일이 좀 걸릴 거야.”

대공의 손길이 닿는 곳을 함께 눈길로 따르던 에드는 문득 신기함을 느꼈다.

혼자 있을 때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던 방 안의 풍경이 그와 함께 있자 시야에 속속들이 걸려들었다. 대공이 만지작거리는 캐노피에 은색 자수가 수놓아져 있다는 것도 지금 깨달았다.

“그러니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줘, 에드.”

에드는 현재 방에 갖춰진 물품들만 해도 이미 과하다고 생각했기에 대공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방을 써도 되는 걸까요?”

“오히려 급하게 준비하다 보니 더 큰 방을 주지 못해서 미안한걸. 참, 몸은 어때? 아픈 곳은 없어?”

“……아픈 곳이요?”

에드는 자신이 아픈 곳이 있었나 생각하다가 대공이 아직도 제가 마차에서 한 잔기침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혀 없습니다. 몸이 튼튼해서 원래 잔병치레를 잘 안 하기도 하고요,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봄이라서 그런지 북부가 생각보다 따뜻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대공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런데 에드, 손에 베개는 왜 들고 있어?”

에드는 대공의 물음에 자신이 베개를 꽉 움켜쥐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게, 도련님의 가방이 꽉 차 제가 대신 챙겼는데 미처 전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손자국을 따라 구겨진 베개를 가볍게 잡아당겨 펴며 에드가 답하자 대공이 손을 내밀었다.

“그럼 힘들게 들고 있지 말고 나한테 줘. 에드는 아직 성 지리를 잘 모르니까.”

“네, 감사합니다.”

팔을 내밀어 베개를 건네던 에드는 대공이 자신과 손가락이 살짝 닿자 손을 뒤로 빼는 걸 보았다. 마치 불에 덴 것처럼 빠른 움직임이었다.

‘……음, 아닌가? 대공께서 우연히 손을 뒤로 뺀 걸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걸까?’

에드가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베개를 챙긴 대공은 가져온 숄을 에드의 어깨에 둘러 주며 말했다.

“그럼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일찍 자.”

목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는 세심한 손길에 등으로 온기가 느껴졌다. 에드는 대공의 턱을 올려다보다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푹 쉬고.”

“대공 전하께서도 고단하실 텐데 오늘은 술을 드시지 말고 편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에드가 그렇게 말하니 오늘은 꼭 금주해야겠는데? 잊지 않고 기억할게.”

“네, 대공 전하.”

짤막한 인사를 하며 대공을 배웅한 에드는 방문을 닫고 방에 오도카니 섰다. 대공과 함께 있었을 땐 아늑하고 환해 보이던 방이 갑자기 너무 넓고 휑하게 느껴졌다.

벽난로에서 날름대는 불길에 시선을 줬던 에드는 책상 앞에 앉았다.

‘북부로 오는 동안 사람들이랑 붙어 지내서 그런가.’

이렇게 혼자 있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라 그런지 이 상황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피식 웃은 에드는 수첩에 글을 써 내려갔다. 북부성에 오는 동안 있었던 일들을 짤막하게 적으려 했는데 생각해 보니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대공 전하와 있었던 일들, 대공 전하께 받은 회중시계와 만년필, 대공 전하와 함께 본 환영 인파…….’

그렇게 글을 써 내려가던 에드는 이상한 점을 느끼고 만년필 뒷부분으로 이마를 긁었다.

“어째, 대공 전하와 있었던 일들만 기억나는 것 같은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왠지 모를 아릿함을 느끼던 에드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일찍 잠자리에 들라는 대공의 말도 있었지만, 내일부터는 북부성의 일과에 적응해야 했으니 첫날부터 늦잠을 잘 수는 없었다.

에드는 방 안의 램프를 모두 끄고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

하지만 이내 다시 눈을 뜬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요즘 대공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정확히는 통나무집에서 고구마를 함께 먹으며 대화를 나눈 일 이후로…….

‘혹시 그때 내가 대공 전하께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던 에드는 끝내 짚이는 게 없자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내가 로넨 도련님도 아니고…… 대공 전하께서 일일이 나를 챙겨 주실 수는 없는 일이지.’

그래, 이게 다 북부로 오는 동안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져 생긴 감정이었다.

이제 북부로 돌아왔으니 대공 전하도 북부성의 주인으로서 생활해야 하고, 저도 하인으로 돌아가 로넨이 이곳에 보다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노력해야 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런 거였다. 현재 제가 느끼는 사소한 감정 따위가 아니라…… 그러니 얼른 자자고 마음먹으며 에드는 눈을 감았다.

* * *

“에드!”

에드는 귓가에 울리는 발랄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추자 로넨이 눈앞에 있었다.

“어디 아파?”

로넨이 에드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물었다.

“아뇨, 아프지 않습니다.”

잠이 덜 깬 에드는 눈을 비비며 답했다.

“그런데 눈이 왜 그래?”

“눈이요?”

에드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깜빡이다가 로넨이 작은 손으로 주먹을 쥐며 자기 눈에 갖다 붙였다.

저게 무슨 뜻일까? 싶어 올려다보다가 곧 깨달았다.

‘아, 눈이 저렇게 부었다는 소리구나.’

너무 많이 자서 그런 것 같은데…… 얼마나 잔 거지?

창가로 시선을 준 에드는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걸 보고 작게 혀를 찼다. 어제 잠이 안 온다고 고민하던 게 무색하게 잠이 들자 한 번도 깨지 않고 정말 푹 잤다.

그를 깨달은 에드는 몸을 일으켰다.

“죄송해요, 도련님. 제가 너무 늦게 일어났죠?”

“그게 왜 죄송해? 형이 그랬어. 에드가 북부성을 편하게 느껴져서 푹 자는 것 같다고.”

“…….”

“그래서 안 깨우고 있었는데 더 자면 식사도 못 하고 썰매도 못 타러 갈 것 같아서 지금 깨운 거야.”

“썰매요?”

“응! 봄이라서 눈이 녹았을 줄 알았는데 북부는 추워서 아직 뒷산에 썰매 탈 만한 곳이 있대. 그러니까 얼른 준비하고 가자, 에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로넨은 에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양손을 악수하듯이 잡고 위로 아래로 붕붕 흔들었다.

“응? 같이 가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도 없이 이미 북부의 일원이 된 천진난만한 로넨의 모습에 에드는 옅게 웃었다.

“네, 알겠습니다. 도련님.”

로넨은 환하게 웃으며 맞잡은 에드의 손을 몇 번 더 붕붕 흔들고서야 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가 외출 준비를 하자 로넨이 방을 나서며 말했다.

“난 텐스와 썰매 도구를 확인하고 올게. 형이 식사를 하고 나가라고 했으니까 준비되면 먼저 식당으로 내려와, 에드”

속사포처럼 말한 로넨은 바람 같이 방을 나섰다.

“그런데 그 식당이 어디에 있는데요?”

하고 에드가 물었으나 이미 방문은 쾅, 닫힌 후였다. 신이 난 로넨의 모습에 이 이상 지각할 수 없었던 에드는 빠르게 움직였다.

서둘러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그는 방문을 열었다. 북부성의 사용인에게 식당 위치를 물어보자고 생각하며 밖으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가 잽싸게 멈췄다.

“앗.”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문 앞에 서 있던 대공의 가슴팍에 이미 이마를 박고 말았으니.

“아, 이런. 괜찮아? 에드?”

“…….”

그와 동시에 오랜만에 대공의 손길이 제게 닿자 에드는 묘한 그리움에 사로잡혔다.

대공의 손은 제 기억보다 따스했다.

에드의 방문을 노크하려던 대공은 문이 벌컥 열리며 가슴에 뭔가가 퍽 부딪히는 충격을 느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앞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방 밖으로 빠르게 나오던 에드였다.

깜짝 놀란 에드가 뒤로 성큼 물러나다가 발목을 삐끗하여 몸이 흔들리는 게 보이자, 대공은 지체하지 않고 에드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끌어당겼다.

“아, 이런. 괜찮아? 에드?”

“…….”

그 바람에 대공의 품에 안긴 것처럼 끌려간 에드는 코끝에 느껴지는 대공의 체향과 정수리에 닿는 옅은 숨결에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대로 대공의 가슴에 옆통수가 닿은 에드는 머리에도 심장이 생겨 쿵쿵, 세차게 뛰는 것 같았다.

대공은 에드의 이마에 손을 가볍게 누르며 고개를 기울였다. 손끝에 닿은 에드의 피부는 매끄러웠고 손바닥에 감기는 촉감은 기분 좋았다. 푹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윤이 나고 혈색이 도는 얼굴이었다.

‘제법 세게 박았는데 괜찮으려나?’

그러다 에드와 눈이 마주친 대공은 손을 떼며 에드가 바로 설 수 있게 도와줬다.

에드는 대공의 걱정과 다르게 이 정도 부딪힌 걸로는 아프지도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괜찮냐는 그의 물음에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느낀 대공의 손길만이 신경 쓰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대공의 팔이 닿았던 허리는 뜨끈뜨끈하게 열이 올랐고, 힘껏 박은 것도 아니건만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처럼 홧홧한 열감이 이마에서 느껴졌다.

에드는 손으로 가슴을 가볍게 누르며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쿵, 쿵 뛰는 가슴을 도닥이며 뒤늦은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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