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본격적으로 에드의 몸을 진찰하려던 주치의는 대공에게 시선을 돌렸다. 약간 맥이 풀린 듯한 목소리였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주치의는 속으로 생각했다.
‘대공 전하가 원래 이런 분이셨나? 지금까지 내가 봤던 전하는 부하들이 몸살이라도 나면 북부를 지킨다는 기사가 제 몸도 못 돌본다고 주의하라며 혼내시던 분이셨는데.’
물론, 에드가 기사는 아니었지만 이런 일로 득달같이 자신을 부르다니 지금까지 본 전하와 온도 차가 커도 너무 컸다.
하지만 이를 입에 담는 대신 주치의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체온을 확인하며 에드의 몸 상태를 살핀 주치의는 가슴에서 청진기를 떼며 말했다.
“역시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그렇군, 수고했네.”
“아닙니다, 대공 전하.”
진찰 가방을 챙기며 주치의는 덧붙였다.
“그리고 목이 건조하거나 몸에 한기가 느껴질 땐 따스한 물이나 차를 섭취하면 좋습니다.”
“그래, 알겠어. 신경 쓰도록 하지.”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주치의와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대공은 흘러내린 모포를 다시 에드에게 덮어 주며 꼼꼼히 여몄다.
“그럼 잠깐만 있어, 에드. 따뜻한 물을 가져올 테니.”
그렇게 말하며 마차를 나서는 대공의 등을 올려다보던 에드는 이마를 가볍게 문질렀다.
“…….”
어쩐지 이마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 * *
밤낮을 잊고 빠르게 달리던 마차가 점점 속력을 줄였을 때 밖에서 큰 외침이 들렸다.
“성문을 열어라! 북부 게렁틴의 수호자이자 주인이신 아스넬 린든 대공 전하께서 돌아오셨다!”
안에서 마차에 붙은 가문의 상징을 확인했는지 거대한 성문이 크기에 맞지 않게 빠르게 열렸다.
행렬을 이끄는 이르텔을 시작으로 마차들이 성문을 지나가자 대공이 올 거라는 소식을 들은 건지 해가 저물어가는데도 영지민들이 나와 대공의 도착을 축하했다.
“대공 전하! 창문을 열고 인사를 해 주세요!”
“설마 몸이라도 상하신 건 아니시겠죠?”
마차 안으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대공은 마차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 시민들과 가볍게 눈을 맞추며 옅게 미소 지었다.
대공의 몸에 몸을 기대고 설핏 잠이 들었던 로넨은 밖의 웅성거림에 부스스 눈을 떴다. 작게 하품을 하며 무슨 일인가 주위를 살피다가 대공이 가볍게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니 배시시 웃었다.
“와, 정말 인형 같지 않아?”
“옆으로 좀 비켜 봐. 나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어머, 방금 대공 전하께서 머리카락을 넘겨 주신 것 같은데 어쩜 저렇게 다정해 보이실까.”
대공의 몸에 가려진 로넨을 보려는 사람들의 눈길에 로넨은 빠끔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보다 도로 대공의 뒤로 몸을 숨겼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로넨이 무척 귀여웠는지 환하게 웃었고 대공 일행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공 전하, 대공자님! 무사히 북부로 돌아오신 걸 축하드립니다!”
대공이 사람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다 창문을 닫자 로넨이 발을 까딱이며 말했다.
“북부는 제 생각보다 더 활기차고 밝은 것 같아요.”
“평소에도 밝고 활기차지만, 오늘은 로넨이 돌아온 것 때문에 특히 더 그런 것 같아.”
“정말요?”
“다들 로넨을 그리워하고 있었거든.”
에드는 대공과 로넨의 대화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런 모습도 다 대공 전하가 북부를 잘 이끌고 지켜 왔다는 증거겠지.’
평평한 길을 달리던 마차가 구불구불한 길로 들어서며 사람들의 기척이 사라지자 에드는 결국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창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서 북부성이 보이기 시작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성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북부성을 돌보는 이들이 나와 대공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그리고 대공을 뒤따라 마차에서 내리는 로넨을 향해서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감격에 겨운 인사를 했다.
“대공자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북부성의 집사장 조쉬입니다. 이렇게 대공자님을 다시 뵐 수 있어서 이제 이 노부는…… 여한이 없습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앞으로 최선을 다해 대공자님을 모실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집사장님.”
“말씀 편히 해 주십시오. 대공자님, 저도 그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마차에서 내린 에드가 로넨의 뒤쪽에 서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자 제이논이 그의 어깨를 톡, 쳐 왔다.
에드가 시선을 돌리자 제이논이 고개를 까딱했다.
“에드, 지낼 방을 알려 줄게.”
“아, 네.”
에드는 간단히 짐을 챙겨 앞서 걷는 제이논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본성으로 들어서는 제이논에게 의아함을 느꼈다.
“……여긴 본성 아닌가요?”
“어, 맞아.”
에드는 질 좋은 대리석이 깔린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제이논을 놓치기라도 할까 봐 바짝 따라붙었다. 이 넓은 본성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곤란했다.
제이논이 안내한 곳은 본성의 2층 방이었다. 에드는 자신이 지내기에는 방이 너무 넓고 깨끗한 것 같아 입구에 멈춰 선 채 물었다.
“진짜로 제가 이 방에서 지내는 건가요?”
제이논은 잘 정돈된 방을 둘러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부족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그렇게 말하며 한쪽에 짐을 내려놓고 방을 나서려는 제이논을 에드가 붙잡았다.
“너무 좋은 방 아닌가 해서요, 제가 쓰기에.”
제이논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 방은 전하의 지시로 준비한 방이니 걱정하지 말고 쉬고 있어. 그럼 나는 좀 바빠서 이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빠르게 걸음을 떼는 제이논을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던 에드는 가만히 서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침대에 질 좋은 나무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책상만 해도 과분한데 바닥에는 푹신한 양탄자까지 깔려 있었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귀한 귀족가의 자제들이 쓸 것 같은 방인데.’
한참이나 그렇게 서 있던 에드가 조심스럽게 의자를 빼 책상 앞에 앉고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품속에 있는 만년필을 손끝으로 매만지던 그는 곧 펜을 손에 쥐고 수첩을 폈다.
“아, 맞다. 참.”
그러고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자신의 짐이 놓인 곳을 바라봤다.
자리에서 일어난 에드는 짐가방을 풀었다. 탁, 탁 버클이 명쾌한 소리를 내며 열린 가방에는 작은 하늘색 베개가 들어 있었다.
로넨의 애착 베개였다.
〈에드, 이것 좀 넣어 주면 안 돼?〉
〈어? 이건 도련님께서 아끼시는 베개잖아요?〉
〈응, 그런데 가방에 짐이 너무 많아서 넣을 곳이 없어.〉
어제 숙소에서 짐을 싸던 에드에게 로넨이 터덜터덜 걸어와 부탁한 것이었다.
에드가 로넨의 가방을 살펴봤더니 그 안은 이미 대공에게 받은 선물들로 꽉 차 있었다. 제법 큰 가방이었음에도 받은 물건들이 하나둘씩 쌓이다 보니 더 이상 다른 것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사실 에드의 가방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나, 짐을 꾹꾹 눌러 담아 요령 있게 자리를 만든 그는 로넨의 베개를 가방 속에 넣는 데 성공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며 에드는 베개를 집어 들었다.
‘……베개를 찾을 수도 있으니까 미리 가져다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한 에드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 보았다. 복도 중간에 있는 청동 재질의 조각상과 오른편에 있는 계단을 살펴보다가 방문을 닫았다.
이제 막 북부성에 도착한 상태라 로넨의 방이 어딘지도 몰랐다.
“이를 어쩐다.”
시선을 내린 에드는 베개를 손으로 살살 쓸었다.
그때 에드가 등을 기대고 있는 문을 똑, 똑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네.”
빠르게 대답한 그가 문을 열자 대공이 서 있었다.
“에드, 방은 마음에 들어?”
에드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서 있는 대공을 올려다보다 뒤늦게 입을 열었다.
“물, 물론입니다, 대공 전하. 이렇게 좋은 방을 준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내가 에드의 방을 구경해도 될까?”
“아, 언제든지 편하게 들어오셔도 괜찮습니다.”
“그럼 실례.”
방으로 들어온 대공은 벽난로에 장작이 충분한지와 창으로 외풍이 들어오지는 않는지를 살피다가 에드에게 물었다.
“방 온도는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