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살이라, 그 나이는 자신이 부모님과 로넨을 잃고 혼자가 됐던 나이였다.
‘그때 나는 어땠더라.’
부모님을 잃은 상실감에 괴로워했고 로넨을 찾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때로는 무기력했던 날들이기도 했다.
에드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아픔을 느꼈을 그가 안타까웠고 한편으로는 동질감을 느꼈다.
‘나는 부모님 대부터 시중을 든 사용인과 북부를 함께 지킨 부하들과 지내며 로넨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시련을 이겨내 왔는데.’
에드, 너는 누구와 함께 어떤 생각으로 그 힘겨움을 견뎌 왔을까?
로지 보육원장?
아니면 홀로 가꾸던 집?
어쩌면 그런 공통점 때문에 에드를 처음 봤을 때 한 번 갈 눈길이 두 번 가고 한 번 닿을 손길이 두 번 닿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로넨에게 잘해 준 것과는 별개로 침대에 누워 있던 창백한 얼굴에 자꾸만 눈길이 쏠렸던 이유 역시도.
그리고 그 마음은 점점 더 쑥쑥 자라서 이제 대공은 로넨과 에드가 나란히 서서 꼬치구이를 먹는 모습만 봐도 그렇게 행복하고 배가 부를 수가 없었다.
로넨과 같은 회중시계를 목에 걸고 시간을 확인하는 것을 봤을 땐 어쩐지 그와 한 가족이 된 것처럼 느껴져서 가슴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이 오히려 에드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지.’
그와 손을 잡고 잔 날 자신의 몸 상태가 나아진 것은 좋았으나 찬찬히 생각해 보니 그만큼 에드의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전에서 에드의 몸이 좋아 보이지 않던 것도 나와 닿아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고.’
어떤 식으로 자신의 몸 상태가 좋아진 것인지 알 수 없었으니 대공은 에드와의 신체적인 접촉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고민을 숨기며 부지깽이로 살살 고구마를 굴린 대공은 잘 익은 것들을 골라냈다. 그리고 가장 크고 맛있어 보이는 고구마를 그릇에 담아 에드에게 건넸다.
“자, 에드.”
“어? 대공 전하부터 드시지 않으시고요.”
“음, 지금 내 손이 좀 뜨거운데.”
“아, 죄송합니다.”
대공의 엄살에 에드가 얼른 그릇을 받아 들자 대공이 옅게 웃었다.
에드는 뜨거울 줄 알았던 그릇이 딱 들기 좋을 만큼 따뜻함이 느껴지자 고개를 갸웃하다 결국 작게 웃고 말았다.
“잘 먹겠습니다, 대공 전하.”
“그래.”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은 에드가 작은 입을 벌려 껍질 벗긴 고구마를 앙, 베어 물자 대공은 어쩐지 배 안쪽이 간질간질해졌다.
‘……저기에 저번에 사 준 토끼 망토를 입으면 영락없는 작고 귀여운 초식동물인데.’
대공은 그릇에 고구마를 더 옮기며 소리 없이 웃었다. 부지런히 먹여 조금 야윈 것 같은 에드를 조금 더 살찌우고 싶었다.
* * *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에드는 폭신한 침낭 안이었다. 분명히 기억 속에는 고구마를 먹고 대공과 벽난로 앞에 앉아 대화를 나눴는데 자신도 모르게 어느 순간부터 꾸벅꾸벅 존 모양이었다.
‘……대공께서 옮겨 주신 모양이네.’
가볍게 얼굴을 두드리며 일어난 에드는 곁의 침낭에서 늦잠을 자는 로넨을 깨웠다. 밤늦도록 내리던 비는 어느새 그쳤고 밖에서는 짐을 옮기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도련님, 로넨 도련님.”
“으응, 에드. 나 졸린 데 조금만 더 자면 안 될까?”
“비가 그쳐서 이제 출발해야 할 것 같아요. 우선 일어나셨다가 너무 졸리시면 마차에서 주무시면 어떨지요.”
“으응.”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침낭 안으로 꼬물꼬물 파고들려는 로넨을 깨운 에드는 밖으로 나왔다.
에드의 손에 이끌려 느린 걸음으로 마차로 향하던 로넨은 “아, 맞다.” 하면서 뽀르르 달려갔다. 그러더니 마차 앞에서 고개를 요리조리 움직이며 뭔가를 살폈다.
로넨의 뒤를 따른 에드가 물었다.
“뭘 찾으세요? 도련님?”
“응? 아! 다행히 안 지워졌다.”
로넨이 뭘 하는가 했더니 며칠 전에 그어 놓은 키 표시 선을 확인하고 있었다. 로넨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위로 끌어 올리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더니 뒤로 돌아 마차에 몸을 기댔다.
“에드, 나 키 컸나 봐 줘.”
“네, 잠시만요. 도련님.”
에드는 고개를 숙여 펜으로 그었던 표시를 확인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 도련님. 그새 키가 크신 것 같아요.”
“정말?”
“네!”
“얼마나?”
마차에 기댔던 몸을 앞으로 통, 움직인 로넨이 에드를 올려다보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에드가 손가락으로 표시하며 이만큼이요, 하자 로넨이 눈에 띄게 실망했다.
“에게, 겨우 그만큼?”
“에게라니요, 도련님? 불과 며칠 사이에 이렇게 자라신걸요?”
“이렇게 커서 언제 에드를 따라잡지?”
부드러운 눈길로 로넨을 바라보던 에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도련님, 제 키를 목표로 하시는 건가요? 저보다 키가 작은 사람도 있는데요.”
“왜냐하면.”
“네, 왜냐하면요?”
로넨은 대답을 잠시 망설이다가 까치발을 들고 입을 열었다.
“……어, 그게 내가 에드를 좋아해서 그래. 그래서 얼른 커서 에드를 지켜 주려고.”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에드의 귀에 작게 속삭인 로넨은 부끄러운지 얼른 마차로 쏘옥 들어갔다.
대공은 로넨과 에드가 아침부터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면서 주변을 정리하다가 마차 앞에 홀로 서 있는 에드에게 다가갔다.
“왜? 로넨과 무슨 비밀 이야기를 나눴기에 그렇게 멍하니 있어?”
에드는 물끄러미 대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게, 이런 말을 듣는 게 처음이라.”
“무슨 말을?”
“로넨 도련님이 빨리 커서 절 지켜 주시겠다고 해서요. 책에서 그런 표현을 볼 때는 몰랐는데, 막상 누군가한테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되게 묘하네요.”
지켜 주겠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빙의하기 전이든, 빙의한 후든.
에드는 이마를 긁적이며 웃었다.
분명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로넨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일이 까마득히 먼일처럼 느껴졌다.
마차는 비로 발이 묶였던 날 이후로는 아무런 사고 없이 빠르게 달렸다.
“에드, 춥지 않아?”
“저는 괜찮…… 아, 혹시 대공 전하께서 추우신 건가요?”
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도톰한 옷을 챙기려 하자 맞은 편에 앉은 대공이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니, 나는 괜찮은데 에드는 어떤가 해서.”
“저도 아직 괜찮습니다.”
확실히 북부에 가까워질수록 기온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에드는 대공의 대답에 도로 자리에 앉으며 팔뚝을 가볍게 비볐다. 대공의 대답을 듣고 나자 살짝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에드가 에취, 하고 가볍게 재채기하자 로넨이 옆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것 봐, 에드. 춥지 않은 게 아니잖아. 북부성에 도착하기 전에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란 말이야.”
로넨은 에드에게 가볍게 잔소리하며 마차 뒤 공간을 마구 파헤쳤다.
“괜찮아요, 도련님.”
하지만 대답도 없이 열심히 짐칸을 헤집은 로넨은 토끼 망토를 찾아와 에드에게 덧씌워 줬고, 대공은 거기에 더해 모포를 목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며 물었다.
“정말 괜찮아? 에드?”
에드는 가벼운 기침에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행동하는 대공과 로넨에게 목에 힘을 주어 답했다.
“네,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리고 에드는 제 대답에 대공이 평소처럼 이마에 손을 대 직접 열을 확인할 줄 알았다.
하지만 대공은 에드의 모포를 더 끌어 올리며 바람이 들지 않게 꼼꼼히 여며 준 후 따끈하게 열이 나는 마도구를 건네줄 뿐이었다.
“추우면 꼭 이야기해, 에드.”
두툼한 모포로 감싸인 등을 살짝 토닥거린 대공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마차가 멈췄을 때 주치의를 불렀다.
“에드의 몸 상태를 살펴봐 주게.”
마차 안으로 들어선 주치의는 에드의 체온을 재고 상태를 확인해 본 후 에드에게 물었다.
“어디 몸이 불편한 곳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체온도 정상이고 달리 아픈 곳도 없다 하니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대공 전하.”
주치의의 보고에 팔짱을 낀 채 에드의 곁에 머물던 대공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진찰해 봐, 방금 전에 찬바람을 맞고 기침을 해서 걱정이 되니.”
“아, 기침을 했습니까? 에드, 기침을 얼마나 했지? 목이 간질거리거나 가래가 나오진 않았고?”
이 상황에 민망함을 느낀 에드가 겨우 2번 했다는 대답을 하기도 전에 대공이 답했다.
“크게 두 번 했네.”
“……두 번, 말입니까?”
“그래, 크게 두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