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83화 (83/198)

“지금 바로 나가는 건 안 될까?”

그때 빗줄기를 뚫고 대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지, 나무판자를 조금 더 앞으로 밀어. 그래야 그걸 밟고 바퀴가 나오기 쉬우니까. 그리고 짐수레 안에 단단한 나무가 있다면 가져와. 이 정도로는 마차 무게를 이기기 힘들어.”

그 음성에 로넨이 한층 더 발을 동동거렸다.

“응, 에드? 나도 나가서 형이 일하는 걸 도우면 안 될까?”

에드는 로넨의 우비 단추를 꼼꼼히 채워 주며 고민했다. 혹시 모를 감기를 조심하려면 비를 안 맞는 게 좋지만 로넨이 이렇게 간절하게 바라보니 안 된다고 답하기 어려웠다.

‘아까보다 빗줄기가 많이 약해지기는 했는데…….’

때마침 땅에 처박혔던 짐마차가 올라왔는지 밖에서 “와, 됐다!” 하는 외침이 들렸다.

그에 잠시 고민한 에드는 로넨의 머리에 우비 모자를 씌워 주며 말했다.

“그럼 잠깐 나갔다 올까요? 도련님?”

* * *

로넨과 밖에 나갔다가 마차에 돌아온 에드는 그의 우비를 벗겨 주며 대공에게 수건을 건넸다.

“대공 전하, 수건 여기에 있습니다.”

대공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 에드.”

똑똑.

그 순간, 마차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울렸다. 에드가 문을 열자 근처를 둘러보고 온 이르텔이 보고했다.

“근처에 사냥꾼들이 사용한 흔적이 있는 통나무집이 있는데 거기서 잠시 쉬었다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공 전하.”

대공은 이르텔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안전한 곳인지 파악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대공의 결정에 다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았으나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이르텔이 찾은 장소가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이 머무는데 통나무집 하나로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도 그 옆에는 조그마한 두 개의 오두막도 자리 잡고 있었다.

대공은 그를 살펴보다 말했다.

“우선은 통나무집에 다 같이 모여서 간단히 식사하고, 이후는 상황을 봐서 어떻게 행동할지 정하도록 한다.”

“네!”

우렁차게 대답하는 부하들과 함께 에드도 통나무집으로 걸음을 옮기는 대공을 따라 로넨과 함께 움직였다.

통나무집 안은 생각보다 넓었고 램프를 켜자 어둠도 금세 가셨다. 벽난로에 불을 붙인 북부 기사들은 침낭을 하나씩 깔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워 나갔다.

“예상치 못한 비에 발은 묶였지만 덕분에 푹 쉬고 움직일 테니 오히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겠지.”

“어, 그러게. 예상했던 일정보다 빨리 가고 있었으니 크게 문제 될 부분도 없을 것 같고.”

방 한쪽에 자리를 잡은 에드와 로넨은 긍정적으로 말하는 기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이논이 건네는 그릇에 담긴 수프와 빵을 받았다.

“도련님, 따뜻하고 부드러운 수프와 빵입니다. 비 때문에 몸이 차게 식으셨을 테니 든든하게 드세요.”

“응! 고마워.”

에드는 로넨에게 빵을 더 넘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짐마차를 옮기느라 지쳤는지 불침번 당번을 제외한 기사들은 금세 식사를 마치고 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밖을 살피고 온 대공이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묵어 가기로 한다. 침낭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은 짐마차에서 가져오도록 하고 혹시 모자란다면 이르텔에게 말해.”

“네!”

대답만큼은 씩씩하게 하는 기사들을 둘러본 대공은 로넨과 에드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로넨, 에드. 이쪽으로.”

대공이 그들을 이끈 곳은 작은 오두막 중 하나였다. 에드가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는 이미 타닥타닥 장작이 타고 있어서 방 안에 온기가 차 있었다. 바닥에는 폭신한 침낭도 깔린 채였다.

“여기서 쉬고 있어. 나는 잠시 일을 보고 오도록 할게.”

“네!”

로넨의 대답을 들은 대공은 옅게 웃었고 에드는 오두막을 나서는 대공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배웅했다.

대공이 나간 이후에도 에드가 문 앞에 서 있자 로넨이 하품을 하면서 물었다.

“에드, 피곤하지 않아?”

“아, 네. 저는 아직 괜찮습니다. 도련님은 많이 피곤하시죠?”

“으응, 졸려.”

“네, 그럼 먼저 잠자리에 드시는 게 좋겠습니다. 내일 비가 그치면 아침 일찍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요.”

“응, 알았어.”

침낭에 쏘옥 들어가는 로넨을 확인한 에드는 모포까지 꼼꼼하게 덮어 주며 오두막에 밝혀진 램프를 모두 껐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벽난로 앞에 앉아 불이 꺼지지 않게 장작을 집어넣었다.

‘부디 내일은 비가 그쳤으면 좋겠는데.’

에드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렇게 부지깽이로 툭, 툭 장작을 건드리며 시간을 보내는데 끼이익, 작게 문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에드가 고개를 뒤로 돌려 문가를 바라보자 대공이 우비를 벗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에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챙기려 했으나 대공이 손을 가볍게 저으며 물었다.

“안 자고 있었어? 에드?”

“네, 불이 꺼지지 않게 좀 살펴보다가 잠자리에 들까 해서요.”

“피곤할 텐데.”

“대공 전하께서야 말로 괜찮으신지요? 갑작스러운 사고를 수습하시느라 정신없으실 것 같아서요.”

대공은 벽난로 앞에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그렇게 말해 주니 정말 고마워, 에드. 밖에 있는 녀석들은 무심해서 그런 말을 입에 담을 리가 없거든.”

“부하분들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모두 대공을 존경하고 염려하고 있을 게 틀림없습니다.”

대공은 에드의 다정한 말에 옅게 웃었다.

“에드의 말에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야.”

동시에 옆에 앉는 대공에게서 비에 젖은 풀 향기가 훅 끼쳐 에드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코를 간질이는 향긋한 냄새에 불을 바라보며 늘어져 있던 에드의 머리에 긴장이 차올랐다.

‘……아,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벽 한쪽에 쌓인 장작을 들고 왔다. 대공의 젖은 몸이 잘 마를 수 있게 벽난로에 장작을 더 넣으며 불을 살폈다.

그런데 장작이 습기 때문에 눅눅해져서 그런지 생각만큼 불길이 확 살아 오르지 않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대공께서 방금까지 비를 맞고 오셔서 몸이 차게 식으셨을 텐데.’

마음이 급해진 에드가 장작을 더 넣으려고 하자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챈 대공이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괜찮아, 에드. 지금도 충분히 따뜻해.”

“하지만 이러다 불이 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불이 붙은 장작을 살살 움직이며 불길을 살피는 에드의 대답에 대공은 그가 손에 꽉 쥐고 있는 부지깽이를 눈짓하며 손을 내밀고 가볍게 까닥였다.

처음엔 그 손짓이 무슨 의미일까 싶어 고개를 갸웃하던 에드는 곧 아, 하며 부지깽이를 대공에게 건넸다.

“응, 고마워.”

대공은 장작을 더 넣지 않고 불이 붙은 커다란 장작들의 사이를 벌리며 불을 살렸다. 에드는 대공의 손길에 따라 불길이 거세지는 것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대공은 그런 에드의 모습에서 로넨과 비슷한 점을 발견했다. 호기심이 많아서 새로운 것을 접할 때마다 눈을 반짝이는 것이 둘이 똑같았다.

대신 로넨은 곧바로 배운 것을 자기 손으로 해 보려고 하는 쪽이라면 에드는 머릿속에 꾹꾹 담아 뒀다가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학습하는 쪽인 것 같았다.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혼자 지내 온 환경 탓이 크겠지.’

자신 역시 그랬으니까.

대공은 에드의 시선이 부지깽이를 부지런히 따라오는 것을 보며 설명했다.

“이럴 땐 우선 불이 살아날 수 있게 길을 터 주고 그사이에 말린 장작을 넣어 주면 좋거든.”

모닥불 근처에 둬 눅눅함이 가신 장작을 더 넣자 불길이 화르륵 솟아올랐다. 그에 불이 꺼질까 했던 염려를 완전히 내려놓은 에드의 입가에 말없이 미소가 번졌다.

대공은 불빛이 일렁이는 그 미소를 바라보다가 장작을 조금 더 안으로 밀어 넣으며 물었다.

“아까 먹었던 식사는 괜찮았어?”

“네, 수프가 따뜻하고 맛있어서 배불리 먹었습니다.”

“다행이군. 양이 적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참, 고구마가 있는데 익혀 볼까?”

“고구마요?”

대공이 접어 정리했던 우비 주머니에서 알고구마 몇 개를 꺼내 들었다.

에드는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날카로운 검이나 매끄러운 만년필을 쥘 것만 같은 손에 동글동글한 고구마들이 잡혀 있자 이런 생각은 불온했지만 어쩐지 귀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디서 가져오신 건가요?”

“이렇게 불을 피워 놨을 때는 고구마를 익혀 먹어야 하는 거라면서 텐스가 넘겨주던데.”

흙이 많이 묻어 있지 않은 걸 보니 식자재용 짐마차에서 텐스가 가져온 것 같았다.

대공은 장작이 타고 불기가 남은 재를 살살 파 작은 구덩이를 만들고 나뭇잎에 감싼 고구마를 묻었다.

그 모습마저 신중히 바라보는 에드의 눈길에 대공은 초반에 그에 대해 조사했던 보고서를 떠올리며 물었다.

“에드는 오르막길 마을에서 18살 때까지 자란 거지?”

에드는 원작 내용을 기억 속에서 더듬다 답했다.

“……네.”

그곳에서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고, 10여 년을 보육원에서 지낸…… 대공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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