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82화 (82/198)

“아쉽지만 이번에는 신성력을 요구하는 일이라 대공 전하와 대공자님 두 분만 예배당으로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대신 최대한 빨리 끝낼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아쉬워하던 로넨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대공이 에드에게 다가왔다.

“에드, 괜찮아?”

“네?”

“잠깐 이마 좀 짚어 볼게.”

에드는 눈앞을 지나치는 커다란 손에 눈을 감았다 떴다. 바로 앞에서 자신의 이마를 짚어 보는 대공의 얼굴이 몹시 신중했다.

“열은 없는데, 어디 안 좋은 곳 없어?”

“……네, 없습니다.”

하지만 대공은 에드의 대답이 미덥지 않았다. 대신전에 들어온 이후로 에드가 눈에 띄게 느려지고 힘들어하는 듯한 기색을 느꼈으니까.

그래서 감기라도 걸린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 이마를 짚어 보았는데 다행히 열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텐스 곁에 둘 걸 그랬군.’

밖에 쉴 곳이 마땅치 않아서 데리고 들어왔는데 오히려 에드를 혼자 두어 외롭게 하고 말았다.

대공은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대신관이 축성을 드리는 데 30, 40분 정도 걸릴 거라고 하더군. 신관에게 안내를 요청할 테니 이르텔에게 가 있어, 에드.”

대공은 다른 부하들이라면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을 텐데 에드를 혼자 두려니 마음에 쓰였다.

에드는 옅게 웃으며 답했다.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공 전하. 로넨 도련님과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르텔 경과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대신전은 복잡하니까 한눈팔지 말고 신관이 안내하는 길을 잘 따라야 해. 알았지?”

에드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약속을 받아 내려는 것처럼 자신의 시선을 맞춘 채 대답을 요구하는 대공을 올려다보며 힘 있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다녀올게.”

“네, 다녀오십시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던 대공은 신관이 몇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발길을 돌렸다.

에드는 대신관과 함께 문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대공과 시선을 맞추며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아파 보이나?’

그때 에드 곁으로 다가온 어린 신관이 말했다.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아, 네.”

에드는 묵직한 고동색 문이 닫히는 걸 보며 목에 걸린 회중시계를 열어 보았다.

‘앞으로 30, 40분이 걸린다고 했으니 오후 5시 전에는 끝마칠 수 있겠네.’

괜스레 나침반도 한 번 만지작거리며 신관을 따라 밖으로 나오자 쏟아지는 환한 볕에 절로 눈이 감겼다. 에드는 이마를 손으로 가리고 대신전 공터를 걷다가 아까 봤던 탑이 눈에 들어오자 걸음을 멈췄다.

“신관님, 잠시만요.”

“네, 무슨 일이신가요?”

“탑을 조금 구경해 봐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에드는 신전 중앙에 세워진 탑에 가까이 다가가며 그 끝을 올려다보았다. 탑은 흰색 빛이 나는 돌로 지어졌는데 보면 볼수록 시선을 빼앗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신전의 자랑인 탑에 관심을 두는 에드가 마음에 드는지 신관이 입을 열었다.

“대신전의 중앙탑이 지어진 곳은 과거 신전에 마물의 침입이 있었을 때 수많은 신관들이 모여 마물을 막고 정화했던 장소라고 해요. 그때 사용한 선대 신관님들의 신성력이 이곳에 스며들어 있어 그 위에 탑을 세우고 모두가 제국의 평온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죠.”

에드는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하는 어린 신관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생각 이상으로 뜻깊은 장소였네요.”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신가?”

“앗, 부대신관님.”

에드의 곁에 있던 어린 신관이 인사를 꾸벅하자 부대신관이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눈짓으로 에드를 가리켰다. 그에 신관이 빠르게 대답했다.

“린든 대공 전하의 사용인입니다.”

“아아.”

하며 말끝을 늘인 부대신관이 신관을 물리고 에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툭, 내뱉었다.

“황궁에서 재미난 일이 있었다던데, 자네도 거기에 있었는가?”

그렇게 묻는 부대신관의 얼굴을 바라보던 에드는 시선을 내렸다.

“저는 신관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에드를 위아래로 훑어본 부대신관이 피식 웃었다.

“그렇군. 사람들의 입이 워낙 가벼워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하기가 쉽지 않아서 말이지. 혹시 자네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한번 물어봤네.”

턱을 쓸며 작게 중얼거리던 부대신관이 살짝 웃으며 에드와 시선을 맞췄다.

“그러니 재미난 이야기가 있으면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내게도 좀 전해 주게. 속세와 떨어져 사니 즐거움이란 없고 영 심심해서 말이야.”

에드는 부 대신관의 말에 살짝 고개 숙이며 답했다.

“저는 정말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말입니다.”

“에드!”

그때 로넨의 목소리가 대신전에 울려 퍼졌다.

에드가 뒤를 돌아보자 로넨이 힘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에드는 로넨이 혹시라도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달려온 로넨은 뛰어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숨도 차지 않은지 에드의 손을 잡으며 외쳤다.

“에드랑 형 말이 맞았어! 난 진짜 아스넬 형의 동생인 린든 로넨이야!”

로넨은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다 들이켠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 밝은 웃음에 에드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퍼져나갔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로넨 도련님.”

“대공 전하, 대공자님. 두 분께 항상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대신관에게도 신의 가호가 항상 함께하기를 바라네.”

“안녕히 계세요! 대신관님.”

“네, 조심히 가십시오.”

대신관과 인사를 나눈 대공과 로넨이 마차에 올라타자 그 뒤를 제이논과 에드가 따랐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드디어 모든 일을 마치고 북부로 돌아간다는 생각 때문인지 밖에서 외치는 텐스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에드는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눈길을 주었다가 대신관과 시선이 마주쳤다. 인자한 그의 시선에 에드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대신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움직이는 마차를 배웅했다.

대신전을 나선 마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시원하고 기분 좋은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오며 옷자락을 건드렸다. 에드는 로넨과 대공의 검은 머리카락이 동시에 살랑거리는 걸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아스넬 형, 북부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앞으로 꾸준히 달리면 5일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북부성이 얼마나 멋있을지 정말 기대돼요!

해맑은 로넨의 목소리를 들으며 에드는 원작에서 읽은 북부성의 묘사를 떠올렸다.

북부성은 추운 북부의 눈보라 속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하고, 마물의 침입을 막기 위한 단단한 방벽과 성문 때문에 실용미가 돋보이는 게 특징이다. 이 때문에 북부성은 투박하다는 인상을 받기 쉬우나 건물 안은 북부만의 아름다움이 돋보여 예술적인 부분도 여타 다른 성에 밀리지 않았으며…….

에드는 술렁이는 가슴을 손으로 가볍게 눌렀다.

소설로만 접했던 북부의 성을 머지않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숲을 지나 창밖으로 푸른 들녘이 보이기 시작하자 엉덩이를 울리는 마차의 진동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탁탁탁, 가는 빗줄기가 땅을 적시는가 싶더니 곧 쏴아아, 소리를 내며 굵은 빗방울이 마차를 때렸다.

“에드, 비 온다!”

“도련님, 손을 마차 밖으로 내밀면 위험해요.”

에드는 굵은 빗줄기를 잡기 위해 밖으로 손을 내미는 로넨을 챙기며 말했다.

그때였다. 마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이윽고 자리에 멈춰 섰다. 에드와 일행이 탄 마차를 뒤따라오던 짐마차에 문제가 생긴 것을 발견한 텐스가 마차를 세운 것이다.

“대공 전하, 짐마차의 바퀴가 진흙에 빠져 잠시 지체될 것 같습니다.”

마차 곁으로 다가온 이르텔의 보고에 대공은 밖으로 나와 상황을 살폈다. 짐을 실어 무거워진 마차 바퀴가 질어진 땅에 잠겨 버린 것이 원인으로 보였다.

“빗줄기가 거세니 잠시 쉬었다 가는 게 좋겠군. 이르텔, 근처에 머물렀다 갈 곳이 있는지 알아봐.”

“네, 대공 전하.”

이르텔이 말을 몰며 빠르게 사라지자 대공은 마차 뒤에서 우비를 챙겨 입고 램프를 찾아 들었다.

“안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로넨.”

그리고 자신을 걱정스레 보고 있는 에드를 발견하고는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에드, 로넨 좀 부탁할게.”

“네, 알겠습니다.”

로넨이 마차 창문으로 고개를 한껏 빼 대공을 시선으로 따르는 동안 에드는 제이논이 건넨 램프를 켜 마차를 밝혔다.

“저도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도련님.”

제이논도 대공을 따라 밖으로 나서니 로넨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에 애가 단 게 보여 에드는 로넨에게 아이용 우비를 건네며 입을 뗐다.

“도련님, 마차에만 있기 지루하시면 저희도 이따 나가 볼까요? 지금은 빗줄기가 거세니 조금만 더 있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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