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하니 중얼거리는 로넨의 속삭임에 에드는 말을 아꼈다. 에드 역시 로넨처럼 대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렇지, 에드?”
여운에 잠겨 있던 에드는 로넨의 물음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로넨 도련님.”
“정말 멋있었어. 아스넬 형의 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을 때 엄청 큰 태양 같아서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빛에서 용이 나오다니. 그것도 책으로만 봤던 황금 용이…….”
에드는 로넨의 말소리를 들으며 방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로넨이 자신의 동생임을 증명한 후 별채로 돌아온 대공은 로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상냥하게 말했다.
〈오늘은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하자.〉
〈네, 형!〉
로넨의 활기찬 대답을 들은 대공은 옅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고 에드는 로넨과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침대에 눕기 전에 로넨은 몇 번이나 거울을 바라보며 대공과 똑같은 색으로 변한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신기해했다.
〈에드! 이것 봐! 아스넬 형과 정말 똑같은 색이야!〉
대공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외양으로 변하자 모든 근심과 걱정이 사라진 로넨은 웃으며 침대에 누웠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에드는 어두운 밤에도 까만 윤기가 흐르는 로넨의 머리카락에 시선을 주었다.
“에드.”
“네, 로넨 도련님.”
“아스넬 형이 나의 친형이라서 정말 좋아.”
그리고 에드가 곁에 있는 것도 정말 좋아.
그렇게 말하며 웃은 로넨이 눈을 감았다. 혼자서도 잠들 수 있으니 방에 가라고 해도 에드는 자신이 잠든 후에 자리를 뜰 테니 빨리 자는 게 그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꼭꼭 다짐했다.
‘나도 아스넬 형처럼 멋진 어른이 될 거야.’
에드는 그런 로넨을 내려다보다가 그가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살금살금 복도를 걸으며 자신의 방으로 가던 에드는 문득 뒤로 돌았다.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대공의 방 앞이었다.
에드는 귀를 대고 방 안의 기척을 살피다 메마른 입술을 혀로 훔쳤다. 그러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 보았다.
‘본체는 아니었지만 용을 불러낼 정도면 분명 마력을 사용한 부작용도 어마어마할 거야.’
그런 대공이 괜찮은지, 그것만 확인하고 싶었다. 충동적이었다.
“……어?”
그와 동시에 에드의 목 뒤를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어두운 복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손길에 깜짝 놀란 에드가 고개를 돌리자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쉬잇, 에드.”
대공이었다.
“쉬잇, 에드.”
귓가에 울리는 대공의 목소리에 에드의 몸이 흠칫, 떨렸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대공의 목소리였지만, 뭔가 풍기는 분위기는 상이했다. 숨은 어딘가 거칠었고, 목뒤에 닿는 손길은 어째서인지 서늘하고 까칠했다.
“안 자고 여기서 뭐 해?”
대공의 질문에 에드는 시선을 들었다. 열린 방문 틈 사이로 옅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안 주무시고 계셨구나.’
꽤 깊은 밤인데도.
에드는 눈을 깜빡이다 대답했다.
“아, 로넨 도련님의 잠자리를 챙기고 오던 길이었는데요. 대공 전하께서는 잘 주무시는지 살짝 살펴본다는 게 되레 그만 전하의 휴식을 방해하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쩐지 느릿한 에드의 반응에 대공은 옅게 웃었다.
“죄송하기는. 혼자 심심했는데, 마침 좋은 때에 왔어. 그러니 에드, 나와 가볍게 한잔할까?”
에드는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홀로 술을 드시고 계셨던 걸까?’
에드의 시선에 담긴 의문에 대공이 답했다.
“잠이 오지 않기에 맥주를 마시고 있었거든.”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음, 아무래도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
대공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가 오늘 용을 소환한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에드는 대공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입을 뗐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함께하겠습니다.”
“에드야 언제나 환영이지. 그럼 이쪽으로.”
대공의 안내를 따라 조도가 낮은 램프 하나만 켜진 방 안으로 들어온 에드는 주위를 살폈다. 작은 테이블에 대공이 마시던 술과 과일이 놓여 있었다.
에드는 이미 원작을 통해 능력을 과하게 쓴 날에 대공은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는 걸 알았다. 해서 잠시 고민한 에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대공 전하, 텐스나 이르텔 경도 부를까요?”
아무래도 자신보다는 대공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부하들이 대공을 잘 보필할 수 있지 않을까 했기 때문이었다.
염려가 어린 에드의 말에 대공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시간에 잔소리를 듣기는 싫어서.”
장난기 섞인 대답에 에드가 작게 웃자 대공은 그를 테이블로 이끌었다.
“에드, 맥주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에드 앞에 잔을 놓아 준 대공이 맥주를 따랐다. 호박색 액체가 램프에 비쳐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던 에드는 대공이 잔을 제 쪽으로 가져다 대기에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어 올려 대공과 잔을 맞댔다.
살포시 웃으며 술을 한 번에 들이켠 대공은 반쯤만 비워진 에드의 잔을 바라보며 자신의 빈 잔에 맥주를 따랐다.
그걸 본 에드는 테이블에 놓인 물잔을 살짝 밀면서 말했다.
“주방에 내려가서 수프라도 챙겨 오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다른 드시고 싶은 건 없으십니까? 대공 전하.”
대공이 저녁도 먹지 않고 방으로 들어온 것을 안 에드는 빈속에 술을 마시는 그가 걱정되어 점점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이번 계략이 완전히 실패했으니 황제는 또다시 다른 방법을 찾아 대공가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겠지. 그럴 때마다 대공은 더 무리할 테고……’
대공 역시 이를 알기에 마음이 몹시 복잡할 터였다.
아까 대연회장에서 먼저 물러나기를 청하는 대공을 바라보는 황제의 입가가 바르르 떨리던 걸 회상하며 에드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은 근심 어린 에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답했다.
“이 정도 술을 마시는 건 괜찮아, 에드.”
그에 시선을 든 에드는 램프의 빛을 받아 붉게 빛나는 눈동자를 바라보다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조금이라도 뭘 드시는 게 어떠실까요? 제가 빨리 내려갔다가 오겠습니다.”
대공은 고개를 작게 저으며 옅게 웃었다.
일라의 작은 술집에서 맥주를 마셨을 때 에드가 그랬다.
〈그냥 차갑고 따가운 술이 목구멍을 긁고 지나가는 화한 느낌이 좋아서 마시게 되거든요.〉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면서.
대공은 그때 에드가 말한 기분이 뭔지 깨닫고 있었다. 더욱이 아까까지 온몸에서 느껴지던 통증이 무슨 일인지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에드가 함께 있으니 몸 상태가 훨씬 좋아지는 것 같단 말이지.’
그에게서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이상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래서 대공은 금방이라도 식당으로 가려고 하는 에드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아까 티 푸드를 챙겨 먹었어, 에드. 그러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마른 것 같은 에드를 보며 대공은 그에게 되물었다.
“에드야말로 오늘 고생 많이 했는데 식사는 한 거야?”
“네, 로넨 도련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그래, 그럼 조금만 더 마실까?”
“아, 네.”
에드는 대공이 내미는 잔을 받으며 대공의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공의 검게 물든 손끝에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말없이 대공과 술을 주고받던 에드가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음, 에드.”
“손이 그런 건 오늘 사용한 마법에 대한 부작용 때문이지요?”
술잔에 술을 따르던 대공이 병을 내려놓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맞아, 무리하게 마력을 사용하면 꼭 악마의 손처럼 검게 변하더라고.”
램프에 비치는 대공의 손이 벽에 검고 큰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빛과 어둠을 따라 그림자 또한 모습을 바꿨다.
“에드는 어때? 이 팔이 무섭지 않아?”
대공은 팔을 내려 에드의 시선에서 손을 치우려고 했다.
에드는 그걸 바라보다가 답했다.
“아뇨,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잠시 손을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대공 전하.”
“왜?”
“그건 악마의 손이 아니라 사람들을 마물로부터 지키고, 가족을 보호하는 귀하고 대단한 손이니까요.”
에드는 자신의 말에 대공이 작게 웃자 흠흠, 하며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잠시 손끝을 내려다보던 대공은 에드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에드는 그 손을 잠시 내려다보다 제 왼손으로 대공의 손등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대공의 손끝을 살살 주물렀다.
다른 뜻은 없었다. 그냥 좀 지치고 힘든 대공을 이렇게라도 위로하고 싶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