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종장이 대연회장에서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다는 건 곧 황제가 나온다는 뜻이겠지.’
속으로 한숨을 내쉰 에드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에드를 본 대공은 다시 시종을 불러 그에게 음료 잔을 건넸다. 에드가 대공이 건네준 음료를 감사히 마시는 동안, 대공은 부시종장과 적당히 대화를 끝냈다.
“그럼 다음에 보지, 부시종장.”
“네, 대공 전하. 만찬을 편안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 순간 연회장 안을 울리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모두 예를 갖추십시오!”
연회장에 있던 귀족들이 예를 갖추며 황제를 맞았다. 에드도 고개를 깊게 숙이며 오늘이 무사히 지나가길 기도했다.
“모두 고개를 들게.”
단상으로 올라선 황제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들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무탈하게 사냥제를 마치고 이렇게 만찬을 즐길 수 있어서 짐은 매우 기쁘다.”
황제의 곁에는 지난번의 그 남자아이도 함께 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대공과 닮은 아이가.
에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오늘은 만찬을 즐기기 전에 먼저 해결할 일이 있지. 그렇지 않나? 아스넬 대공.”
황제가 단상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시선에 대공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들며 말했다.
“황제 폐하, 그 일로 신이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지? 대공.”
“제가 이 자리에서 단 한 번 능력을 쓸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황제가 흐음, 하며 손으로 턱을 짚었다.
“그것이면 되겠나?”
그것으로 로넨이 친동생임을 확인시켜 줄 수 있겠냐는 황제의 질문에 대공은 답했다.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
“단 한 번이라…….”
작게 중얼거리던 황제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아스넬 대공. 능력을 쓰는 것을 허락하노라. 대신 결과를 확실히 보여 줘야 하네. 대공의 친동생이 누구인지.”
대공이 고개를 숙였다 들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하겠습니다, 황제 폐하.”
동시에 대공이 오른손을 펼쳐 들었다. 그러자 대공의 손등에 황금색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대공의 손등에 자리 잡은 문양에서 시작된 그 빛은 허공으로 떠올라 점점 퍼져 나갔다. 처음엔 탁구공만 했던 빛은 종국에는 대연회장에 태양이 떠오르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만큼 크고 환하게 크기를 키워 나갔다.
“어머, 저, 저건 뭔가요?”
“말로만 듣던 대공의 마법인가 봐요. 대공이 소환 마법을 잘 쓰신다고 하더니 뭘 소환하시려는 걸까요?”
대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눈부시게 솟구치는 빛을 향해 쏠렸다.
그 순간, 빛이 일순간에 응축되었다가 확 터지며 바람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이 손으로 앞을 가리며 눈을 감았다.
에드는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시선을 들었다. 허공에 떠오른 태양 같은 구체가 황금색에서 점점 붉은빛으로 변해갔다.
고개를 돌린 에드는 곁에 있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빛이 커질 때마다 미간을 찌푸렸다. 대공의 팔뚝 위에 핏줄이 튀어나올 것처럼 솟아있었다.
“…….”
“…….”
대공의 손을 잡고 있던 로넨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에드는 로넨의 반대편 손을 잡으며 구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온몸의 혈관이 확장되며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러나 자신이 이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꾸라졌다간 폭주가 일어나서 곁에 선 로넨과 에드가 다칠 수도 있었다.
‘그러면 곤란하지.’
한꺼번에 많은 마력을 사용한 탓에 고통이 극심했지만 대공은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터질 것 같은 팽팽한 힘이 온몸을 가로지르며 눈앞을 검게 물들이려고 했지만 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그와 동시에 파악, 허공에 뜬 빛 주위로 구름이 생성되었다. 어두운 색감의 구름이 빛을 가리고 안개처럼 퍼지며 사람들의 시야를 막았다.
이 모든 장면이 너무 웅장하고 신비로워 대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을 말을 하는 것도 잊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직 황제만이 으득, 어금니를 깨물며 입매를 비틀었다.
‘부리는 소환수라는 게 개나 다름없는 늑대 한 마리와 불도 못 쓰는 새 한 마리가 다인 줄 알았는데 다른 게 더 있었나?’
가늘어진 눈으로 대공을 바라보던 황제는 쯧, 혀를 찼다.
‘하지만 어떤 소환수를 꺼내든 이 상황을 쉽게 해결하지는 못할 거다.’
우르르콰앙.
그때 천둥 번개가 치는 것처럼 번쩍이는 불빛과 함께 대연회장에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빛을 가렸던 구름이 오색찬란하게 바뀌었고 그 사이로 빛이 확 터지며 아래로 흘러내렸다.
너무나 밝고 찬란한 빛 번짐에 눈을 질끈 감았던 사람들은 놀라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렸다.
[오랜만이군, 계약자 아스넬 린든.]
귀를 통해 들리는 게 아니라 머릿속을 파고들어 울리는 음성 때문이었다. 대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 그대로 굳었다가 하, 하는 탄성을 흘렸다.
“허억, 제, 제가 뭘 보고 있는 거죠?”
“저, 저거 용…… 용이 맞는 거죠?!”
“용도 그냥 용이 아니라 황금 용……이면 제국을 지키는 것으로 회자 되는 용 아닙니까?!”
방금까지 빛이 있었던 곳에는 황금색으로 웅장하게 빛나는 용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공을 바라보는 용의 눈빛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외형은 역사서에서 나오는 그대로였다.
안개에 가려진 발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고목 껍질 같은 피부에 뾰족 튀어나온 예리한 발톱만으로도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아 볼을 꼬집어 보던 사람들도 입을 열며 한두 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역사서에 나오는 용이 정말로 존재했네요?”
“아! 당연히 존재했겠죠! 그러니 제국의 영광이 유구한 역사를 거쳐 지금까지 유지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째 묘사된 모습보다 작은 것 같지 않아요?”
“그래도 저 눈빛 좀 봐요. 얼마나 호기롭고 예리한지요! 마치 모든 세상의 진리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리는 소리 사이로 대공은 과도한 마력 소모로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용을 올려다보았다.
대공을 내려다보던 용과 그의 시선이 맞았다.
“계약자 아스넬 린든이 고대의 황금 용 루안에게 청한다.”
대공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기를 죽이며 한 자 한 자 토하듯이 말했다.
“황금 용 루안의 권능으로 이 자리에서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친형제를 찾아 내게 인도하라.”
현재 힘의 제약으로 루안은 본 모습으로 현신하지 못해 조그마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디 용은 신성하고 상서로운 존재였고, 그중에서도 황금 용은 옛날부터 제국을 수호한다고 알려져 사람들에게 가장 추앙받는 존재였다.
대공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이곳에서 로넨이 진짜 동생인 걸 밝혀내더라도 이마의 표식을 확인하는 정도로는 분명 황제가 다른 방법을 이용해 그를 공격하리란 사실을.
그래서 황제의 경계가 심해질 것을 알면서도 대공은 동생을 지키기 위해 상징성이 강한 루안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대공을 빤히 내려다보던 황금 용이 말했다.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친동생을 찾은 건가? 무언가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하더니 이제라도 찾게 되어 다행이군.]
긴 입김을 뿜어낸 황금 용이 대공에게서 시선을 떼고 대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상한 기운을 느낀 루안은 단상에 서 있는 황제를 지나쳐 그 옆에 서 있는 아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스넬 린든의 기운은 흐르나, 넌 그의 동생이 아니구나.]
노기가 서린 루안의 말이 귀족들의 머릿속에 울렸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사람들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로넨과 에드도 머릿속이 잘게 울리는 느낌이 있었으나 괴롭진 않아서 주위를 둘러보니 대공이 자신들을 보호했다는 걸 깨달았다.
황금 용의 진노에 아이의 얼굴에서부터 발밑까지 파사삭, 빗금이 가더니 천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황금 용이 그걸 내려다보다 작게 날갯짓을 하며 바람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땐 황제 옆에 있던 아이는 사라지고 목걸이와 커다란 뱀의 시체만이 남아 있었다.
조용해진 장내를 둘러보던 루안은 로넨을 향해 달려들 듯이 다가왔다. 이에 에드가 움찔, 하며 로넨을 뒤로 물리려 했으나 이미 그의 앞에 선 황금 용은 장난이라도 치듯이 로넨의 이마를 꼬리로 툭 때렸다.
그와 동시에 로넨의 회색빛 머리카락이 검게 변하고 보랏빛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어?”
로넨이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이자 루안이 시선을 마주하며 날개를 가볍게 파닥였다.
진짜 대공의 친동생이라는 증거이자, 북부 대공가인 린든의 증표였다.
* * *
침대에 누운 로넨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쉽게 진정시킬 수 없었다. 모든 게 환상 같았던 대연회장의 일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볼을 꼬집어 보았으나 여전히 아팠다.
“꿈이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