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70화 (70/198)

대공은 아이가 목에 건 목걸이를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막사 입구에서 밖을 슬며시 내다보던 로넨이 뒤로 스르륵 물러났다. 대공과 눈이 마주치기 전에 빠르게 막사 안쪽으로 몸을 숨기며 눈을 깜빡였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로넨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 * *

황궁에 도착했다가 사냥제가 열리는 사냥터로 왔을 땐 로넨은 엄청 긴장했다. 황제 폐하를 뵌다는 생각에 무릎이 후들후들 떨렸다.

하지만 아스넬 형이 손을 잡아 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다정히 말해 줬고, 황제 폐하께 인사를 드리고 단상에서 내려왔을 때도 잘했다고 칭찬해 줬다.

인자하신 분이라는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황제 폐하는 제국의 고귀한 태양이라 함부로 올려다볼 수 없는 분이었기에 얼굴을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쩐지 소문과 다르게 폐하는 날카롭고 서늘한 시선으로 자신과 형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로넨은 쿵쾅쿵쾅 가슴이 뛰며 손끝이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내, 내가 뭘 잘못했나?’

하지만 아스넬 형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황제 폐하의 질문에 하나도 막힘 없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정말 멋있고 듬직했다.

‘나도 아스넬 형처럼 훌륭한 어른이 되고 싶어.’

형의 손을 잡고 단상을 벗어났을 때 로넨은 이제 어려운 일이 다 끝난 것 같아 마음이 후련해졌다.

〈로넨,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텐스와 전야제를 구경하고 와도 좋을 것 같아.〉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

막사에 도착한 후에 한 형의 말에 로넨은 즐거운 마음으로 나갔다 왔다.

그리고 그 후엔 형과 함께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스넬 형이 말하기를, 대공의 직위에 있는 형은 황제 폐하와 밤 산행을 다녀와야 하고 대공자인 자신은 귀족 자제들과 티타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그게 사냥제의 일정 중 하나라면서 형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로넨과 함께 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로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아니에요, 형. 저도 다른 귀족의 영식과 영애들과 친해질 수 있는 자리를 가질 수 있어서 기대가 되는걸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아스넬 형과 떨어지는 건 아쉬웠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내면 형이 걱정할 게 눈에 선해서 로넨은 씨익 웃었다. 형이 가르쳐 준 무례를 범하는 이들에게 대응하는 방법도 몇 번이나 연습했다.

그리고 아스넬 형이 밤 산행에 나설 때 배웅했다. 형은 언제나 멋있었지만, 말에 올라탔을 때는 특히나 눈이 부시도록 근사했다. 하얀 말을 타고 주위를 휘둘러볼 때는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쏠리는 것 같았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스넬 형!〉

이 말은 하고 또 해도 부족했다.

로넨은 형이 황제 폐하와 밤 산행에 잘 다녀오길 바라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어린이들 전용으로 준비된 막사에서 귀족 자제들과 함께하는 티타임을 가졌다.

낯선 자리에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건 불편했지만, 에드와 텐스가 있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물론, 그렇지 못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아스넬 형이 일러 준 방법과 에드가 곁에서 준 도움 덕에 무사히 티타임을 보낼 수 있었다.

〈잠시만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로넨 도련님.〉

황금 장신구를 착용해야 한다고 체임스 영애가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에드는 그를 통보받지 못한 상황을 깨닫고 밖으로 나갔다.

로넨은 그런 에드의 뒷모습이 몹시 믿음직했다. 이번 문제도 잘 해결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드는 무슨 일이든 척척 잘 해결하니까.’

그래서 막사 앞에 아스넬 형을 비롯한 다른 귀족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에드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형이라도 불러온 건가?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형은 에드를 만난 게 아니라 그저 밤 산행이 취소되어서 돌아왔다고 했다. 그것을 알고 나자 로넨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는 에드의 행방이 걱정되었다.

〈어떡하죠? 형? 에드가 밖에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런 상황을 파악한 아스넬 형이 자신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먼저 막사에 가 있어, 로넨. 형이 금방 에드를 찾아 함께 돌아올 테니까.〉

형의 눈빛은 단단해 보였고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손은 여전히 따스했다.

로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형의 곁을 얼쩡거려 봐야 에드를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막사에 가서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네, 형.〉

하지만 텐스와 임시 거처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로넨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고, 막사에 돌아와서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결국 참지 못한 로넨은 텐스에게 물었다.

〈형은 언제 올까?〉

〈금세 오실 겁니다, 로넨 도련님. 대공 전하는 그 누구보다 빠르고 강하시니까요.〉

〈응, 맞아. 텐스. 형은 금방 올 거야.〉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중얼거린 로넨은 까치발을 들고 막사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것 같은데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이르텔도 보이지 않았고…….

불안감이 가시지 않은 로넨은 막사 안을 종종걸음으로 걸어 다니며 걱정되는 마음을 털어내려고 했다.

‘……?’

그때 막사 앞 공터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로넨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텐스가 불렀으나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아스넬 형이나 에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

그리고 그 인영의 주인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라는 것을 알아채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지?’

외부를 밝히는 마법등에 드러난 얼굴은 하얬고 머리카락은 까맸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는 붉었다.

‘마치 아스넬 형 같은…….’

거기까지 생각한 로넨은 눈을 끔뻑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자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

〈아…… 저, 저는 로넨케아즈 린든입니다.〉

〈로넨케아즈 린든?〉

〈……네, 여기에 아스넬 형이 있다고 해서 왔거든요. 빨, 빨리 보고 싶어서요.〉

어, 하며 로넨은 침을 꿀꺽 삼켰다.

‘로넨케아즈 린든은 나라고 했는데.’

그때 어느새 자신의 뒤를 따른 텐스가 자신의 앞을 막아섰다.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휘날리고 남자아이의 시선에서 자신을 차단했다.

텐스의 곁에 선 제이논이 말했다.

〈로넨 도련님, 막사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그에 로넨은 텐스의 뒤를 조금 더 기웃거리다가 막사로 돌아왔다. 제이논은 연신 주변을 경계하며 막사 앞을 지켰다.

로넨은 막사 문 안쪽으로 몸을 숨긴 채 밖을 힐끗거렸다. 남자아이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처음에 로넨은 저 남자아이의 정체가 궁금하다가 점점 다른 쪽으로 생각이 빠져들었다.

‘혹시 저 아이가 아스넬 형의 진짜 동생이 아닐까?’

그 생각에 조금 시무룩해지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스넬 형은 내가 틀림없는 친동생이라고 했는걸?’

로넨은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분명히 형이 말했었다. 어릴 때 헤어질 때 자신의 이마에 표식을 남겼다고. 북부성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였고, 그 표식은 형이 알아볼 수 있는 증표라고 했다. 그리고 혈통 검사 기구에서도 친가족 관계라는 게 나타났는데…….

로넨은 막사 구석으로 뽀르르 달려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옷과 모포 등이 잘 정리된 가방을 마구 헤집다가 작은 손거울을 찾아들었다.

그리고 주위를 휙휙 둘러보다가 막사 안에서 가장 밝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에 놓인 마법등 앞에 앉아서 거울을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혹시 형이 남겼다는 표식이 나에게도 보이지 않을까 해서 집중해서 살폈다.

‘표식이라고 했으니까 아주 작은 점이나 문양 같은 것이 남아 있을지 몰라.’

로넨은 눈에 힘을 줘 가며 이마를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그러다 밖에서 텐스가 대공 전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막사 안을 빠르게 가로질러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

그러나 밖에 있는 남자아이가 생각나자 걸음이 뚝, 멈췄다. 입구로 나가려던 로넨은 막사 입구 안쪽에 몸을 기대고 고개만 빠끔 내밀어 밖을 내다보았다.

아스넬 형이 남자아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남자아이를 내려다보는 형의 눈빛이 잘 보이지 않았다.

로넨은 메마른 입술을 잘근거리며 밖의 기척을 살피다가 에드와 눈이 마주치자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 안쪽으로 더 몸을 숨겼다.

‘어……내가 왜 이러지?’

로넨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 형에게 잘 다녀오셨냐고 인사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공이 남자아이를 지나쳐 그런 로넨에게 다가오려던 찰나였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모두 예를 갖추십시오.”

대공의 거처가 자리한 공터에 뿔고둥 소리가 울리며 황제가 등장했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모두 예를 갖추십시오.”

대공의 임시 거처의 공터에 뿔고둥 소리가 울리며 황제가 등장했을 때 에드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곁눈질로 막사 안쪽의 로넨을 살폈다.

‘이러면 꼼짝없이 로넨이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역시나 막사 안에서 밖을 내다보던 로넨이 뽀르르 튀어나와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황제는 커다란 마법 등을 여러 개 든 기사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 바람에 대공의 임시 거처가 밝고 환하게 빛나 마치 대낮처럼 느껴졌다.

황제가 탄 말 뒤로는 사냥제에 참석한 귀족들도 뒤를 따랐다. 어느새 너른 공터가 이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의 시선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인 대공과 대공의 앞에서 황제에게 예를 취하고 있는 흑발의 아이에게로 쏠려 있었다.

황제의 뒤를 따르라는 전언에 영문도 모르고 움직였던 그들은 대공과 낯선 아이가 함께 서 있는 모습에 호기심을 느꼈다.

“이런.”

시종장의 도움을 받으며 말에서 내린 황제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가 안타깝다는 듯이 작게 혀를 찼으나 입가에는 비릿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환한 마법 등이 내리쬐는 공터의 한가운데에서 황제가 아이에게 말했다.

“고개를 들어 보거라.”

그에 남자아이가 고개를 들자 붉은 눈동자가 환한 빛에 밝게 빛났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하늘하늘하게 흔들리는 게 보이자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저 아이, 아스넬 대공과 정말 많이 닮지 않았어요?”

“맞아요! 대공의 어릴 적 모습과 똑같은 같기도 하고요? 하얀 얼굴에 붉은 눈동자…… 어쩜 저렇게 고개를 드는 행동까지 비슷한 건지 대공의 친동생이라 해도 믿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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