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69화 (69/198)

발목을 어루만지는 대공의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손길에 에드의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발목에 톡, 튀어나온 뼈를 둥글게 문지르는데…… 거긴 왜 매만지시는 것일까?

붉게 타오르는 불빛에 대공의 그늘진 속눈썹이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대공은 말이 없었다. 일렁이는 불길이 그의 얼굴을 비출 때마다 에드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뗐다.

“…….”

“…….”

그리고 어느 순간 서로의 눈길이 마주쳤을 때, 대공은 시선으로 에드를 덧그렸고 에드는 제 이마를 긁적거렸다. 얼굴에 열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대공은 옅게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이 발로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로넨을 보살피고 지켜 왔던 거구나.’

그런 에드를 지켜봐 왔기에 대공은 이 기회에 피로한 그의 다리를 주물러 주고 싶었다.

대공은 에드의 발목을 가볍게 주무르며 말했다.

“에드, 발이 무겁거나 아프지 않아?”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 부근이 엄청 뭉쳐서 단단하단 말이지.”

대공이 발목을 가볍게 돌려 풀어 주며 주무르던 손을 움직여서 종아리를 가볍게 누르자 에드는 저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동굴 안을 울리는 제 목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아 에드는 얼른 입을 막으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대공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답했다.

“아파서 소리를 낸 건데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아, 아픈 건 아니고요. 조금 놀라서 그런 것입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대공 전하.”

에드는 바지 위로 손을 움직여 제 종아리를 가볍게 주무르는 대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니, 내가 대공 전하의 다리를 주물러 드려도 모자랄 판에 팔자 좋게 이게 웬 호강이야.’

다리에 조금이라도 힘이 들어가면 아플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지 자신의 발을 깨지기 쉬운 귀중품처럼 다루는 대공의 모습에 에드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왼발을 다 주물렀다 싶은 건지 내려놓고 이번에는 제 오른발을 들려는 대공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 정말로 괜찮습니다, 대공 전하. 혹시 전하께서는 불편한 곳이 없으십니까?”

에드는 손을 쥐었다 펴며 손끝에 힘을 실었다. 대공이 어딜 어떻게 내밀더라도 야무지게 손을 움직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쉬이익!

그때 동굴 입구 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뭐지?’

에드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대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등지고 동굴 입구로 향하는 대공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던 에드도 일어나 고개를 빼고 주위를 살폈다. 흔들리는 불꽃을 따라 동굴 바닥에 스민 대공의 그림자가 이지러졌다.

“에드, 거기서 움직이지 말고 있어.”

에드의 기척에 대공이 말하며 허리춤에서 검을 빼내어 들었다.

동굴 입구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커다랗게 입을 벌린 새카만 뱀이 들어오려고 머리를 들이대고 있었다.

스스스슥.

그 뱀이 움직일 때마다 스산한 소리가 울렸다. 놀란 에드가 겨우 눈꺼풀을 두 번 깜빡였을 뿐인데 어찌나 빠른지 작게 보이던 뱀의 머리가 훨씬 더 가까워져 있었다.

쉬이익!

뱀이 또다시 사납게 울었다. 특유의 반들반들한 표면이 동굴에 피운 불빛을 반사하며 음습하게 빛났다. 뱀에게서 흐르는 차고 역한 기운에 에드는 온몸이 오싹하고 시렸다.

그 순간 대공이 스르릉, 소리와 함께 힘껏 체인을 날렸다. 긴 창처럼 뻗어 나간 체인의 끝이 쩍 벌린 뱀의 입을 돌돌 틀어막았다. 그 때문에 금방이라도 덮쳐 올 듯했던 뱀이 으득, 하며 제 턱을 짓씹었다.

그러자 입구 안으로 들어왔던 뱀 형태의 마물이 뒤로 빠지려고 힘을 썼다. 그 여파로 동굴 입구의 흙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자잘한 파편이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대공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체인으로 뱀의 목을 감고는 팽팽하게 잡아끌었다. 사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뱀을 상대하느라 대공의 팔뚝 위로 핏줄이 불뚝불뚝 솟았다.

쉬이익.

처음과 달리 작아진 소리를 내뱉은 뱀이 조그마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줄여서라도 묶인 체인으로부터 도망가려는 모양새였다.

자신을 묶은 체인이 풀리자 다시 거대한 뱀의 형상으로 변한 마물이 대공을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뱀의 움직임을 살피던 대공이 검을 들어 손바닥으로 날을 쓸었다. 그러자 검 끝에서 붉은빛이 피어올랐다.

대공이 그 검 끝으로 바닥을 둥글게 그어나가자 지지직, 소리와 함께 동굴 바닥이 검게 그을리며 선이 그어졌다. 대공이 땅을 발로 탁, 치자 뱀이 들썩이듯이 움직이다가 빠르게 전진했다. 대공의 발을 물어 움직임을 막을 생각인 것 같았다.

대공이 손으로 검날을 다시 쓸자 검 끝의 열기가 검신 전체에 퍼지며 아까까지 조금 서늘하게 느껴졌던 동굴의 온도가 삽시간에 더워지기 시작했다.

그 열기에 동굴 바닥에 고였던 대공 주변의 물이 증발할 정도였다. 옅은 물안개가 뿌옇게 끼며 시야가 가려지나 싶었지만 뜨거운 열기에 그조차도 빠르게 사라졌다.

“아.”

에드의 시야가 선명해졌을 즈음에는 어느새 대공이 검 끝으로 마물의 몸을 관통한 뒤였다.

관통당한 마물은 벗어나기 위해 몸을 버둥거렸지만 뜨거운 검의 열기에 금방 타올라서 소멸해 버렸다. 대공이 검에 묻은 재를 털어내자 동굴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

검을 갈무리한 대공이 뒤로 돌았다. 대공은 방금 전에 마물을 해치운 사람답지 않게 차분한 눈빛으로 에드에게 말했다.

“그럼 갈까? 에드?”

* * *

동굴 밖을 나오자 환한 빛이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커다란 푸른 나뭇잎 사이로 이슬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에드는 그를 바라보다가 대공에게 물었다.

“저, 그런데 이렇게 움직여도 괜찮을까요?”

아까는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오면 핵을 노린다고 했는데…… 에드는 시선을 하늘로 줬다. 우화를 앞둔 고치가 있나 살펴보려고 했으나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대공은 뒤로 돌아 에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그 뱀은 고치에 있는 무방비 상태의 마물을 공격해서 마력을 얻는 종류거든.”

에드는 고개를 내려 대공을 바라보았다.

“아, 그렇습니까?”

“응, 그래서 그놈이 떨어져 나온 고치를 찾아 핵을 파괴하면 쉽게 균열의 틈에서 나갈 수 있어.”

에드는 다시 하늘로 시선을 줬다.

‘그런데 수많은 고치 중에 그걸 어떻게 찾으면 되는 거지?’

그 속마음을 알아챈 대공이 에드의 손목을 살짝 잡아끌며 말했다.

“유충을 먹고 힘을 키우다가 우리의 기운을 느끼고 다가온 것 같으니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거야.”

대공의 손길에 에드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저 높은 하늘에 걸려 있는 게 아니라 이 주변 나무에 걸쳐져 있을 확률이 높아.”

대공은 에드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며 길을 텄다. 에드는 그에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무성한 풀잎을 헤치고 나아가는 대공의 발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견한 미루나무 중간에 걸린 고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밑이 터진 고치가 나뭇가지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를 확인한 대공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에드를 쉬기 편해 보이는 바위에 앉혔다. 너르고 편평한 자리였다.

“에드, 잠시만 여기에 있어.”

“네, 알겠습니다.”

에드는 대공이 하는 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을 죽였다.

대공은 검을 빼 이번에도 손으로 검날을 길게 쓸었다. 그리고 검으로 고치를 겨눠 날렸다.

검이 고치의 정중앙에 팍 박히자 고치가 쩍, 쩍 갈라지며 깨졌다. 동시에 고치 안에 있던 핵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를 주워 든 대공이 회수한 검으로 찔러 파괴했다.

파사삭.

푸르스름한 핵이 부서지며 대공과 에드의 앞으로 환한 빛이 쏟아졌다. 균열의 틈에서 나갈 수 있는 문이었다.

대공이 에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자, 에드.”

에드는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균열의 틈으로부터의 두 번째 탈출이었다.

* * *

균열의 틈을 빠져나오는 기분은 벌써 두 번째인데도 묘했다. 어두운 통로를 쭉 따라 나오다 보면 어느새 균열의 틈이 시작되었던 자리에 도착해 있었다.

그 뒤는 수월했다. 든든하고 널찍한 대공의 등만 따르다 보니 어느새 대공의 임시 거처인 막사 앞이었다.

막사 앞에 선 뒤에야 드디어 긴 하루가 끝이 나나 싶은 느낌이 들어 에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옅게 웃은 대공이 에드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리며 말했다.

“수고했어, 에드.”

“아닙니다, 대공 전하.”

그러나 에드는 이 긴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스넬 형, 이제 오셨어요?”

대공처럼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10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막사 앞에 나와 대공을 맞이했다.

소문으로 떠돌던 대공의 동생과 똑같은 외모를 하고 있었지만, 이 아이는 로넨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아이였다.

“…….”

대공의 입매는 굳었고 에드는 잽싸게 주위를 훑었다. 진짜 로넨은 어디 있나 잘 살펴보니 막사 안쪽에서 고개만 빠끔 내밀고 이쪽을 내다보고 있는 로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공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이를 바라보자 아이가 말했다.

“제, 제가 진짜 로넨케아즈 린든입니다. 아스넬 형.”

“로넨케아즈 린든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아이의 목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아이의 목에는 붉은색 루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