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8
발밑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에 에드는 뒤통수로 치솟는 한기를 느꼈다. 발이 그 자리에 붙박인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늪지대에 빠진 것 같았다.
“괜찮아, 에드. 이번엔 혼자 보내지 않아.”
하지만 대공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등을 감싸고 뒤통수를 부드럽게 누르자 에드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대공이 몸을 밀착하자 에드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건 불안감보다는 가득 맞닿은 대공의 온기와 체향에 의한 두근거림에 가까웠다.
에드가 고개를 들자 자신을 끌어안고 턱을 단단하게 굳힌 대공이 눈에 들어왔다.
에드는 대공을 마주 안기 위해 팔을 크게 벌려 대공의 등을 감쌌다. 혹시라도 대공을 놓칠까 봐 걱정되었다.
두 팔 가득히 감겨 오는 대공의 등은 크고 탄탄했다. 서로의 팔에 스치는 옷감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틈 없이 맞닿았다. 에드는 손에 깍지를 껴 대공을 놓치지 않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런 에드의 움직임에 대공이 옅게 웃었다. 그 잔잔한 파동이 에드의 정수리로 가볍게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주변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
에드는 신음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눈앞이 캄캄했고 곧이어 몸이 아래로 훅 떨어지다가 뭔가에 통, 통, 통 치받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대공이 워낙 자신을 잘 감싸 안은 덕에 충격은 없었다. 비탈길이라도 구르는 건지 아래로 데굴데굴 구르던 몸이 어느 순간 멈췄다.
“…….”
에드는 대공의 품 안에서 머리를 빠끔 들어 올렸다. 고개를 들자 커다란 나무 잎사귀가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푸른 하늘에는 하얀 실이 돌돌 감긴 뭉치들이 둥둥 떠 있었다.
현실과 흐름이 다른 세계의 모습에 에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기는 균열의 틈…….”
“그래, 사냥터 근처에 균열의 틈이 생긴 모양이야.”
대공이 에드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넘기며 말했다.
에드는 멍하니 하늘로 주었던 시선을 내렸다. 대공이 아이를 가슴에 올려 받친 것처럼 자신을 몸으로 받쳐 안고 있었다. 에드의 등을 감싼 단단한 팔은 어떠한 충격에도 절대 에드를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대공 전하?”
“물론이지, 에드.”
에드는 대공을 꽉 부여잡았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대공의 몸에서 일어나려고 꼬물거리자 대공이 옅게 웃으며 팔을 풀었다.
에드는 자신을 단단하게 감쌌던 무게감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다시 대공을 깔고 앉았다니…… 벌떡 일어나 대공에게서 비켜 앉자 대공이 옅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에드는 대공의 모습을 면밀하게 살폈다. 혹시라도 다친 곳은 없나 걱정스러워하는 눈빛이었다.
‘나를 끌어안고 굴러떨어져 충격이 더 컸을 텐데.’
대공은 그런 에드의 시선을 마주하다가 에드의 팔에 묻은 먼지를 살살 떨어내며 물었다.
“에드는 어디 불편한 곳 없고?”
“네, 괜찮습니다. 대공 전하.”
“그래, 그럼 움직일까?”
“……움직여도 괜찮을까요?”
에드는 하늘에 둥둥 떠 있는 하얀 실타래 무리에 힐끗,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균열의 틈은 마물의 공간이었기에 아무 준비도 없이 그들과 싸우게 된다면 아무래도 이쪽이 불리했다.
‘대공 혼자서 움직이는 것이라면 몰라도 나까지 함께 달고 행동한다면 굼떠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니 날 버리고 대공이 혼자 움직이는 편이 이 사태를 더 빠르게 해결하는 방법 아닐까?
에드는 그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대공이 에드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리며 시선을 잡아끌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에드. 이 고치에는 탈피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모으고 있는 나비 마물의 유충이 들어 있거든.”
에드가 고개를 내려 대공과 시선을 맞추자 대공이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고치 안에 핵이 들어 있는데 이런 경우엔 마물이 고치를 뚫고 나오는 때를 노려 핵을 파괴하는 게 좋아. 그럼 괜한 힘을 쏟지 않아도 되거든.”
“아…….”
마물이 진화하는 균열의 틈도 있구나.
실타래로 보이던 것이 모두 고치라고 생각하자 기분이 묘했다. 저 안에서 마물들이 둥실둥실 떠다니며 쉬고 있는 것일까?
“이 마물은 고치만 건드리지 않으면 먼저 공격하지 않아서 불필요한 전투를 피할 수 있어. 그리고 생각보다 고치가 단단해서 웬만한 공격으로는 잘 뚫리지 않기도 하고.”
대공의 설명은 간결하면서도 알아듣기 쉬웠다.
자신 때문에 자리를 옮기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에드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 변화를 감지한 대공은 에드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움직일까, 에드?”
* * *
에드가 두 번째로 들어온 균열의 틈은 무척 신기했다. 볕은 환했고 나무는 크고 높았다. 나무 잎사귀는 푸르고 싱싱했으며 하얀 실타래처럼 보드랍고 통통한 모양새로 하늘에 떠 있는 고치들은 어떻게 보면 귀엽게 느껴지기까지도 했다.
그 풍경을 바라보다가 앞서 걷는 대공의 등에 이마를 박을 뻔한 에드가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손바닥으로 뺨이라도 톡, 톡 치고 싶었지만, 오른쪽 손목이 대공에게 잡혀 있어 할 수 없었다.
‘정신 차리자.’
대공과 함께 있다고 해서 해이해져서는 곤란해.
지금은 평화로운 모습으로 유지되는 균열의 틈이라고 해도 언제 어떤 식으로 바뀔지 모르니까.
에드는 앞장서는 대공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뒤를 따랐다.
“여기에 머물면서 상황을 보면 좋을 것 같아.”
대공이 찾은 곳은 작은 동굴이었다. 대공이 먼저 안쪽에 마법 등을 피워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에드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 여기에 앉아 있어.”
넓적한 바위에 에드를 앉힌 대공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허리를 굽혀 뭔가를 주워 들었다.
‘뭘 하시는 거지?’
고개를 빼고 대공을 주시하던 에드는 그가 불을 피우기 위해 마른 나뭇가지를 찾는다는 걸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지런히 동굴 안을 움직이며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대공에게 내밀자 대공의 품이 어느새 땔감으로 묵직해졌다.
대공이 웃으며 말했다.
“이거 다 피우기 전에 나갈 수 있도록 하자.”
에드는 불을 피우는 대공의 곁에서 또 뭐 도울 일이 없는지 살피다가 대답했다.
“네, 방해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대공 전하를 보좌하겠습니다.”
대공이 손을 몇 번 움직이자 장작에 불이 붙으며 동굴 안이 환해지고 따스해졌다.
에드는 불 가까이에 다가가 앉았다. 동굴의 서늘한 바람을 타고 불꽃이 일렁거렸다. 에드의 시선이 그 불꽃을 따라 고요히 움직이며 빛났다.
대공은 그를 바라보다 마른 나뭇가지를 더 집어넣었다. 타닥타닥, 마른 나뭇가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고요한 동굴 안을 울렸다.
“그런데 에드.”
“네, 대공 전하.”
“그 굴에는 어쩌다 떨어진 거지?”
대공은 에드의 마음이 많이 가라앉은 게 느껴지자 진상을 파악하고자 했다. 아까 굴속에서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건 에드에게 경황이 없어 보였던 탓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으면 다그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그렇기에 에드의 마음이 진정되고 긴장이 풀리면 상황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작은 나뭇가지를 들고 불꽃을 가볍게 헤집어 보던 에드가 아, 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게 대공 전하께서 제게 맡기신 황금 장신구를 살피러 밖으로 나왔는데 갑자기 제 발목을 잡는 넝쿨이 있었습니다.”
“넝쿨?”
“네, 엄청 힘이 셌습니다. 제 발목을 휘어 감자마자 저를 아까 그 굴로 질질 끌고 갔습니다.”
“그렇다면 마법으로 만든 생명체겠군.”
“네,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넝쿨은 대공 전하의 기운이 스민 장신구에 반응한 것 같습니다. 끌려 들어간 굴속에 실험실 같은 게 있었는데 그곳에서 커다란 수조에 넝쿨이 담겨 있었습니다.”
에드는 굴속에서 봤던 것들을 차분하게 설명해 나갔다. 허락되지 않은 흑마법을 쓰는 노인과 자신이 들은 그들의 대화에 대해서도 말했다.
“대공 전하를 노리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심각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에드를 바라보며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시선을 내리깔아 에드의 발목을 바라보았다. 바지가 살짝 올라가 드러난 속살에 불그스름한 자국이 보였다. 마치 옅은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아마 아까 넝쿨에 끌려갔을 때 생긴 상처겠지.’
대공은 에드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입을 뗐다.
“잠깐, 에드. 발목 좀 볼까?”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음, 그래. 잠깐만.”
에드가 만류했으나 대공은 손을 뻗어 에드의 왼쪽 발목을 살짝 잡아챘다. 그러자 불꽃에 비치는 에드의 발목에서 옅은 자국이 드러났다.
대공은 가볍게 혀를 찼다.
‘약으로 쓸 만한 게 없는데.’
잠시 고민한 대공이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에드의 발목에 감았다. 하얗고 가는 다리였다. 그 약한 피부에 붉게 난 자국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
“…….”
대공이 손으로 발목을 잡고 상처를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짚어 나가며 쓸듯이 움직이자 에드는 발끝이 간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부드럽게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 목이라도 긁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타닥타닥, 마른 나뭇가지가 타는 불꽃 앞에서 서로의 눈빛이 맞닿았을 때 어쩐지 동굴 안의 열기가 쑤욱 올라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