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7
“에드, 약속 어기지 않고 자정 전에 왔지?”
귓가에 닿는 대공의 목소리에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통수를 감싼 커다란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몸이 느슨하게 풀렸다. 어깨가 크게 솟았다 내려앉으며 쿵쾅쿵쾅 뛰던 심장이 차츰 안정을 찾았다.
그러다 에드는 고개를 기울였다.
‘……어, 그런데 대공 전하가 정말 맞는 걸까?’
굴 안은 어두웠고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대공의 목소리는 맞았지만 생각해 보니 의문이 들었다.
‘그가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는 거지?’
나조차도 넝쿨에 정신없이 끌려와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이 되질 않는데.
메마른 입술을 잘근거리며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드러나는 눈앞의 대공을 시선으로 덧그리듯이 살펴본 에드는 무겁게 입을 뗐다.
“……저, 그런데 대공 전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에드.”
“외람된 질문이지만 제가 여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아셨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아.”
하며 짧게 침음한 대공에게서 옅게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직 나에 대한 확신이 없는 모양인데.”
그렇게 대답하며 대공이 에드의 뒤통수를 감싼 손을 살짝 움직였다. 머리카락을 파고들어 두피에 길을 트듯이 움직이는 손가락의 느낌에 에드는 눈을 깜빡였다.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카락을 가볍게 헤집던 대공이 손을 앞으로 옮겼다. 흙과 땀이 묻은 에드의 이마에 손이 닿자 그가 한층 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이마를 가볍게 문질러 흙을 살며시 떨어내는 대공의 행동에 에드는 옅게 웃고 말았다.
‘어딜 어떻게 생각해도 대공의 손길이 맞잖아.’
그 웃음소리를 들은 대공은 에드가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는 걸 느꼈다. 에드가 긴장을 완전히 풀었다는 것을 깨닫자 이번에 대공은 그의 앞머리를 살살 쓸어 넘겼다.
“벌써 알아챈 거야? 계속 확신하지 못하면 이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어떤 말씀을 말입니까?”
대공이 에드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 톡 치며 물었다.
“뭐라고 말할 것 같아, 에드?”
“아…….”
‘설마 그 말을 또 하려는 건 아니겠지?’
〈키스해 줄까? 에드.〉
그 생각이 나자 에드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를 막았다.
그런 행동에 대공이 옅게 웃으며 에드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뗐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손에 감겼다 빠져나가는 느낌에 손끝을 둥글게 말아 매만졌다. 간지럽고 묘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에드의 가슴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떠나기 전에 떼어 준 장신구에 마법이 걸려 있거든. 선황제께서 특별히 신경 써 만들어 주신 하사품이니 최상급 마법들도 함께 녹아들어 있지.”
에드는 대공의 조곤조곤한 설명에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에 가득 잡혀 오는 한 쌍의 장신구가 이제는 그렇게 마음을 든든하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에드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감지하고 내가 여기로 올 수 있었던 거야.”
에드는 그것들을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다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이렇게 귀한 물건을 제가 가지고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덕분에 이렇게 대공 전하를 만날 수 있었지만요. 하지만 이 장신구는 다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기엔 너무 귀한 물건인 듯해서 말입니다, 대공 전하.”
그사이 장신구에 흠집이라도 났을까 봐 마음을 졸이며 에드는 손수건에 감싼 장신구를 두 손에 소중히 올렸다.
대공은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에드가 장신구를 올려놓은 손을 받치듯 잡아 둥그렇게 말았다.
작고 따스한 손이었다. 여기까지 끌려오는 동안 이 손으로 장신구를 지키고, 여길 홀로 빠져나갈 생각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선득해졌다.
‘만약 이 장신구를 에드에게 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렇게 금방 에드를 찾을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에드는 다른 이들의 손에 잡혀 곤욕을 치렀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대공은 손끝이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에드가 잘 가지고 있었으니까 조금 더 부탁할게. 우선은 이곳을 나가 볼까?”
에드는 대공의 따뜻한 체온에 감싸인 손이 간질거려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리고 장신구를 도로 넣을 때까지 손을 뗄 것 같지 않은 대공의 모습에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당장 급한 건 아니니 우선은 이곳을 나간 뒤 돌려드리자.’
에드는 손수건으로 잘 감싼 장신구를 도로 품에 넣고 망토를 정리했다. 탁, 탁 가볍게 옷을 정리하자 대공이 손을 뻗었다.
“에드, 내가 앞을 안내할게.”
“네, 뒤처지지 않고 잘 따르겠습니다.”
“좋아, 그럼.”
대공이 에드의 손목을 잡고 앞쪽으로 나아갔다. 에드는 갈고리처럼 저를 옭아맨 대공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앞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발을 움직였다. 아까와 다름없이 어둡고 좁은 굴속이었으나 제 손목을 단단히 감싼 온기에 더 이상 이 공간이 두렵고 무섭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공과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다른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에드는 앞서 움직이는 대공의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그런데 대공 전하.”
“그래, 에드.”
“황제 폐하와 함께 밤 산행을 나가셨었는데 이렇게 홀로 움직이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아, 그 일은 말이지.”
대공이 앞에서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에드가 힘겨워하지 않고 잘 따라오는지 확인한 그가 말을 이었다.
“사냥터의 땅이 흔들린다는 말이 있어서 밤 산행이 취소되었거든.”
“땅이 흔들린다니요? 지진이 일어났다는 말씀입니까?”
아니면…….
에드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가늘게 뜬 눈으로 지금까지 지나왔던 길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 괴짜 노인과 사나운 넝쿨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닐까?
이런 곳에 연구실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굴을 파냈으니 땅에 무리가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대공이 손가락으로 제 손목을 톡, 톡 쳐왔다.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에드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지진은 아니었어. 하지만 그게 어떤 원인으로 그런 것인지 명확하지 않아서 말이야. 그래서 로넨을 데리러 갔는데 에드는 보이지 않고 막사 뒤쪽으로 무언가가 질질 끌려간 흔적이 보이기에 장신구에 담긴 마법의 흔적을 쫓아갔지.”
“아…….”
“에드에게 황금 장신구를 준 게 정말 다행이었어. 그렇지 않았으면 한참을 헤맬 뻔했으니까.”
대공의 말에 에드는 가슴께를 만지작거렸다. 볼록 튀어나온 장신구를 손으로 가볍게 다독여보다가 대공과 함께 발을 맞춰 움직였다.
“참, 그런데 대공 전하. 조심하셔야 합니다. 굴 아래에 연구실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있던 기사 한 명이 제가 이곳에 있는 것을 눈치채고 밖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아마 제가 어디 있는지 알고 어떤 출구로 나올지 예상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앞서 걷던 대공이 문득 발을 멈추고 뒤로 돌았다. 로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텐스에게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헤린스 백작가에서부터 지금까지 에드에게는 고마운 일뿐이군. 이번에도 로넨을 위해 움직이다가 이런 봉변까지 당하고……’
대공은 에드의 머리를 가볍게 흐트러뜨렸다.
‘다시는 에드가 홀로 그런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하려 했는데.’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앞서 걸으며 말했다.
“음, 그럼 그놈이 그놈이었나. 굴 입구에서 어리바리하게 움직이는 녀석이 있기에 이르텔에게 넘기고 들어왔거든.”
심상한 말투였으나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 걱정할 필요 없어. 대신 막사로 돌아가면 오늘 에드에게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말해 줘.”
에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들이 대공 전하를 노리는 것이 틀림없으니 상황을 파악하고 대비하셔야 합니다.”
“나를 노린다, 라.”
“네, 전하의 발을 묶는다면서 이상한 실험을…….”
그 순간, 에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랄까. 확신할 순 없었지만, 발밑이 흔들리는 느낌이 든 것 같은데…… 아닌가? 에드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와 동시에 발을 멈춘 대공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운 굴 안을 가늘어진 눈으로 살피다가 뒤로 돌았다. 에드를 내려다본 그가 마법을 피워 올렸다.
이 불빛으로 혹시 모를 적들에게 위치가 들킬 수도 있었지만, 방금 느껴진 진동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공은 어서 빨리 에드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고자 했다.
부우웅.
그때였다. 땅속 깊은 곳에서 울림이 느껴진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발밑이 부서지는 느낌이 났다. 분명히 단단한 흙바닥을 딛고 있는데도 살얼음이 깨지듯이 발아래가 산산이 조각나며 땅이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그에 에드는 대공을 올려다보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었고, 대공은 에드의 등을 감싸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가 에드의 뒤통수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괜찮아, 에드. 이번엔 혼자 보내지 않아.”
그곳이 어디이든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