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6
“윽.”
파스스스, 온몸에 달라붙는 차가운 흙과 나뭇잎의 감촉에 에드는 이를 악물었다. 땅바닥을 질질 끌려가는 속도가 몹시 빨랐다.
에드는 왼쪽 발목을 붙잡은 거센 힘을 풀어내기 위해 오른발로 넝쿨을 힘껏 밀어내 봤지만 소용없었다. 그럴수록 발목에 돌돌 감긴 넝쿨이 더 빨리 움직이는 것 같았다.
땅바닥에 등이 무참히 쓸리는 와중에도 에드는 장신구가 망가지지 않게 품속에 있는 물건을 감싸 안았다.
그 순간, 갑자기 바닥 아래로 몸이 쑤욱 꺼지는 느낌에 에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으윽, 어디까지 끌려가는 거지?’
에드는 제법 길게 느껴지는 부유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발목을 꽈악 묶었던 넝쿨이 퉤, 하고 에드를 뱉어내듯이 떨쳐 냈다. 그 바람에 탁 풀려나며 내동댕이쳐진 에드는 도르르 굴러 벽에 등을 박았다.
‘윽.’
에드는 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주변이 조용해진 것을 느끼고 살며시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에드가 떨어진 곳은 사람 두 명 정도가 겨우 움직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넓지 않은 땅굴이었다.
누군가 여러 번 길을 내어 만든 건지 땅이 고르지 않았다. 벽에는 채찍질이 된 것 같은 자국도 남아 있었다.
‘아마도 넝쿨이 제멋대로 땅을 휘젓다가 남긴 흔적이겠지.’
에드는 흙이 묻은 눈꺼풀을 소매로 훔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시선을 앞으로 주자 자신을 끌고 온 넝쿨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땅굴 끄트머리에 철창으로 만들어진 창문이 있었다. 그 철창 사이로 넝쿨이 드나드는 것 같았다.
‘나를 저 안으로 끌고 가려다 안 될 것 같으니 버린 건가?’
침을 꼴깍 삼킨 에드는 조심히 무릎걸음을 한 채 침침한 빛이 새어 나오는 철창 근처로 다가갔다.
그러자 매캐한 냄새가 확 퍼지며 코끝이 화끈거려 에드는 팔을 들어 코를 막았다.
‘환기구로 만든 곳인가 보구나.’
철창 사이로 밑을 살펴보니 남자 둘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노인과 조수로 보이는 남자였다.
“아니, 이놈은 왜 자꾸 밖으로 기어나가는 거야?! 들키면 안 되는데!”
“잠시만요, 스승님. 그렇다고 그렇게 약을 많이 부으시면 어떻게 해요. 그러다가 어디라도 잘못되면 큰일이잖아요.
“잘못되긴 뭐가 잘못된다는 거야? 기운이 하도 좋으니까 잠시 재우는 것뿐이잖아? 내일 사냥제가 시작될 때 잠시 요란만 떨어 주면 되는데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노인이 신경질을 내며 말하자 조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그러다 제때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시려고요?”
“그런 일은 절대 안 일어나니까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일이나 해!”
침침한 등불 사이로 드러나는 안쪽 공간 중앙에 커다란 투명한 수조가 있었다. 물이 가득 찬 그 수조 안에는 아까 본 커다란 넝쿨이 들어차 있었다. 그 수조가 좁고 답답한지 넝쿨이 자꾸 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했다.
그러자 노인이 수조를 발로 퍽, 걷어차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 바람에 물에 잠겼던 넝쿨이 위로 풀썩이자 물이 밖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아, 스승님!”
“뭐, 이 자식아!”
벽에 기대져 있던 대걸레를 들며 조수가 궁싯거리자 노인이 이번에는 조수의 다리를 차려고 했다.
에드는 시선을 돌렸다.
수조 옆에는 커다란 솥단지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정체불명의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노인이 그 솥단지의 액체를 바가지로 한가득 퍼 넝쿨이 들어 있는 투명한 수조에 부었다. 그러자 넝쿨이 바르르 몸을 떨듯이 움직이다가 축 늘어졌다.
그 사이에 조수가 테이블에 늘어져 있는 새하얀 뼛조각들을 넝쿨이 담긴 수조 안에 퐁당퐁당 빠뜨렸다. 커다란 동물의 잔해인지 뼈 하나하나가 제법 컸다.
‘뭐 하는 거지?’
에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안을 주시했다.
“이렇게 얌전히 있으니까 얼마나 좋아?”
“그러게 말입니다. 대공의 기운에만 반응하도록 했는데도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계속 밖으로 나가네요.”
‘대공의 기운?’
에드는 둘이 나누는 대화에서 대공이란 단어가 등장하자 조금 더 앞으로 움직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대공의 발만 잠시 묶으면 되니 어려울 것도 없구먼, 이놈의 줄기 새끼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다시 한번 수조를 발로 툭, 걷어찬 노인이 테이블 위를 쓸 듯이 뼛조각을 챙겼다. 그걸 그대로 수조에 집어넣으려고 하자 조수가 노인의 옷을 잡아당기며 말렸다.
“스, 스승님! 그걸 그렇게 마구잡이로 넣다가 폭주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네크로맨서로 30년을 넘게 살았는데 이런 실험체 하나 못 다룰까 봐?”
노인이 뚱하게 답하며 뼛조각들을 수조에 넣자 보글보글 거품이 일더니 곧 잠잠해졌다.
에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크로맨서라고?’
시체를 이용해 흑마법을 사용하는 네크로맨서들은 제국에서 허락받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하필 황제가 참석하는 사냥제가 한창인 이곳에?
황궁에서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한 탓에 이곳엔 허락받지 못한 이들은 들어올 수 없을 텐데?
또 저들이 대공을 노리는 이유는 뭐고?
에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시에 하나의 가능성이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혹시 저들을 황제가 고용한 걸까?’
끼이익.
그 순간, 연구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는 벽 쪽으로 몸을 바짝 붙여 사각지대 안쪽으로 몸을 숨기며 숨을 죽였다.
그때 연구실 안에 남자 하나가 더 들어왔다.
“일은 잘되어 가나?”
“아, 기사님. 물론입지요.”
“절대 실수 없게 해야 하니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놓쳐서는 안 되네.”
“전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놈이 말은 좀 안 들어도 대공의 기척이라면 귀신같이 찾아내 발을 묶을 테니까요.”
“발을 묶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적어도 다리 하나는 부러뜨려야 너희들에게 연구를 맡기는 보람이 있지 않겠나?”
노인과 기사의 대화에 에드는 살짝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누가 대공을 노리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수조 안을 둘러보며 대화를 나누는 기사는 검은색 정장의 평범한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이나 걷힌 소매로 드러난 팔 근육을 보니 하급 기사는 아니라는 게 짐작되었다.
“내일은 기대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기사님.”
“흠, 그래. 그런데 이 뼈다귀들은 뭐지?”
그 순간, 까득까득 뼈 맞춰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수조 안에서 시퍼런 연기가 피어올랐다.
남자는 뒤로 물러서며 손으로 코를 막았고, 노인은 수조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며 입을 놀렸다.
“보십시오, 기사님. 이 줄기와 뼛조각이 이렇게 연결되어 표적을 공격하는 겁니다.”
노인이 가리키는 손끝에는 하얀 뼛조각이 넝쿨 줄기 끝에 달려 까딱이고 있었다.
넝쿨이 물속을 흐늘흐늘하게 떠다니다가 강한 유리로 만들어진 수조를 콱, 찍자 수조가 진동하며 물이 크게 떨렸다.
“흠, 이걸로 대공에게 치명상을 입히기는 힘들 것 같은데.”
남자가 턱을 매만지며 의문을 표하자 노인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저 뼛조각 끝에는 전갈 꼬리처럼 독이 있으니 대공이 아무리 강건하다고 한들 저 녀석에게 한 번 스치면 며칠은 앓아누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며칠이라…… 딱 좋은 기간이군.”
“네, 그런데 대공이 지녔던 물건은 가져오셨습니까? 저번에 주셨던 소지품에는 대공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이 녀석이 자꾸 목표를 잘못 잡는 거 같습니다.”
노인이 수조를 손으로 톡, 톡 치자 넝쿨이 답하듯이 수조를 톡, 톡 쳤다.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은 남자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뭘까? 싶어 에드는 미간을 좁히며 집중했다.
‘어, 저건.’
“음, 이건 아이 옷이 아닙니까?”
“잘 간수 해. 얼마나 주변 관리가 철두철미한지 마차 뒤에 떨어져 있던 걸 간신히 하나 구한 거니.”
로넨의 얇은 케이프였다.
“현재 대공의 가장 큰 약점인데다 같은 피를 나눴으니 저 녀석도 마음에 들어 하겠지.”
기사가 덧붙이는 말에 노인이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기사님.”
노인이 케이프를 챙겨 드는 걸 보며 에드는 메마른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그래, 그럼.”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돈 기사의 손에는 어느새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걸 본 에드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잽싸게 고개를 뒤로 뺐다.
푸욱.
동시에 저를 스치고 지나가 흙벽에 파묻힌 단검을 본 에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들켰어. 빨리 땅굴을 벗어나 저들로부터 멀어져야 해.’
그 생각만 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에드는 순간 흠칫, 했다. 좁고 어두운 땅굴 안에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섰다는 걸 눈치챈 탓이었다.
‘그, 그 기사의 일당인가?’
앞으로 나아가던 움직임을 멈춘 에드는 몸을 돌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났다.
‘잡히면 끝이야.’
그와 동시에 제 얼굴 옆을 훑듯이 지나가는 기척이 있었다.
아마도 팔을 뻗어 자신을 잡아챌 것이라고 생각한 에드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 손이 머리를 휘어잡아 앞으로 몸이 확 쏠릴 것을 대비한 것이었다.
“……아.”
그러나 통증 대신 뒤통수를 부드럽게 감싸는 손길이 다가오는 동시에 이제는 익숙해진 향이 확 퍼지자 안도감이 느껴졌다.
“에드, 약속 어기지 않고 자정 전에 왔지?”
대공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