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
“다시 한번 말해 줄 수 있을까?”
“네? 뭘요?”
로넨이 대공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하자 대공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라고 말이야.”
“아.”
짧게 탄성을 토한 로넨이 환하게 웃었다.
“그건 하나도 어려운 말이 아닌걸요? 한 번이라 아니라 백 번, 천 번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스넬 형! 조심히 다녀오세요!”
밝고 높은 로넨의 목소리에 대공을 비롯한 부하들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래, 잘 다녀올게. 로넨.”
“네! 아스넬 형! 전 걱정하지 마시고 무탈하게 돌아오세요.”
“그래, 로넨도 즐거운 시간 보내고.”
“네! 형!”
로넨의 열렬한 배웅을 받은 대공이 로넨의 머리를 조금 더 쓰다듬다가 말에 올라탔다.
대공의 사냥복에는 두툼한 가죽이 덧대어져 있었다. 그것은 검푸른 천을 바탕으로 은과 청동으로 꾸며진 기본에 충실한 옷이었다.
‘원래라면 저 사냥복 위로 북부의 용이 새겨진 장신구가 멋있게 자리 잡고 있었을 텐데.’
에드는 품 안의 황금 장신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주 근사한 사냥복을 준비하는 건데!〉
몹시 아쉬워하던 제이논의 목소리도 기억났다.
사냥제의 본격적인 시작은 내일부터였다. 3일간 진행되는 행사였다.
전야제인 오늘은 황제와 함께 산을 한 바퀴 둘러보는 행사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황제와 귀족들은 정치와 외교를 논하기도 하고 사담을 갖기도 했다.
해서 사냥제 중에도 바로 이 전야제가 가장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그뿐인가, 황제의 눈에 들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 초대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귀족들이 많았다.
그리고 부모를 따라가지 못한 어린 귀족가의 자제들은 한자리에 모여 황제가 하사한 차와 간식을 먹으며 티타임을 갖는다.
그렇게 전야제가 지난 후에는 자리에 참석한 가문이 돌아가며 차와 간식을 준비했다.
대공은 갑자기 초대되었기에 준비할 시간을 갖기 위해 마지막 날에 간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에드는 말에 올라탄 대공의 뒷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달빛을 받은 사냥복이 서늘하게 빛났다. 검은색 머리카락이 저녁 바람에 가볍게 나부꼈다.
“…….”
그때 제이논이 에드 곁으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말을 탄 대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에드의 귀에 바람을 후, 불어넣으며 말했다.
“에드.”
“아! 깜짝이야.”
갑작스러운 공격에 에드가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왜 이렇게 놀라?”
그 바람에 같이 놀란 제이논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제, 제이논이 살금살금 다가와 놀라게 했으니까요?”
“내가 뭐 그리 살금살금 왔다고?”
제이논이 뚱하게 바라보자 에드가 헛기침을 흠흠, 하며 말을 돌렸다.
“무, 무슨 일로 그러는 건데요?”
“아, 이 말을 해 주려고 했지.”
“무슨 말이요?”
“흔들리는 풀숲을 조심하라.”
손을 둥그렇게 말아 에드의 귀에 붙인 제이논이 은밀하게 전했다.
에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흔들리는 풀숲을 조심하라고요?”
“응. 그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함부로 들여다볼 생각 말고 이상한 소리가 나면 그냥 모른 척해. 그게 최고야.”
“어, 왜요? 사나운 산짐승이 접근한 거면 어떡하려고요? 조심히 확인해 보고 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에드?”
그렇게 말하는 제이논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연하지 않은가?
에드는 제이논을 바라보았다. 풀숲에서 작은 소리라도 나면 예민해지는 게 당연했다. 들개나 멧돼지라도 나타난다면 곤란했으니.
“나는 분명히 주의 줬다. 그러다 구두가 날아와 이마를 찍어도 모른다고.”
“그게 무슨…….”
하고 대답하던 에드가 말을 멈췄다.
‘……아, 그런 의미였구나.’
작게 한숨을 내쉰 에드는 제이논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윽.”
아프지도 않으면서 배를 잡고 아픈 척을 한 제이논이 작게 웃으며 어깨동무를 해 왔다. 그러다 눈동자에 옅은 의문이 서렸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듯 ‘어?’ 하고 소리를 낸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이거? 에드? 가슴팍에 뭐 이리 딱딱한…… 아니, 딱딱하기만 한 게 아니고 날카롭기도 한 것 같은데…… 뭐지, 이거?”
“아, 아무것도 아닌데요.”
제이논이 조금 더 고개를 숙여 살펴보려고 하자 에드가 뒤로 성큼 물러났다. 제이논이 뭔가 의아함을 느끼고 본적으로 에드를 탐색하려고 했다.
“아니긴 뭐가 아닌데? 응? 아, 혹시 누구한테 선물 받은 거야?”
에드의 품 안에는 대공이 준 장신구가 들어 있었다. 수려하고 묵직한 장신구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에드는 결국 장신구를 손수건으로 소중히 감싸 품 안에 품었다. 그럼에도 뾰족한 용의 날개와 꼬리 부분이 톡, 튀어나와 존재감을 드러냈다.
에드는 망토를 덧입어 그를 감췄다. 소중히 가지고 있다가 사냥제가 끝나면 대공에게 조용히 다시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장신구에 제이논이 관심을 보인 것이다. 에드는 그의 관심을 필사적으로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제이논이 호기심을 죽이지 않고 자꾸 손을 뻗자 결국 에드는 제이논의 머리통에 손날이라도 날려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러나 대공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제이논.”
대공의 부름에 제이논이 바로 정신을 차렸다.
“아! 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빠르게 사과한 제이논이 후다닥 달려가 잽싸게 말에 올라타고는 대공에게 고개를 깊게 숙였다.
에드는 눈부시게 하얀 조이에 올라탄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대공이 말머리를 돌려 에드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다녀올게.”
에드의 입이 절로 열렸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대공 전하.”
대공이 바람결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에드도 한 번 더 말해 줘.”
이번에도 입이 절로 열렸다. 진심이 담긴 대답이었다.
“조심히 잘 다녀오십시오, 대공 전하.”
그러자 로넨도 덩달아 외쳤다.
“이따 뵈어요. 아스넬 형!”
밤이 기울어 가는 공터에서의 환한 배웅이었다.
* * *
사냥제가 열리는 숲의 공터 중앙에는 황제의 임시 거처가 있었다. 햇볕이 잘 들고 시야를 막는 방해물이 없는 자리였다.
궁에서 미리 손을 본 흔적이 뚜렷했다.
귀족가의 어린 자제들이 모이는 노란 천막은 숲 초입의 너른 공터에 만들어져 있었다.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어른들을 마중 나가기 좋았고 위험을 대비하기에도 알맞은 자리였다.
“여기인가 봐, 에드.”
대공의 배웅을 마치고 텐스와 함께 노란 천막으로 움직인 에드는 고개를 숙였다. 로넨과 시선을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네, 로넨 도련님. 처음 보는 분들과 만나는 것이 긴장되십니까?”
“……으응, 조금.”
“긴장하실 것 없이 대공 전하의 말씀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응, 알았어.”
로넨에게 옅게 미소 지은 에드는 허리를 폈다.
대공을 배웅한 후, 근위대에서 사람이 나왔다. 두 명의 기사가 로넨을 호위하게 되었다며 짧게 인사를 건넸다.
어른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귀족가의 자제를 보호겠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로넨은 꼼짝없이 노란 천막으로 발걸음을 떼야 했다.
〈오늘 저녁은 로넨 도련님이 대공 전하의 임시 거처에서 머물면 안 되겠습니까? 긴 여정으로 피로가 쌓이셔서 말입니다.〉
텐스가 요청해 보았지만 딱딱한 근위병들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렇게 근위병들을 따라 도착한 천막 앞에는 작은 놀이터가 꾸며져 있었다.
‘마치 어린이집 같네.’
꽉꽉 닫힌 다른 천막과 달리 노란 천막은 안이 훤히 보이도록 문이 열려 있었다.
밝은 불빛이 뿜어져 나오는 노란 천막 앞에 다다랐을 때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요. 대공 전하는 한눈에 띄는 외모인데 그에 비해 그 애는 너무 특색 없는 얼굴이지 않아요?”
“맞아요. 황제 폐하도 재투성이 같다고 하셨잖아요? 그 뜻이 뭐겠어요?”
“인자하신 황제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면 뭐…… 솔직히 그렇잖아요? 아직 대신전의 확인을 받은 것 같지도 않던데.”
에드의 발걸음이 무거웠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귀족가의 어린 자제들이 모인 자리라고 하지만 결국 귀족들의 사교의 장이었다. 그 자리에서 로넨을 향해 호기심이 쏠리는 것이야 당연할 테고 그중에서는 의혹의 눈초리도 있을 터였다.
그래서 로넨이 이곳에 오는 걸 원치 않았건만……. 사실 대신전에 먼저 들러서 친형제지간임을 확인하겠다는 대공의 요청을 황제가 불허했을 때부터 이상했다.
그러나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도 별수 있나. 황제의 의도대로 로넨을 초롱초롱한 날것의 시선에 노출할 수밖에.
똑, 똑.
근위병이 막사 앞에 놓인 나무판을 가볍게 두드리자 안에서 새어 나오던 목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의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아! 도련님. 오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