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63화 (63/198)

Chapter 63

에드가 대공의 임시 거처로 돌아왔을 땐 해가 서쪽으로 완전히 넘어간 뒤였다.

황제는 말이 많았지만 내용이 없어 지루했다. 하지만 귀족들은 황제의 재미없는 농담에도 웃기 바빴다. 그의 눈에 들기 위해 박수를 치며 감탄을 표했다.

단상에 덩그러니 서 있던 로넨은 황제의 말이 끝나자 대공의 손짓에 계단을 내려오며 물었다.

〈저 괜찮았어요? 실수한 건 없었어요?〉

대공은 로넨의 이마에 난 땀을 가볍게 훔치며 말했다.

〈실수라니? 아주 훌륭하고 멋지기만 했는데.〉

잔뜩 긴장했던 로넨의 어깨가 작은 한숨과 함께 내려앉는 걸 보며 대공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텐스와 함께 전야제를 구경하고 오라고 했다.

텐스가 로넨을 챙겨 움직이자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대공이 발걸음을 뗐다. 에드도 대공의 뒤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천막 안은 고요했다. 누구 하나라도 분통을 터뜨리며 소리를 죽여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런 일을 이미 많이 겪어서 익숙해진 탓일까?’

에드는 너무 조용한 상황에 입을 다물었다. 이런 식의 면박에 익숙해졌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그때 대공이 적막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이래서야 사냥제에 참석할 수밖에 없겠는데.”

의자에 앉은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드는 지금 대공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오고 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제가 개최하는 축하연에 참석해 로넨이 자신의 친동생임을 밝히려던 대공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래서야 꼼짝없이 사냥제에 끌려 나갔다가 축하연으로 이어지는 일정에 발이 묶일 듯했다. 빠져나갈 길이 마땅치 않았다.

이르텔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직접 겪으니 예상보다 더 별로인데?”

대공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듯이 말하자 이르텔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로넨 도련님을 모시겠습니다.”

사냥제는 어른들의 축제였다.

그러나 가문의 어린 영식과 영애들이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교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말을 타고 사냥감을 쫓는 사냥제는 가벼운 축제가 아니었다. 활동량이 많았고 거친 행사였다. 건장한 어른들도 며칠간 지속되는 일정에 지쳐 떨어져 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니 어린아이들이 함부로 끼어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를 위해서 황제는 어린 귀족 자제들이 한곳에 모일 수 있는 천막을 지었다.

어른들이 사냥을 나가면 그곳에 모인 어린 귀족 자제들은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눴다.

에드는 임시 거처로 돌아오는 길에 봤던 노란색 막사를 기억하며 생각했다.

‘한마디로 어린이집 같은 곳이랄까.’

혹시나 있을 위험에 대비해 밖에는 근위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귀족가의 기사들도 막사 주위를 둘러싸 호위했다.

“아니, 로넨은 텐스가 맡을 테니 괜찮아.”

대공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르텔은 제이논과 함께 나를 따른다. 그리고 제이논.”

“네, 대공 전하.”

“북부성에 무슨 일이 없는지 연락해 봐.”

“네, 알겠습니다.”

대공이 가볍게 관자놀이를 눌렀다. 많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면서도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북부까지 챙겨야 했으니 머리가 아픈 건 당연했다.

“그리고 에드.”

관자놀이에서 손을 뗀 대공이 고개를 들었다. 한쪽에 서서 방해가 되지 않게 숨을 죽이고 있던 에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 좀 잠깐 볼까?”

* * *

대공과 막사 밖으로 나온 에드는 생각했다.

‘내가 이런 자리는 처음이니 주의 줄 것이 많아 따로 보자는 것이겠지?’

앞서 걷는 듬직한 어깨를 올려다보며 에드는 마음을 다잡았다. 대공에게 절대로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걸음을 놀렸다.

대공의 분위기가 자못 심각했다.

그래서 큰 호두나무 아래에서 대공이 발을 멈췄을 때 에드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대공이 어떤 명을 내리든 잘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에드.”

“네, 대공 전하.”

“텐스와 함께 로넨을 부탁해. 자정 전까지 무조건 돌아올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공 전하.”

“그리고.”

잠깐 말을 멈춘 대공이 손을 내밀었다. 에드의 앞머리에 팔랑팔랑 내려앉은 나뭇잎을 떼어 주었다. 그 손길에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들던 조명 빛이 가로막히며 얼굴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저절로 눈이 감기는 안온함이었다. 앞머리를 가볍게 넘기는 손길과 부드러운 어둠에 에드는 눈을 감았다가 나지막한 목소리에 눈을 떴다.

“다른 놈들이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하려고 해도 절대 넘어가면 안 돼, 에드.”

낮게 목을 울리는 음성에 에드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네?”

‘행동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에드는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니까 그것만 조심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것만 조심하면 되냐니? 그게 전부인데.”

“음, 그게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귀족들이 많이 모인 자리이니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거나 막사 밖을 돌아다니지 말라는 주의 사항을 주실 줄 알았습니다.”

“말을 하지 말라니? 누가 감히 아스넬 린든 대공의 사람에게 그런 걸 요구한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대공의 붉은 눈동자에 시퍼렇게 날이 선 것 같았다.

에드는 대공을 올려다보며 이마를 긁적였다.

“그게 그러니까 말입니다, 대공 전하. 제가 말 한마디를 잘못했다가 대공 전하께 폐를 끼칠 수도 있고요, 행동 한 번 잘못했다가 북부 전체에 욕을 먹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리가. 그런 일이 생긴다면 에드의 말과 행동을 잘못 받아들인 놈이 문제인 거겠지.”

아니, 그게 왜 그렇게 되나.

에드가 의아함을 내려놓지 못하자 대공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대공의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 거야.”

그 말에 에드가 또다시 김빠진 소리를 내며 웃자 대공이 덧붙였다.

“아스넬 린든의 이름을 걸고 내가 에드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의미이니까.”

“…….”

“그러니 그런 쓸데없는 걱정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을 필요는 없어. 그보다 문제는 다른 데 있는데…….”

대공의 진지한 대답에 살짝 풀어지려던 마음을 다잡으며 에드가 물었다.

“……어떤 문제인데 이렇게 고민하십니까?”

“그게 말이지.”

“네, 대공 전하. 말씀해 주시면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밤 산행에 에드를 두고 가자니 계속 다른 사람이 접근하지는 않을까 마음에 걸리고, 데리고 가자니 에드가 너무 힘들어할 것 같아서 말인데.”

“……아.”

짧게 한숨짓는 에드를 보며 대공은 옅게 웃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푸른 눈동자가 막사 주변을 밝히는 주황색 조명과 만나 반짝였다.

대공은 에드의 옅은 금발을 시작으로 검은색 구두로 감싸인 발끝까지 내려다보았다.

‘북부의 존재, 나의 사람이라고 드러낼 수 있는 물건이 필요한데.’

잠시 고민한 대공이 자신의 옷에 붙은 휘장을 툭, 뜯어냈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입은 정복에는 대공이 이제껏 쌓은 업적이 새겨진 배지와 북부를 상징하는 용의 문양이 조각된 황금 장신구가 어깨에 붙어 있었다.

투두둑.

양쪽 어깨에 붙은 황금 장신구를 모두 잡아 뜯자 두툼한 질감의 가죽에서 투둑 떨어지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대공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본 에드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대공이 그 조각을 에드의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에드, 설령 황제 폐하께서 너의 행실을 문제 삼는다 해도 나는 끝까지 너를 믿고 지킬 테니까 걱정할 것 없어.”

불꽃놀이를 보던 밤에 대공 전하를 따르겠다고 에드가 말했으니 이제는 자신이 답을 줄 때였다.

* * *

에드와 함께 다시 막사로 돌아와 밤 산행 채비를 마쳤을 때 대공은 로넨과 시선을 맞추며 대화를 나눴다.

“즐거운 티타임을 보내, 로넨.”

“네, 형.”

“그리고 만약 귀에 거슬리는 이야기들이 오고 가면 어떻게 하면 된다고?”

“어차피 그들은 진실을 아는 것 없이 떠들 뿐이니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저는 아스넬 형의 친동생인 로넨케아즈이니까요.”

대공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똑 부러지는 로넨 덕분에 형이 걱정 없이 황제 폐하를 모시고 밤 산행에 다녀올 수 있겠어.”

공터를 밝히는 조명에 로넨의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게 보였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형.”

“그래, 로넨. 웬만하면 자정 전에는 도착하겠지만, 혹시 늦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해. 내일부터는 조금 더 일정이 빡빡해져 푹 자고 일어나야 좋은 몸 상태로 활동할 수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럼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스넬 형.”

로넨이 말에 올라타려는 대공에게 인사를 꾸벅했다.

그러자 등자에 발을 올리던 대공이 다시 바닥에 발을 내리고는 로넨에게 다가왔다.

“…….”

“…….”

한동안 말없이 로넨을 바라보던 대공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로넨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자 대공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해 줄 수 있을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