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
사냥제는 여러 가지 요소들로 들뜨기 좋은 환경이었다.
워낙 떠들썩한 곳이니 로넨을 소개한다고 해도 금세 관심이 멀어질 터. 그러니 환영식 대신 사냥제로 대공과 로넨을 불러들인 것으로 보였다.
아까 소호앤 후작이 부츠에 묻은 흙을 털지도 못하고 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황제가 대충 미뤄 두었다가 황성에 도착할 즈음 대공을 안내할 사람을 적당히 물색한 것이겠지. 그에 사냥제에 나왔던 젊은 귀족이 부랴부랴 말을 이끌고 대공을 모신 것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황제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소호앤의 모습이 이해되었다.
에드가 파악한 것을 대공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증거로 황성을 나오고 나서부터 마차 안은 조용했다.
숲의 너른 터에 가까워지자 마차가 점점 속도를 줄였다. 황금용의 깃발이 펄럭이는 베이스캠프가 보이자 부시종장이 말에서 내렸다.
“대공 전하, 지금부터는 걸어가야 합니다.”
대공이 탄 마차 앞에서 부시종장이 고하자 대공은 잠에서 깨서 긴장한 얼굴을 한 로넨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겨주며 옅게 웃었다.
“긴장할 것 없어, 로넨.”
로넨이 대공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형.”
마차에서 내리자 펄럭이는 커다란 검은 용의 깃발이 꽂힌 천막이 있었다. 여기가 대공이 쓸 임시 거처인 듯했다.
로넨의 뒤를 이어 마차에서 내린 에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대공 전하.”
부시종장이 앞서 걸으며 길을 안내했다.
대공은 로넨과 손을 잡고 앞서 걸었다. 그 뒤를 이르텔과 텐스가 뒤따랐다. 말수가 부쩍 적어진 제이논이 에드와 함께 그 뒤를 따랐다.
부시종장은 대공 일행을 단상이 마련된 곳으로 안내했다.
단상으로 향하는 길은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고 세 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게 만들어진 윗부분은 꽃과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 앞으로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고급스러운 사냥복과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귀족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큰 규모의 행사라는 것이 실감 났다.
에드는 조용히 대공의 뒤를 따랐다.
“황제 폐하 납십니다!”
그때 뿔고둥 소리가 크게 울리며 큰 외침이 들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깊게 숙이며 레드 카펫을 밟고 전진하는 황제를 향해 예를 취했다.
주위를 휘둘러보며 단상에 선 황제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사냥제를 무탈하게 개최하게 되어 기쁘군.”
30대 후반의 황제는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어젯밤 천향조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어 살펴봤으나 사냥제를 즐기려는 짐의 뜻을 거스를 생각은 없는 모양이야. 그새 꼬리를 말고 도망쳤으니.”
황제의 말에 좌중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게 재밌나. 에드는 분위기를 따라갈 수 없어 고개를 숙인 채 황제의 말을 들었다.
“사실 천향조만 아니었다면 황궁에서 동생을 찾은 대공의 축하연을 열고 다 같이 사냥제로 이동할 예정이었으나, 그러지 못해 아쉬운 차였네. 그런데 마침 아스넬 린든 대공과 그의 동생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고 하니 소개하지. 로넨케아즈 린든, 이쪽으로.”
단상에 오른 황제가 로넨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공은 눈을 가볍게 찌푸렸으나 곧 표정을 갈무리했다. 로넨을 바라보며 가볍게 끄덕인 대공이 로넨의 손을 잡고 계단까지 움직였다.
계단을 조심히 오른 로넨이 인사를 했다.
“제국 아인드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짐의 사촌이자 북부의 지휘관인 아스넬 린든의 동생 로넨케아즈 린든을 소개하지.”
사람들의 시선이 단상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고생을 좀 한 모양이야. 짐도 예전에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뽀얗고 예쁘더니.”
잠시 말을 멈춘 황제가 피식 웃었다.
“지금은 재투성이 같군.”
황제의 말에는 비루한 빈정거림만 들어 있었다.
“그때는 비단결 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하얀 얼굴에 드리우고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시선을 잡아끌어 마치 인형 같았는데.”
으득, 제이논이 이를 꽉 깨무는 게 느껴졌다. 에드는 가늘어진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에 점점 짙게 깔리는 붉은 노을이 대지 위로 땅거미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렇지 않았나? 아스넬 대공.”
단상에서 아스넬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에는 오만함이 깃들어 있었다.
대공이 로넨과 헤어질 때 불어넣은 마력의 힘에 본래 검은색이었던 로넨의 머리카락은 회색빛으로 변하고 붉은 눈동자는 남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워낙 오랜 기간 마법이 걸려 있던 상태라서 한 번에 바뀌지는 않았지만, 로넨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은 대공을 만나고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마음이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직 완전히 되돌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라면 그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황제는 지금 대공의 속을 긁으며 도발하고 로넨에게 상처를 남기기 위해서 저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근처 귀족들에게 로넨이 진짜 대공의 동생이 맞는지 의심의 불씨를 키우려는 것이기도 하고.
왜 대공 일가가 관심받는 걸 싫어하는 황제가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로넨을 소개하나 했더니…….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저열한 저격을 퍼부었다.
에드는 입이 썼다.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 대공과 로넨에게 휴식이 주어졌으면 했다.
재투성이라고 비난하는 황제의 말도 이상했다.
로넨의 회색빛 머리카락 사이로 자라는 흑발은 오히려 묘한 매력이 더해졌다. 남보라색에서 자줏빛으로 물들어 가는 눈동자도 신비롭기만 했다.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로넨을 바라보는 시선에 호기심과 함께 선망의 눈초리가 더해지는 이유였다.
황제를 올려다보던 대공은 로넨과 시선을 맞췄다.
〈로넨, 너 스스로를 믿어.〉
〈로넨, 너는 틀림없이 나와 친형제야. 네 안에 흐르는 부모님의 피를 믿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널 지켜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던 대공은 로넨에게 지속적으로 이런 말을 해 왔다. 로넨이 황제의 계략에 당해 자신과 형제 사이임을 의심하지 않도록. 또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시무룩해지려던 로넨이 대공과 마주친 시선에 마음을 잡는 게 느껴졌다. 흐릿해지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를 확인한 대공이 황제에게 답했다.
“황성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을 수호하는 일개 신하의 사사로운 점까지 기억해 주시는 황제 폐하의 자애로움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하, 아스넬 대공과 로넨케아즈가 어찌 짐에게 변방을 지키는 일개 신하겠나. 북부성에 불이 나 로넨케아즈를 잃어버렸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도 짐이 얼마나 걱정했는데.”
황제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겸양은 미덕이라지만 그쯤이면 가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 그만하고 그래, 그동안 잘 지냈나? 사냥제에 함께하자고 초청해도 어찌 얼굴 한 번 보기가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
황제의 면박에도 대공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의 광명이 변방인 북부까지 오롯이 닿아 항상 영광을 느낍니다. 그러나 북부에 마물의 출현이 많아 존귀하신 부름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해 신은 항상 송구스러운 마음뿐입니다, 황제 폐하.”
황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짐의 기분이 매우 좋다.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도 사적인 감정을 내비칠 만큼 말이야.”
황제의 갈색 눈동자가 스륵 움직였다. 고개를 들고 그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매를 끌어 올렸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 짐의 말이 길어지면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걸 알지만 오늘은 이해해 주게. 아스넬 대공이 그리 염원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은 곧 짐의 친족을 찾은 것과 마찬가지이니 말이야. 짐은 그 사실이 너무 기뻐 지금 당장 축하연을 베풀고 싶은 심정이지.”
단상에 오른 황제를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사냥제는 제국의 건국을 기리고 초대 황제 에트롤리 네이트런 폐하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치러지는 행사이다. 결코 짐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미룰 수는 없는 일.”
황제의 목소리가 한층 더 크게 울려 퍼졌다.
“그러니 모두 제국력 487년의 사냥제의 전야제를 마음껏 즐기도록!”
와와, 하며 울리는 함성이 산 전체를 울리는 느낌이었다. 귀족들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입을 크게 벌리며 함성을 내질렀다.
황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번 사냥제는 짐의 소중한 이들도 함께하니 더 즐거운 자리가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마음껏 뛰고 격렬하게 승부를 가르게! 멋진 상품도 준비했으니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라네!”
다시 한번 큰 함성이 울렸다.
사냥제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