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
대공이 탄 마차가 황궁 후원에 다다르자 소호앤 후작이 말에서 내려 대공에게 다가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공 전하.”
수많은 사람들의 지혜와 역사로 다듬어진 황궁은 후원 역시 멋들어졌다.
색색의 꽃과 키가 작은 나무로 꾸며진 후원과 작게 만들어진 분수대, 물이 공급되고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파진 수로가 함께 어우러져 보는 것만으로 아늑하고 시원했다.
주변을 느긋하게 둘러보던 대공이 마차 문을 열고 나섰다.
“수고했네, 소호앤 후작. 덕분에 황궁에 무탈하게 도착할 수 있었군.”
“과찬이십니다, 대공 전하.”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어디에 계시지? 마중을 나오실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군.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짐을 풀까 하는데.”
대공의 말에 소호앤 후작이 잠시 주춤하는 기색이 보였다. 지금까진 긴장한 기색만이 역력했으나 대공의 질문에는 얼굴이 확 굳었다.
대공은 황성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주의를 면밀하게 살폈다. 그리고 중앙 성문에 들어섰을 때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귀족적이나 아직 풋내가 가시지 않은 소호앤 후작,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환영 기사단, 눈에 잘 띄지 않는 궁정 시종과 시녀들.’
형식적으로는 완벽했으나 틈이 보이는 환영식이었다.
‘아무래도 현재 이 황궁에 황제가 없는 것 같은데.’
그러나 그 추측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소호앤 후작이 초조하게 주위를 둘러보다 대공에게 고개를 숙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대공 전하. 제가 상황을 파악하고 오겠습니다. 정말 죄송스럽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소호앤 후작이 수고해 주게.”
“아닙니다, 대공 전하.”
고개를 꾸벅 숙인 소호앤 후작이 민첩하게 움직여 말 위에 올라타더니 빠르게 달려 나갔다.
황도에 도착하기 전부터 잔뜩 각을 잡고 있던 북부 기사단들은 그들만이 남아 있는데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서서 후원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르텔이 마차 앞에 서 있는 대공에게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아무래도 너무 조용합니다, 대공.”
“그래, 너무 쥐 죽은 듯이 조용하지.”
대공은 가늘어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푸르르, 말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후원으로 중년의 남자가 들어섰다.
“아이고, 이런. 대공 전하! 이리 먼저 오셔서 기다리실 줄이야!”
그가 크게 외치며 대공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대공은 그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했다.
“오랜만이군, 졸렌 부시종장.”
“오랜만입니다. 아스넬 대공 전하. 미리 연락을 했는데 엇갈린 모양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대공께 신경을 쓰라고 그리 신신당부했는데 말입니다!”
졸렌이 멋쩍어하면서 대공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원래 이 시기에 사냥제가 열리지 않습니까? 오늘 밤에 그 전야제가 열려 황제 폐하께서 대공 전하를 맞이한 후 함께 움직이시려고 계획을 짜셨는데 어제 하필이면 천향조가 나타났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천향조?”
“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 황궁을 나서시며 대공 전하를 성심을 다해 맞으라고 하셨는데 아무래도 전달이 잘못된 모양입니다.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스넬 대공 전하.”
그리고 그런 사정을 마차 안에서 듣고 있던 에드는 생각했다.
‘아, 아무래도 이거 그거인 것 같은데.’
……길들이지 못한 맹수 훈련 시키기.
* * *
사냥제는 제국의 초대 황제가 천향조라는 거대한 마물을 잡았다는 역사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큰 행사였다. 황궁에서 거리가 떨어져 있는 산에서 진행되었다.
기록 속의 천향조는 마치 날아다니는 공룡처럼 생긴 마물로 머리는 바위처럼 탄탄했다. 4쌍의 커다란 날개는 한 번 펄럭일 때마다 거대한 모래 폭풍을 일으킨다고 했다.
커다란 입에서는 산성비 같은 독이 흘러나오고 뾰족한 이빨에 한 번 걸리면 강철같이 단단한 물체라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다고 했다.
커다란 투석기를 이용해 대항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마법사들과 기사들이 단결해 대적해도 무찌를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런 천향조와 홀로 싸워 승리를 쟁취한 초대 황제의 업적은 오랜 기간이 지났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천향조가 유명한 건 그 때문이었다.
초대 황제의 일대기에도 기록되었고, 마물기록전의 제일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대 황제가 토벌했다는 기록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은 마물이었다.
‘그래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그 마물이 출현했다고?’
에드는 마차 밖에서 들리는 대화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럴 리가 없었다. 원작에서 그 정도 마물이 출현했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정도 급이라면 몇 줄로 스쳐 지나가듯이 휘리릭 넘어가지 않았을 터. 큰 에피소드로 묶여 이야기가 이어져 나가면 나갔지.
그리고 정말 천향조가 나타났다면 황궁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었다.
역사서에 기록된 마물의 제왕인 천향조가 주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했다. 사소한 움직임에도 산을 부수고 땅을 갈아엎고 바다를 가른다고 했으니까.
그래서 에드는 생각했다.
‘……이거 대공 엿 먹이기네.’
천향조가 나타났다는 말에 대공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황제 폐하는 괜찮으신가?”
“그럼요, 대공 전하! 전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천향조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위대한 황제 폐하께서 바람같이 나섰는데 글쎄! 그놈이 쏜살같이 사라진 것 아니겠습니까?”
“…….”
“천향조도 감히 제국의 태양에 맞설 수 없다는 걸 알고 도망친 것이지요! 밤새 사냥터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어디로 숨은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런가?”
“네, 그러나 영광스러운 황제 폐하께서는 혹시 다시 나타날지 모를 천향조에 맞서기 위해서 지난밤 사냥터에서 뜬눈으로 지새우셨습니다. 대공 전하를 열렬히 환영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함을 매우 애석해하시면서 말입니다!”
졸렌 부시종장이 목청을 드높이며 말했다. 황제를 찬양할 때마다 목에 핏대가 시퍼렇게 섰다.
“그리하여 제가 이렇게 대공 전하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저만 믿고 따라오시면 됩니다! 바로 사냥터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로넨 도련님도 함께 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로넨도 함께 사냥제에 참석하기를 원하시는 건가?”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친족을 다시 만난다는 것에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고대하셨는지 모릅니다!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으신 마음에 대공 전하와 로넨 도련님을 사냥제로 초청하셨답니다!”
대공이 졸렌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리 마음을 쓰고 계셨다니 감읍할 따름이네.”
졸렌은 빙그레 웃으며 대공의 말을 받았다.
“그렇습니다! 황제 폐하의 자애로우신 성정을 어찌 이 입에 다 담을 수 있겠습니까? 제국어의 단어가 아무리 많고 세심하다 해도 황제 폐하를 표현하기엔 몹시 부족해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졸렌 부시종장의 황제 폐하를 모시고 위하는 마음이야 잘 알지.”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대공 전하. 그러니 저에게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부디 황제 폐하의 인자하고 깊은 뜻을 헤아려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졸렌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말하자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부탁하네, 졸렌 부시종장.”
* * *
마차는 부드럽게 달렸다.
대공은 마차 창틀에 팔을 기댄 채 우거진 숲으로 들어서는 졸렌을 내다보았다. 느른한 시선이었으나 마차를 호위하는 이르텔과 시선을 교환하며 주위를 기민하게 살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로넨은 긴 여정으로 지쳤는지 대공에게 몸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았다. 황궁에 도착해 벌어진 일에 어리둥절해하다가 졸렌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한 후로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잠을 쫓으려다 다시 꾸벅꾸벅 졸았다.
대공은 밖을 살피다가도 옅게 웃으며 그런 로넨의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러곤 로넨이 더 편하게 고개를 기댈 수 있게 몸을 움직였다. 숲길로 들어선 마차가 덜컹거리자 로넨을 조금 더 당기며 안정감을 줬다.
대공은 황궁에 짐을 풀고 대기하는 북부 기사들을 남겨 두고 몇 명만 추려 함께 움직였다.
에드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대공의 맞은편에 앉아 마차 밖을 내다보던 에드는 생각했다.
‘진실과 거짓이 섞여 엉킨 실타래 같네.’
천향조가 나타났다는 것은 거짓이고, 미리 연락책을 보냈다는 것도 거짓으로 보였다.
황제가 사냥터에서 로넨을 보려고 하는 의도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도 대공이 친동생을 찾아 대중들의 이목을 끌 듯하니 그 관심을 분산시키려는 목적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