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차가운 북부 대공의 집사로 사는 법-59화 (59/198)

Chapter 59

〈…….〉

〈…….〉

말을 잊은 로넨과 에드가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자 제이논이 그릇 옆에 환약이 올라간 접시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 환약도 같이 먹어야 효과가 좋다고 하니 꼭 같이 드셔야 합니다. 환약이 조금 크긴 하지만 물러서 씹어 삼키면 금방 넘어간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조금 크다는 게 주먹만 한 크기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지?

포크로 환약을 콕콕 찌르던 로넨이 고개를 들었다.

〈에드가 먼저 먹어 봐.〉

에드는 포크 끝에 묻어난 약초 덩어리를 주시하다 고개를 들었다. 크게 난 창으로 시선을 주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로넨 도련님께서 먼저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야, 이렇게 몸에 좋은 건 어른이 먼저 맛보는 게 좋다고 책에서 읽은 것 같아.〉

〈도련님께서는 어른인 저보다 물약도, 환약의 양도 반 토막이니 한입에 꿀꺽 넘기기 수월하실 것 같습니다.〉

로넨과 에드가 서로에게 약을 먼저 먹으라고 떠넘기니 제이논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신호를 드리면 동시에 먹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먹어야 끝나는 일이니 이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약을 바라보던 제이논이 하나, 둘, 셋을 외치니 에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릇을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쳐 입에 댔다.

‘의원과 의논할 게 있다더니 이 약 때문이었구나.’

어제 대공이 치료실을 비우고 어떤 일을 봤는지 알게 되자 단 한 방울의 물약도 흘릴 수 없었다. 아깝고 죄를 짓는 느낌이었다.

에드는 물약을 크게 한 모금 꿀꺽 넘겼다가 숨을 꾸욱, 참았다. 미각을 통째로 잃어버리는 맛이었다.

〈…….〉

〈…….〉

제이논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빙그레 웃었다.

‘어른스러운 태도로 로넨 도련님에게 모범이 되는 모습을 보여 주자고, 에드.’

제이논이 눈으로 말하는 바를 에드는 알아들었다.

‘아, 이래서 내게도 약을 주는 것이구나.’

입술을 혀로 쓸었던 에드는 입술에도 남아 있는 쓴맛에 몸을 작게 떨고는 웃으며 말했다.

〈하, 하나도 쓰지 않고 맛있네요.〉

〈정, 정말?〉

〈네,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쓴 법이니 그를 생각하면 꿀맛과도 같습니다.〉

에드가 바르르 떨리려는 입술에 힘을 주고 말하자 로넨이 손에 그릇을 쥐었다. 그러나 여전히 의심이 남아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에 에드는 남아 있는 물약을 한 번에 들이켰다.

그에 로넨도 용기 있게 약을 마시다가 윽, 동공 지진을 크게 일으켰다.

약을 다 마신 후에도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환약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역시 모범을 보여 줘, 하는 제이논의 압박에 에드가 먼저 먹었다.

썼다. 몹시 쓰고 떫었다.

‘그래도 이것만 먹으면 될 테니까.’

에드는 제이논이 챙겨 주는 사탕을 먹으며 입 안에 남은 쓴맛을 밀어냈다.

하지만 문제는 일회성 영양제가 아니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트롤리를 탈탈탈 끌고 오는 제이논을 보면서 에드와 로넨은 눈을 끔뻑였다.

‘뭐, 뭐야? 이거? 아침에 먹은 게 다가 아니었단 말이야?’

약을 다 마시고 먹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겠다는 제이논을 보며 에드와 로넨이 머리를 맞댔다. 이걸 얼마나 더 마시고 먹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에드가 입을 열었다.

“로넨 도련님, 약을 먹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 몸이 좋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로넨 도련님의 건강을 걱정해서 약을 마련하신 것 같습니다.”

“음, 그게 아니라 에드를 걱정해서가 아닐까? 나는 엄청 튼튼하니까.”

잠시 로넨과 에드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가 서로의 탓이라고 눈빛으로 주장했다.

에드가 흠흠,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렇다면 대공 전하께 로넨 도련님과 제가 건강하다는 걸 보여 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로넨이 고개를 기울였다.

“어떻게?”

에드는 로넨에게 머리를 가까이 대며 속삭였다.

“바로 이렇게요.”

* * *

남부 일라에서 황도로 출발하는 오후, 대공은 정원으로 나와 짐을 옮기는 부하들을 살폈다.

이틀 정도 축제를 즐기며 휴식을 취했더니 힘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마차에 짐을 싣고 옮기는 그들의 모습에 힘이 넘쳤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했다. 몸이 가볍다고 의욕만 차서 행동했다간 자칫 실수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면 곤란했다. 오늘부터는 일라에서 황궁으로 가는 팀과 북부로 올라가는 팀이 갈라졌다. 짐이 서로 섞이면 안 되었기에 자잘한 실수라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대공은 신중한 눈길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그런 대공의 곁에는 로넨이 붙어 있었다. 약을 잘 챙겨 먹어서 그런지 부쩍 힘이 붙은 손으로 대공의 팔다리를 꾹꾹 주무르고 있었다.

“아스넬 형, 시원하세요?”

대공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시원하고 좋아.”

동시에 생각했다.

‘약을 조금 더 사 갈까?’

북부 주치의는 로넨의 성장 상태가 나쁜 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대공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로넨은 여전히 너무 작았고 식사를 하는 것도 시원찮았다.

‘저 나이엔 자고 일어나면 한 뼘씩 쑥쑥 자라는 때이건만……. ’

그리고 로넨 것도 챙기면서 에드 것도 더 사고 말이지.

그런 대공의 속도 모르고 에드는 저택 입구 앞에 서서 때를 노리고 있었다. 대공이 기분 좋은 때였다. 로넨이 손끝에 힘을 팍팍 실으며 힘자랑을 하는 것도 에드가 한 조언이었다.

‘몸이 튼튼하니 더 이상 약을 먹어도 되지 않다는 것을 대공 전하 앞에서 증명하는 겁니다.’

그 순간, 빠르게 주위를 살펴보던 에드는 발을 뗐다. 등에는 천을 둘둘 말아 백 팩처럼 짐을 메고 두 손에는 커다란 짐가방을 턱턱 들었다. 안은 좀 비었지만 그래도 제법 묵직한 가방이었다.

에드는 그걸 대공이 잘 보이는 눈앞에서 척척 옮길 생각이었다.

‘이것 보십시오, 대공 전하. 약 같은 건 먹지 않아도 될 만큼 건강하다 이겁니다.’

에드는 양손에 가득 쥔 짐을 들고 대공이 서 있는 나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히이잉!

그때 말 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에드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춧가루를 퍼먹은 것처럼 새빨간 갈기를 휘날리며 달려온 말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앞에서 앞발을 쳐들고 있었다.

“뭐, 뭐야?”

하고 놀랄 새도 없었다.

말고삐를 놓친 기사의 실수로 순식간에 생긴 일이었다. 에드!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동시에 자신의 몸에 강하게 부딪혀오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몸이 낙하하는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땅끝으로 몸이 쑤욱 끌려가는 느낌과 함께 단단한 품에 안겨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에드는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괜찮아? 에드?”

낮은 목소리가 옆통수 전체에서 들리는 느낌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세상이 드디어 멈추자 에드는 눈을 떴다. 몇 번이나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목에 걸린 숨을 토해 냈다.

“응? 괜찮아?”

그때 또다시 정말 좋은 목소리가 옆통수 전체를 울렸다.

눈을 깜박이며 에드는 답했다.

“네, 네. 괜찮습니다.”

파스락.

그리고 입을 움직일 때마다 뺨에 눌리는 얇은 천 조각의 느낌에 에드는 의아했다. 이게 뭔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아, 이거 질 좋은 셔츠인 것 같은데…….’

깨닫기가 무섭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

“…….”

대공과 눈이 마주치자 에드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대공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제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해서 맞닿은 시선에 몹시 불안해졌다.

‘내, 내가 지금 뭐 어디에 어떤 자세로 드러누워 있는 거지?’

상황을 파악하는 건 뒤로 두고 그냥 이대로 기절했으면 했다. 손에 닿은 탄탄한 타인의 감촉에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내가 아무래도 지금 대공을 깔고 누워있는 것 같은데.’

더 이상 현실도피를 할 수는 없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에드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상체를 들어 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완전히 정신이 들어 말갛게 갠 시야로 주위 상황이 보여도 너무 잘 보였다. 자신이 대공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 그래서 대공의 목소리가 귀뿐만 아니라 옆통수 전체로 들리는 느낌이었구나.’

등으로 땀이 다 났다. 만수산 드렁칡도 아닌데 대공의 다리와 제 다리도 얽혀 있었다.

에드는 곧바로 대공에게 사죄했다.

“죄,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저를 감싸 안고 바닥을 도르르 구르느라 대공의 옷차림은 엉망진창이었다.

에드는 빠르게 움직였다. 얽힌 다리를 살짝 벌리고 오른쪽 무릎으로 바닥을 짚으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이번에 탄탄하고 튼실한 근육이 엉덩이에 느껴졌다. 얽힌 다리는 풀었지만 에드가 대공의 배에 올라탄 형국이었다.

‘아니 왜 점점 내 무덤을 파는 것 같지?’

“정, 정말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괜찮으십니까?”

대공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응, 그래. 아직까지는 괜찮아.”

“네, 죄송합니다. 빨리 일어나겠습니다.”

에드는 뒤로 손을 짚었다. 땅바닥을 짚고 벌떡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 이건 뭘까?

손에 닿는 이 단단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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