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
1번으로 줄을 세우는 걸 보며 에드는 목을 긁적였었다.
말의 정보가 나온 책자를 가볍게 훑어보다가 적는 번호에 대공이 별로 재미도 없을 것 같은데 경마장에 온 건 아닌가 하여서 심란했었다.
‘거북이 경주 대회만 날려 버린 게 아니라 이런 종류의 게임 자체에 흥미가 없는 걸까?’
그런데 첫 번째 경기에서 1번 말이 이기자 에드는 자신이 찍은 말도 아니면서 박수를 쳤다.
두 번째 경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번 말이 이기자 환호를 내질렀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에드가 번쩍 든 팔에 이번에는 옆에 앉은 사람이 슬금슬금 반대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와아아!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경마에 나서는 슈와 펄이 등장하자 경마장에 환호의 물결이 솟구쳤다. 에드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펄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랐다.
“대공 전하! 이번에 맞히면 3연속 정답입니다!”
에드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대공은 앞으로 뛰쳐나가기라도 할 듯이 몸을 일으키는 에드의 배를 팔로 받치며 웃었다. 어느새 에드는 승리의 즐거움에 도취되었다.
“걱정할 것 없어, 에드. 흑마의 컨디션을 보니 오늘 승리는 1번 말이 확실해.”
“정말이십니까?”
“걷는 게 아주 가볍고 고개를 아래로 내리깔지 않는 걸 보면 컨디션이 아주 좋아.”
헤린스 백작가에서 지낼 때도 경마장을 다녔지만 오로지 시합 결과만 보았기에 에드는 이런 설명이 곁들어진 경기를 보자 새로운 기분이었다.
경기장과 좌석의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바로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즐거웠다. 홀로 썬더를 응원할 때와는 기분이 완전히 달랐다.
에드는 눈을 반짝이며 대공의 말을 경청했다.
“그에 반해 백마는 고개를 자꾸 틀며 투레질을 하는 게 오늘은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것 같군.”
흑마를 시선으로 따르는 에드의 눈에 신뢰가 가득 찼다. 걸음걸이가 가벼운 말이 경주 코스에 들어섰다.
그리고 타앙!
세 번째 경기가 시작했을 때 에드의 머릿속으로 슬그머니 생각이 피어올랐다.
‘……이랬는데 설마 거북이 경주 대회처럼 허무하게 끝이 나는 건 아니겠지?’
* * *
타앙!
세 번째 경기가 시작되는 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말들은 빠르게 달렸고 관람객들은 주먹을 꽉 쥐며 달리는 말에 집중했다.
“슈! 오늘도 1등을 하는 거다! 너만 믿는다! 펄을 납작하게 눌러서 본때를 보여 주는 거야!”
“펄! 오늘 기필코 승리를 거머쥐어 옆집 영감의 입을 다물게 해 주자고! 매일매일 슈만 찾는데 흥! 우리 펄이 얼마나 잘 달리는데!”
에드는 귓가에 닿는 소리를 들으며 경마를 지켜보았다. 짧지 않은 거리를 순식간에 내달리는 펄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환호성을 질렀다.
승부는 결승전을 앞두기도 전에 갈렸다. 백마에게 한 번도 뒤처지지 않은 흑마가 끝까지 1등 자리를 지킨 채 결승전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대공 전하가 맞았어!’
펄이 결승선을 통과하자 에드는 저도 모르게 옆에 있는 대공을 끌어안았다. 자신이 찍은 번호는 일찌감치 틀렸고 경품이 뭔지도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비록 타인의 승리였지만 그럼에도 기쁜 에드는 와, 함성을 내질렀다. 대공과 짝, 짝 손바닥을 마주치며 웃었다.
혼자 1등을 맞히는 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경마를 보며 즐거움을 나누는 일은 그보다 더한 흥분을 고조시켰다.
머리끝까지 튀어 오른 열기에 에드는 환하게 웃었다.
* * *
경마가 끝나자 에드는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경마장을 나오는 길은 복잡했다. 직원들은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것을 대비해 구역을 나눠 사람을 내보냈다.
2구역인 에드는 경마가 끝난 이후에도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야 했다.
“1구역 관람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동쪽과 서쪽 출구를 통해 퇴장하시길 바랍니다. 2구역 관람객들은 자리에 앉아서 잠시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확성기로 안내하는 직원을 말에 에드는 대공을 곁눈질했다. 검은색 모자를 쓴 대공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에드는 고개를 이쪽저쪽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출구를 돌아보았다.
‘빨리빨리 좀 움직이자.’
오랜만에 한국인다운 발상을 하면서 구둣발로 바닥을 톡, 톡 차며 마음을 졸였다.
‘대공께서 너무 오래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때였다.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린, 린든 대공 전하. 죄, 죄송합니다! 존귀하신 분을 미리 알아 뵙지 못하여 정,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경마장 직원들이었다. 특등석 관람 좌석을 담당하는 연륜 있는 직원들이 쪼르르 서서 대공에게 고개를 숙였다.
에드도 그 분위기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인의 자세로 고개를 숙이며 대공의 말을 듣고자 했다.
“…….”
그러나 에드의 팔목을 잡은 대공이 손등을 톡, 톡 가볍게 두드렸다. 그냥 자리에 앉아 있으라는 의미에 에드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말문을 연 건 직원들 중에서 가장 노련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부디 저희 경마장의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금부터 저희가 대공 전하의 빠른 퇴장을 위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대공과 나란히 앉아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에드의 심정도 마찬가지라 직원이 이마로 삐질삐질 흘리는 땀의 정체를 쉽사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공의 소중한 시간을 너무 빼앗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되던 차였다.
방금 전까지 대공과 즐거움을 만끽했지만 뜨거웠던 열기가 식고 현실로 돌아오자 에드는 대공의 허리춤을 끌어안다시피 했던 손을 잽싸게 치웠으니까.
‘아니, 뭐 그리 좋다고 이런 미친 짓이야?’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었던 몸도 의자에 붙이며 흠흠, 헛기침했다. 대공의 허리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즐거워했던 장면이 제발 꿈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두 팔 가득히 남은 탄탄한 몸의 느낌에 에드는 빠르게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손끝에 남은 감각을 털어 내며 자리에서 빨리 일어날 수 있길 출구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폈었다.
대공의 앞에 선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일어날 준비를 하지 않는 대공을 주시하며 긴장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공이 입을 뗐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지? 모자를 쓰고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았을 텐데.”
“아, 그것이 말입니다. 대공 전하.”
직원의 시선이 귀족용 관람석으로 움직였다.
“일라에서 예술가들을 가장 많이 후원하는 넬스 후작가의 장녀인 리사 영애가 경마를 관람하다가 대공 전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저희에게 연락했습니다.”
“넬스 후작가라면…….”
대공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네, 지난가을 흑해 근처에서 예술품을 관람하고 돌아오는데 큰 봉변을 당할 뻔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린든 대공 전하께서 도움을 주셔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의 기억으로 귀하신 대공 전하의 존면과 존함을 기억하고 있다고 합니다.”
에드는 시선을 살짝 돌렸다. 모두 빠져나간 귀족 관람석에 양산을 쓰고 서 있는 여성이 보였다. 쌍안경을 이용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에드는 다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대공은 가볍게 웃으며 에드의 옷깃을 잡아 끌어내렸다.
“그래, 그렇게 말하니 기억이 나는 것 같아.”
“네, 그때 주신 도움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 리사 영애는 여전히 린든 대공 전하의 활약을 기억하며 보은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닙니다, 그러니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오늘 넬스 후작가의 저녁 만찬에 와 주시길 청하셨습니다. 린든 대공 전하께 꼭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사 부탁드린다고 합니다.”
대공은 모자 끝을 매만지며 답했다.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감사 인사는 그때도 충분히 받을 것으로 기억하니, 오늘의 만남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하, 하지만 대공 전하.”
“참, 그리고 오늘 저녁에 일라의 축제를 기념하는 불꽃놀이를 한다고 하던데 언제 시작하지?”
“아, 그게.”
하면서 조금 더 대공을 설득하려던 직원이 답했다.
“오늘 밤 9시 30분에 중앙 광장에서 불꽃놀이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대공 전하.”
“그래?”
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낸 대공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 일라에서 가장 맛있게 스테이크를 굽는 곳을 추천해 주겠나?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즐겼더니 배가 출출해지는 시간이 되었는지도 몰랐지 뭔가.”
“그럼 저희가 불꽃놀이를 볼 수 있는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도록 하겠습니다.”
대공은 직원의 그 말 또한 밀어내며 답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오늘은 좀 여유롭게 걷고 싶어서 말이지.”